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나의 이야기

2023.5.10. 상공에서의 기록

큰바위얼굴. 2023. 5. 12. 11:35

 

인천공항행 버스에 타고나서
탑승 대기중
탑승장 옆 커피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상공에서. 인터넷은 끊겼고, 볼 일도 읽을꺼리도 떨어졌다. 조명조차 꺼져 어둡다. 남들처럼 영화를 볼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건 쓴다는 행위.

봉투를 한 겹 뜯어내어 향수를 찾아 확인한다. 모조리 뜯어내어 쓰던 것으로 변화를 준다. 사실이든 아니든 100ml 이상은 관세를 문다는 걸 봤다는 아내의 말을 실행에 옮겼다.

인터넷이 되지 않으니 확인이 어렵다. 읽고 보고 관리해오던 일들이 멈춘다.

답변이 없었다. 장모에게서. 보낸 글이 성의없진 않았을텐데 이처럼 내보낸 마음 글은 반응을 기다리게 된다.

엄마에겐 약식으로 공항으로 간다고 메시지를 보냈었다.

말레이시아. 연이 이어지다보니 방문하게 되었다. 원장은 현지에서 하는 일보다는 현지에 필요한 걸 발굴하는 쪽으로 바랐고, 부원장은 잘 다녀오라는 메시지로 화답했다.

두 분께 보내라고 한 가오리무침은 보냈을까?

기록이 되고, 잊혀지지 않고 남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건 이야기를 만들고 전하는 일. 코를 푼다. 비좁은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이를 닦았다. 이 또한 잊혀진, 손가락에 꼽을 만한 경험. 살아가메 장모님의 잔소리가 그리워질 때가 있게 되겠지. 소소한 일상을 이어가면서 살아가는 티를 내는 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확인이라는 존중이 아닐런지.

모든 기반이 인터넷이자 전자의 흐름이라면, 흐름이 사라진, 사라질 세상은 어떨까?
삭막할까?
다른 눈을 뜰까?

기반이자 흐름에 맡겨져서 살아가는 모양새.

흔들리는 기체의 둔중함과 웅 소리에 많은 일 중에 단 하나, 쓰는 앱이 열린 것.

가는 게 사라지겠냐마는, 우주의 탄생과 소멸을 보게 된 지금, 과연 나고 죽어 이어가는 고리는 어떤 기대를 하는 걸까? 아니면, 특별히 목적이 없다면 어떨까? 눈을 뜨니 일어났다면 설명이 될 듯하다. 이유가 필요할까? 원인을 알아야만 할까? 없지 않다면 있게 된 순간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이니 거창하게 태고에 우주의 탄생인들 이와 다를까. 있게 되었으니 반복된다. 이어간다. 없던 것과 굳이 대치하지 않아도 좋다. 우주가 팽창하는 공간이 무한대라고 한다면 없음은 있게 된 순간 달라진 것이고, 우주 팽창이 무한대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팽창을 하지 못하는 차원 너머, 이승과 저승, 상상과 생각, 실존과 허상이 나머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없는 게 아니라 없이 보이는 허상, 공상, 상상이 실존과 대치하고 있다는 게 그럴 듯 하다. 아마, 죽고 죽어 단 하나의 존재였음이 남겨놓은 기록이 얼마만큼의 확률로 이런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겠냐마는 있게 된 순간 없음은 변모했다고 보자.

이룰 수 없는,
끝없이 이어질,
이 말조차 무모하다. 있게 된 숙명을 칭한다.

보이지 않는,
나타난 적 없는,
너무도 작디 작은 개념이다.

없다는 것이,
있다의 반대가 아니라,
없음이 있음으로 전환되었기에 생긴 개념이라면,
없다는 걸 몰랐던 것이 오히려 나아보인다.

탐구하고 갈구하는 인성을,
갈아넣어 만들어가는 세상의 모습이,
발전이라는 이름과 새롭다라는 정체성으로 보여진 들 이해갈등이 생긴 마찰력 조차 에너지원이 되어 순환하게 되니 채우고 비우고 더 원하고 비우게 되는 반복이 일어난다.

굳이 다 갖지 아니하더라도,
굳이 다 갖으려고 하더라도,
정해진 것이든 새롭다 칭하든,
구부린 뱃살에 경련이 일어나 수명을 일깨우는 걸 이겨내지 못한다. 육신에 긷든 한계를, 정신은 경험이 축적될 수록 지혜로워지며 정신체로 거듭날 지라도 딱히 좋아보이지 않는 건 노쇠하게 지친 피로감이라기 보다는 경험을 통해 다잡은 피조물에의 물욕을 버렸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살아있다.

- 말레이시아행 대한항공 KE671 기내에서. 성호.

말레이시아 만다린 오리엔탈 1613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