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다 라는 것에 관한 실마리
있다는 없다에서 비롯되었다. 없었기 때문에 있을 수 있었다. 있게 된 순간 한계가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우주는 끊임없이 팽창하는 듯 보인다. 태초에 없었다면 있는 것이 나아가는 건 무엇일까? 무한대의 고리처럼 반복에 속한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없다 라는 것에 대하여 정의내릴 필요가 있다. (음성 듣기) https://youtu.be/3y5YY5sxVOc
6시 38분.
자욱한 안개를 바라보면서 도로의 전등 빛들이 안개를 뿌옇게 비추고 있는 도로. 저 언덕만 넘으면 이제 좌회전을 받는 옥산 사거리. 지금 속도는 90km/h 정도. 6시 20분에 출발을 했다. 오늘은 5시 알람을 듣고 덮은 다음, 편안하게 잠에서 깨었지만 일어나지 않고 좀 더 누워 있은 다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다시말해, 산책을 빼먹었다는 말이다. 처음으로.
6시 20분에 집을 나섰다.
중심을 잡고, 존재로서의 자각을 한 다음, 물의 자격을 얻었다. https://meatmarketing.tistory.com/5841
알갱이들이 부딪쳐 부딪쳐 흘러간다.
없다 라는 건,
지금 내가 표현코자 하는 없다라는 건 있는 것의 반대 의미로 보아 없다라고 볼 수 있을까?
'존재로서의 자각'에서 밝혔던 있다와 없다에 대해서 있다라는 건, 있는 데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날 것이고 일어났거나 무한한 상상이나 꿈조차 일어나는 범주에 들어간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없다라는 건 뭘까?
없다 라는 건 태초, 있는 것이 탄생하기 위한 그 출발점.
출발은 있는 데서 한 것이 아니고, 없는 데서 했겠지. 그 없는 것이 있다와 없다의 구분자로 볼 때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없다라고 표현하는 건 있는 것이라는 표현에 반의어로서 쓰이고 있긴 하지만, 없다라는 건 엄밀히 얘기한다면, 없다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거나, 장악하지 못한다 라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라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다. 혹은 사멸한다. 소멸한다. 우리가 표현하는 소멸한다. 영원히 소멸한다. 그 영혼이 소멸한다 라는 말 속에도 완전히 없어 사라진다 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조차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했기 때문에 완전한 소멸은 있을 수 없다 라고, 이렇게 표현해야 되나?
그러니까 문득 드는 생각이,
없다? 없다는 건 정말 깜깜한,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암흑? 시각적인 표현이 아닐 것이라고 본다. 어떤 흐름의 어떤 파장 속에의 움직임이나 꿈틀거림. 이것 또한 아닐 거라고 보는 거지.
전자는 움직임이 입자로서 그리고 파동으로서 움직일 수 있다. 물결처럼 퍼져간다. 가령, 바람은 흘러가는 거지. 파동처럼 흘러가는 바람 안에 알갱이는 무수히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공기는 우리가 얘기하는 원소들의 집합체이고, 바람은 스쳐 지나간다. 그렇지? 그 알갱이들이 뭉쳐서 나에게 느낌을 주는 게 아니라, 바람처럼 느끼게 해주지. 파동.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파동. 그러니까 일상 중에도 이미 풍부하게 사례는 많다. 단지 입자와 파동만으로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는 건지, 더 있는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두 가지 성질이 중첩돼 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밝혀냈다라고 하는 표현에는 대단한 발견처럼 표현되고 있지. 현재.
