물의 자격을 얻었다.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내 행동이 잃지 않은 그때, 비로소 물의 자격을 얻었다. 말과 행동, 생각과 마음이 일치한다라. 과연 그러할 수 있겠느냐 라는 문제라기 보다는 나아가는 길에서 반드시 해내야 할 몫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물의 자격을 얻었음을 깨닫는다. (음성 듣기) https://youtu.be/I89krA0DnVU
시냇물이 흘러간다. 흘러 내려간다 라는 표현이 좀 더 맞겠지. 그러면서 돌에 부딪히고 좀 더 낙차가 크게 되면 소리가 크게 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잔잔해지는 그때가 다가오고, 마치 보이는 건 물이 가만히 있는 듯 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지.
삶의 본질이란,
멈추는 순간 썩는다.
물이 흘러가지 않고 고여 있게 되는 순간 썩는다.
그 안에서 휘몰아치든 흘러가든 내적 움직임이 없는 한 썩고 만다. 오히려 썩은 내를 풍겨 주변을 더 불쾌하게 만든다.
삶의 본질이란,
생(살아있음)의 본질이라고 표현해야 되겠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 살아있지 않은 것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보이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 어떠한 것이라도 있는 공간에 존재하게 된 것들은 모두 흘러간다.
그래야만 생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지.
가만히 있는 순간 썩어 주변을 망친다. 하나의 물 알갱이 알갱이가 서로서로 부딪치고, 내려가는 힘에 의한 방향을 가지고 계속 움직이게 되는 자체가 생의 본질.
있는 것들에서, 있는 곳에서, 있는 공간에서 생겨난 모든 것들은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썩고 움직여야만 존재를 유지할 수 있지.
이를 다시 사람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관계로 본다면 끊임없이 소용돌이 치는 감정. 가만있으면 지루하고 뭔가를 하고 벅차면 피곤해지는 이런 일련의 흐름이 물이 흘러가듯, 그리고 또한 이 자체를 산책길을 걸으며 시냇물을 바라보고 느끼는 이 관조하는 감정이 다시 들게끔 하는 것 또한 흘러가는 범주에 속해 있다.
잘 되고 못 되고의 어떤 측면에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좀 더 빠르게 혹은 알갱이들끼리의 관계가 좀 더 활발하게, 이런 것들은 사실 너무나 작고 작은 거대한 흐름이 흘러가는 중에 단지 아주 작은 이벤트에 불과하다.
그로부터 물이 튀는 걸 좋아해야 될지, 바위에 물이 가로막혀 물이 부딪치고 갈라지는 그 열쇠(역할 혹은 기능) 들을 기꺼이 바라봐야 될지, 만들어 놓은 가만히 있는 것들에 둘러싸여 흘러가는 물을 좋다고 봐야 할지, 새벽 5시에 일어나 나서지 않는 해나와 예티를 잠시 머뭇거리며 기다리다가 그냥 나서는 걸 자연스러워 해야 할지, 무엇을 불편해하든 어떤 걸 갈망하든, 단지 하나는 멈추는 순간, 감정이 메마르는 순간, 감정을 갖지 아니한 순간, 가만히 있고자 하는 순간, 죽는다.
죽는다라는 건, 재탄생을 위한 재료로서 쓰인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고인 물은 결국엔 증발하거나 냄새로서 산화되거나 사라지는 운명. 그 여파는 주변에 좀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 존재감이야말로 있는 것들의 공간에서 탄생한 어찌 알 수 없는 더불어 살아가는 현상 중의 하나.
굳이 고이고자 할 필요는 없으나 고인 물을 욕할 필요도 없다.
역할이라는 거, 기능이라는 거, 잘나고 못 나가는 거, 사랑하고 죽는 거, 온전치 못하니 본질에 가까운 것, 흘러가는 것, 내버려 두는 것, 흘러가는 자체에 대한 인식이나 자각, 느끼는 것.
배경이 달라질 뿐 흘러간다는 자체에 대한 성질은 그대로 인 어디로 가나 어느 곳으로 가나, 물이 고여 있으나 없으나, 스며들고 증발하고 다시 흘러가고 거대한 바다에 모이고, 무한한 흐름 속에 흘러간다. 기록이야말로 에너지가 될 거다.
정보야말로 본질적 역할에 대한 흘러가기 위한 기본적인 토대가 아닐까 생각을 했었지. 어쩌면 기록 또한 흘러가는 것에서 파생된 삶의 본질에서 나온 그냥 하나의 에너지원 중의 하나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 고유한 성질을 가졌든, 어떠한 모양으로 보이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다양한 모양새와 성질을 띠게 된 것은 어쩌면 그저 달라 보일 뿐, 본질은 하나.
멈추면 죽는다.
다시 재플레이 되기 위한 재료로 쓰인다.
여기에서 이제 다시 또, 태초의 카테고리. 왜 태어났니? 태어났으면 뭔가 해야 되지 않겠니? 어떤 역할론이 튀어나오고, 역할론은 역할에 따른 여파와 그에 따른 보람과 어떤 담아내는 정보들의 질의 양, 행복의 척도, 거쎈 물소리가 주변을 울리듯 잔잔한 물소리가 조용히 고요히 흘러가는 내면의 성숙함을 보여주듯, 다채로운 모습이 다채롭게 태어난 그 모양 그대로 자연스럽게 나타내어지듯, 있게 되었으니 나아간다.
그 안의 역할과 기록이 되어 정보를 주고받으니 끊임없이 나아간다.
나아가는 건 존재, 생김새, 성질에 따라 달라지지 않고, 모두가 함께 나아간다. 돌고 돌아 섞이고 섞여 나아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
무엇을 하든 어떤 것을 해도, 보이는 것들의 파괴와 죽음은 그저 나아가기 위한 나아가는 것에서의 이벤트. 거대한 큰 줄기에 불과하다. 받는 것, 흔히 점프하는 것, 어디까지나 할까?
관조자의 입장에선들 뭐가 다를까?
삶을 뼈저르게 느꼈다. 행복과 사랑을 했다. 할 거다. 하고 있다. 난 매순간이 즐겁다. 지루하고 따분하기 그지 없는 경우도 많다. 부럽고 성취감을 느낀다. 달리고 달린다. 있는 것으부터 탄생한 모든 존재는 나아간다.
'그냥 달린다. 스치는 바람에 살아있음을 느낀다. 당신과 함께.'
이 말이 지닌 의미는 참으로 내게로 와 닿는다. 손이 시려워 아프다.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을 것이고, 뽀드득 뽀드득 걷고 있는 눈길 위에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지금의 나. 그리고 주변에 눈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느껴지는 것들, 그리고 느껴지지 않는 숨겨짐, 감추어짐, 혹은 다가올, 혹은 지나간, 모든 풍랑이 잔잔하든 격랑이 일든, 나이가 들어 관조하는 입장으로 가든, 뭘 바라고 뭘 했건, 지금 미소짓는 내 마음의 원천은 본질이 이와 가까이 있다면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리라.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내 행동이 잃지 않은 그때, 비로소 물의 자격을 얻었다 라고 할 만하다.
내 생각과 내 마음과 행동이 일치한다라!
단지,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고, 연기라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떳떳함, 당당함, 드러냄, 속임, 이런 티끌들이 하나하나 사라지고, 얄팍하고 농담 섞인 장난들이 하나의 자극이 되어 다시 되돌아오든, 그렇게 그런 착각이 말과 행동, 거기에 마음이, 거기에 생각까지 일치한다라. 물의 자격을 얻는다. 흘러가는 물의 그 힘과 원동력. 흘러간다는 본질이 있는 것들의 존재 이유. 왜 태어났니에 대한 의문을 품을 필요 없는 그것.
하늘을 보고, 달을 찾고, 눈이 덮인 길을 비춘 수많은 전등 불빛에 눈이 환하게 웃고, 손이 시려워 핸드폰을 든 손 외에 나머지는 들락달라 하고, 뛰지 못해 안달이나 그렇지만 뛰는 순간 이 마음이, 이 생각을, 이 느낌을 담을 수 없다라면 하는 안타까움에 걷기를 선택한다. 지금.
웅심이 튀어나오고 영웅심에 취해 살아가고, 역할에 목을 메고, 외롭지 않다 외로움에 몸서리치고, 서운하다 안타깝다 갈등 속에 무관심으로 무대응으로 관심 없는 척을 하고, 다를 것 없어 다를 바가 없지 그래도 이게 어디야 라는 걸 보니 내 처지를 위로하고 위치를 자각하더라.
물의 자격이라 함은,
올곧이 깨달음을 얻어 선각자가 되었다. 리더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우상이 되었다. 혹은 영웅이 되었다.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존재가 되었다. 그는 참으로 대단했다. 감탄을 자아낸다. 거기 안에 하나의 방편이 있으니 귀천이 없다.
산책길을 걷는, 그리고 걸으면서 마주한 물의 격랑과 잔잔함 속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있는 것들의 존재들이 나아가는, 거기에 닿은 지금, 물의 자격을 얻었겠지. 아마 얻었을 테지. 외로움마저 서운함마저 부러움마저 행복감조차 고요하게 보이는 이 도로 위로 올라선 지금, 아련히 남겨진 추억이 된다.
손이 깨질 것 같이 시려워 아픈 이 느낌 만이 '그래 그랬어. 그랬구나' 라는 걸 알게 하듯, 경험이란 건 잠시 언 손을,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녹여도 좋다. 내가 아니어도 된다. 반대의 경우처럼 너여도 좋다. 거기 있는 자리에 어울려서 좋다. 아니 해도 좋다.
죽음의 격랑을 잔잔함을 쫓겠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러 재탄생의 기쁨을 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들고 나고 좌우로 땡기고 뭉쳤다 줄였다 하는 감정에 흔들림이나 느낌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물의 흐름처럼 그렇게 살아가겠지.
(횡단보도를 건너는 지금) 버스가 서고, 나는 길을 건넌다. 치이익~
버스가 멈춰선 순간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난다.
나중에 소리가 없어진 무음의 세계. 귀를 기울여야만 소리가 들리는 세계. 소리를 만들어야만 하고 기척을 내야만 하는 그런 세상. 기계가 돌아가면 당연히 소리가 나겠지 하는 것보다 소리가 사라져서 소리를 만들어 내는 일이야말로 서로 서로가 알게 되는 그 시대. 멀지 않은 듯하다.
나를 나타내는 것이 그 두 번째. 소리의 기척으로 나를 알리고, 그 기척에 눈이 돌아가 보게 되 순간 서로가 서로를 인식한다. 다 왔다. See U. 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