그렇지만 이미 일상 중엔 자연스러운 것. 지구 또한 우주 또한 거대한 흐름 흐름이 끊임없이 팽창한다라는 것에 따라 지구는 나아간다. 그렇다면 멀리서 봤을 때 태양계가 속한 은하가 이 은하는 분명히 뻗어 나아갈 것이고. 이 안에서의 흐름은 알갱이들의 움직임처럼 태양계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만 태양계는 또한 뭔가를 돌고 있을 것이고, 그 소용돌이 속에 은하는 저 멀리서 보면 다시 지구가 태양을 돌 듯이 은하 또한 뭔가를 중심으로 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팽창이라는 건 점점점 멀리 나아가기 위한, 뻗어 나가기 위한 큰 동심원의 구조. 소용돌이치는 깔때기 모양의 물이 빠져나가는 형태일지, 반대로 밖으로 뻗져나가면서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구조일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안으로 들어갈수록 빨려 들어가서, 빨려 들어간 건 다시 어디로 나오지? 큰 원천 혹은 밖으로 뻗어나간 점점 뻗어나가는 어떤 것들과의 접점 혹은 흐름. 바다 건너 낭떠러지. 바다의 끝이 있었다라고 믿었을 때의 현상처럼 우리가 얘기하는 깔때기 모양의 것이거나, 돌을 매달고 돌렸을 때 줄을 휙휘 돌렸을 때 중심에 잡고 돌리는 바깥의 돌은 점점 파문을 일으켜 밖으로 나아가지. 근데 우주는 이 중심을 잡고 있지 않아.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주는 밖으로 뻗어나간다? 어떤 힘으로 뻗어나가?
시작되었으니 무한히 뻗어 나간다. 뻗어 나간다. 그럼 뻗어 나가는 공간이 있을 거라는 거야. 그 뻗어가는 공간이 있다라면 있는데서 확장하는 거니까 무슨 큰 문제가 있겠어. 내가 여기서 돌을 던져, 아니면 혹은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 파문이 일어난다고 볼 때, 파문의 끝은 연못의 가장자리에서 끝나잖아? 하지만 만약에 연못의 가장자리에 경계가 없다면, 그러니까 지금 깔때기 모양의 중심을 잡고 있지 않은 확장이라고 얘기했잖아. 그렇다면 경계 또한 없어. 그리고 중심을 잡고 있지도 않아. 근데 뻗어나가. 어떤 힘으로?
태초에 물방울을 떨어뜨렸으니 잔잔한 물이 파문을 일어 무한히 뻗어 나간다? 무한히 뻗어 나간다. 아니면 물방울을 계속 떨어트리고 있다? 어디에서 어딘가 혹은 잡고 돌리고 있다. 중심을 어디다 두고. 그러니까 큰 흐름의 맥락이 내 피부에 와닿지 않더라도 이 뻗어 나가는 힘에는 뭔가가 작용을 해야 된다라는 거지. 끊임없이 뻗어 나아가려면 파문이 일어나는 동심원을 그리는 물방울이 계속 떨어지거나, 혹은 줄을 잡고 계속 돌리고 있어야 된다라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서 무한히 뻗어나간다?
자, 그렇지 않다면 이라는 가정으로 살펴본다면,
무한히 뻗어 나간다?
무한히?
어떤 힘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정신, 상상, 차원, 어떤 있는 것들에 벌어지는 무수히 많은 것들의 에너지를 소모해서 나아간다고 하자고.에너지원은 그렇다 치자고. 그럼 자가동력으로 간다? 은하 자체가 지구가 자가 동력으로 태양을 도는, 태양이 잡고 지구가도는 태양과 지구의 관계에서 힘이 발생했잖아? 무한하다. 힘이 발생했다. (여기에서 드는 의문은 단지 행성 간의 관계에 의한 힘으로 유지가 지속가능하다는 것이냐는 것. 이건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태초에 집중한다.)
근데 시초, 어느 하나의 점을 본다면 점은 하나의 파문처럼 없는 데서 있는 곳으로 똑 하고 물이 떨어졌을 거라는 거지.
자, 그렇다면 없는 공간이야. 없다고.
있는 공간이 우물처럼 경계가 명확히 그려져 있다면, 우주는 거기까지 파문이 일어난 다음에 뭐 흘러 넘치든, 파문이 더 이상 가지 않든, 어떤 힘의 작용이 안으로 돌든 밖으로 돌든 멈추겠지. 비극적이지만 멈춘다. 한계가 있다.
여기서 다른 건 파문은 외부에 의해서 작용된 힘이 파문을 일으켰고, 그 외부에서 작용된 힘의 파문이 연못의 가장자리가 있다라는 가정 하에 파문은 퍼져나갔다라고 보는 거지. 그렇지만 힘이 외부에 있지 않다.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하나의 점이. 근데 여기에서 헷갈린다는 거지.
하나의 점이 없는데 있어졌다.
그러면 이 안에 점 하나를 만드는 순간, 이 안에 무수히 많은 원자의 전자들이 입자가 핑글핑글 돌면서 파문처럼 옆으로 퍼져나가기 위한 팽창을 계속해. 하나의 점이 지구와 같은 모양일 수 있겠지. 지구 안에 무수히 많은 사람과 동식물과 이 전에 공룡과 이전에 어떤 가스들의 어떤 움직임이라든지, 어떤 상호작용. 뭔가가 있다. 뭔가가 태초에 있어 꿈틀꿈틀 지성체가 아닌 어떤 상태라고 하더라도 움직였다. 한낱 바위만, 모래만 존재하더라도 모래밭이라고 하더라도 쓸리고 움직였을 거다.
더구나 하나의 점은 홀로 있지 않아.
원자와 전자라는 관계에서 시작되었으니까. 끊임없이 돌고 돈다 이거야. 외부로 팽창하면서 점이 점점 커져 태양계를 형성했을 수도 있고, 은하를 형성했을 수도 있고 다시 우주를 형성했을 수 있지. 이게 하나의 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라는 면에 대한 것. 만약 거꾸로 하나의 점, 하나의 생태계가 그 점의 크기가 태양계와 같이 어떤 구성을 가지고 시작을 했다면, 또 다른 얘기가 된다. 자가 발전처럼. 가스를 뭉쳐 놓는다고 생명체가 될까?
자, 생명체의 메커니즘은 무수히 많은 바이러스, 미생물, 무생물, 어떤 것들의 집합이 끊임없이 공생과 소멸과 사멸 이런 것들이 반복하면서 어디에 기생을 하고, 숙주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지성으로서의 자각, 이런 끊임없는 진화를 거친 산물이다. 진화는 결국 점 하나에서 시작되었다라는 거잖아.
그 계기, 그 조건, 환경이라는 건 있는 대로 있는 데서 맞춰진 것이고.
자, 내가 궁극적으로 보고자 하는 건 나아간다거나 흘러간다라는 게 궁금한 게 아니라, 자 이 시작이 점이었다면 점은 어디서 왔느냐?
없는 곳에 뭔가가 생겼다면 없는 곳에 생긴 그것은 없는 것에 끊임없는 팽창이 가능한 것이냐? 아니면 있는 것에 공간을 이미 확보해 놓은 상태에서의 파문인 거냐? 단지 차이는 끊임없이 돌리고 있는 이 에너지가 외부에 의한 돌림이나 줄을 잡고 돌리는 것이냐? 혹은 물방울을 계속 떨어뜨리는 힘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진화로 나아간다거나 흘러간다 거나 자가 발전을 기분으로 돌렸다라는 거지.
원자와 전자의 관계처럼 원자 안의 핵이 핵으로서 단지 핵으로서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어떤 미세한 무수히 작은 어떤 알갱이를 얘기한다고 손 치더라도 태초의 점 하나는 지금의 모습과 동일했을 거라는 거지. 그렇지 아니하면 모습이나 모양, 그거라기 보다 우리가 얘기한 정보의 원천이나 근원으로부터 지금의 사람이 태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진화가 될 수 있는 여지를 혹은 여지를 둔 어떤 정보가 있었을 거다. 끊임없이 반복하다 보면, 뭔가가 튀어나오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 있었을 거다.
없는 곳에, 없는 것으로부터 어느 하나에 점이 생겼다.
점이 자가 발전을 장착한 확장을 한다. 내 눈엔 점이 확장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본다면 그 정도쯤이야 할수도 있겠지. 없는 건 무한함. 셀 수 없고, 볼 수 없고, 메길 수 없다. 있는 것은 있게 된 순간부터 시한부. 생명의 반복과 죽음, 윤회, 뭘로 표현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라면 별조차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처럼, 있는 것으로부터 없는 것은 태초의 발판과 한계의 경계면.
하나의 점이 없는 것에서 생겼다. 자가 발전을 장착한 어떤 것이 없는 가운데 생겼다. 그것 또한 자가발전을 장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겠지.
자, 그렇다면 태초의 시작은 관계. 점 하나의 안에 원자와 전자의 관계처럼 관계를 기본으로 깔고 시작되었다. 없는 가운데 있는 것이 시작한 의의, 있는 것의 한계, 혹은 자가 발전의 이유, 없다라는 의미, 앞으로 좀 더 살펴보자. See U. 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