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어떻게살것인가

● (Guide) 어디에도 없는 사람

큰바위얼굴. 2024. 4. 29. 07:07

 


파타고니아 이본 취나드, 규칙 따위에 눌려 있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자유와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만 원한다. 조금 덜 하고 자제하는 게 더욱 많은 일을 이루게 해준다.

수영선수 브리타 슈테펜, 그 흔한 핸드폰조차 지니고 다니지 않는다. 인터넷을 즐기지도 않는다.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을 증명해야만 한다는 중압감에서 해방되어 오늘날 말 그대로 스포츠를 즐긴다.

비틀즈 존 레넌, 나는 잠을 잘 뿐이야. 바퀴를 바라보며. 어디에도 없는 사람.

"어디에도 없는 사람아, 걱정하지 마
여유를 가져, 서두르지마
누군가 너에게 손을 빌려줄 때까지 모두 버려둬...."

두뇌 연구가 에른스트 푀펠,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언제나 두 가지를 동시에 필요로 한다. 하루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통신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혁신적인 동력과 창의력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온전히 하나의 사안에 집중하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함정을 피하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할 것이다. 

영화감독 도리스 되리, 죽음을 떠올리고 해골이 된 나를 상상한다. 그리고 죽은 나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막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보느냐고.
 
2024.5.1
어떠한 상상이든, 무엇을 원하든,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상상과 소망과 생각에 이어 현실에서, 다만 시간이 걸릴 뿐. 어쩌면 시간조차 정해진 한계일 수 있으니 이미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맞을 수도 있다. 현실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순간이 찰라 든 생각이나 상상 보다 현실적이라거나 사실이라거나 진짜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 현실을 살아가며 무던히 지내는 것과 빠져지내는 것이 꿈과 잠을 통해 주어진 생각나는 대로 이루어진 것과 무엇이 다른가!
현실, 단지 찰라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순간 이미 상상이나 꿈과 같이 변해버렸다. 앞날은 오지 않는다. 계획을 했고 이루어냈다 라는 건 물상에 지나지 않는다. 빠져지내는 것과 무던히 지내는 차이만 있다. 만족과 불만족처럼 자기 스스로 느끼는 감정에 달려있다. 어느 것 하나 하라고 강요하진 않는다. 단지 원하고 계획하고 바라고 이루어나간다. 마치 앞날은 지금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서.
찰라, 지낸 혹은 앞으로 다가올 게 아니다.
지금이다. 지금을 말한다. 그렇다고 찰라와 같으니 허투로 보내야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이 또한 선택이다. 어느 것이라도 선택여부에 상관없다. 그저 주어지고 나타난다. 아니해도 좋고 해도 좋다. 아니, 아니해도 그만 해도 그만이다. 달라질 건 안정을 취한다거나 안주하거나 정해진 곳으로부터 얽매이는지의 차이일 뿐. 얽매여지거나 얽매는 건 자기욕심과 관계가 깊다. 아니어도 좋고 해도 그만인데 이 정도는 이라는 기준을 정하는 순간 얽매여들기 시작한다. 경험이 달라질 뿐 얽매여 있거나 얽매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하고 있는 행위가 보다 생산적이거나 보다 관계적이거나 보다 지향하는 바로 나타날 뿐 행위 자체로 인한 차이는 없다. 행위를 바라보거나 행위를 하면서 느끼는 바가 달라질 뿐 행위 자체로 인한 행위 자체가 갖는 의미에는 변화가 없다.
행위 자체가 갖는 의미에는 변화가 없다?
살갛에 털이 한 올 한 올 곤두선다. 긴장감이 극에 달한다. 사념이 닿는다. 과연 행위 자체가 갖는 의미에는 변화가 없는가? 극에 이른 감정과 평탄한 감정에 차이가 없는가? 감정이 달라짐에 따라 에너지 파장이 달라지는데, 행위 자체가 갖는 의미에는 변화가 없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행위는 행위일 뿐, 부여한 의미에 변화가 있다.
감정이 극에 달하면 에너지가 폭주한다고 한다. 해당하는 만큼의 에너지가 방출되고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좋은가? 바람직한 일인가? 극에 달한 에너지 방출이 이로운가? 아니면, 극에 달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에너지를 일으키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을까?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감정은 에너지 파장이 길고 깊다. 
에너지로 모든 걸 설명하려 해도, 에너지 발생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에 대한 설명이 명쾌하지 않는 한 에너지의 의미 혹은 에너지의 존재, 쓸모, 바탕에 대해 끊임없이 되내어야 한다. 우린 마치 에너지를 발생하기 위해 태어난 듯 하나, 우주 또한 물상의 하나에 지나지 않으니 우주 안의 인류는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류를 포함한 모든 만물, 즉 우주는 에너지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남는다. 이제까지 논의한 바에 따르면, '없이 있어 행하니 남아 이어진다.' 라거나 '없이 (물상이) 있어 없이해도 있다. 있고 없음에 대해 없음이 결코 '없다'가 아니라 있기에 없다 라고 봐야 한다. 우주의 팽창 또한 없이 있어 없이해도 있게 되니 있고 없음에 대해 없음이 결코 없다가 아니라 있기에 없다. 결국 팽창이나 우주 라는 물상은 있어 보일 뿐 없이 있어 없이해도 있게 되니 있고 없음에 대해 없음이 결코 없다가 아니라 있기에 없다 라는 말과 같다.' 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듯이 있고 없는 혹은 없고 있는 양면이 결코 다른 면이 아니라 찰라와 같이 반짝였다가 사라지는(없어지는) 그리고 다시 찰라와 같이 발생하고(있어지는) 반복되는 면과 면의 이어붙임이 세상이라는 걸, 단지 찰라와 같은 시간을 뛰어넘을 뿐 혹은 시간이 연속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을 뿐 세상이 면과 면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부인하긴 어렵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우주의 발생이유라거나 에너지 발생이유라거나 궁극적으로 시초, 즉 태어난 배경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왜 시작되었는가?
왜 만물은 시작되었는가?
왜 우주는 시작되었는가?
왜 인류는 시작되었는가?
왜 에너지는 시작되었는가?
에너지의 시작에 대해서는 만물, 우주, 인류에 대한 설명 보다 쉽다고 느낀다. 에너지는 에너지 자체 라기 보다는 에너지라고 표현된 용어에서 알듯이 이루기 위한 쓸모에 있기 때문이다. 만물이 맞물려 돌아가고 유지하고 우주가 팽창하기 위한 원천으로 작동한다. 인류 또한 이와 같다. 그렇다면, 우주는 이와 다를까? 더 나아가, 만물은 이와 다를까?
이루기 위한 쓸모, 에너지.
이루기 위한 쓸모, 에너지, 인류, 우주, 만물.
사념, 생각, 의문, 이성, 감정, 상상, 연상, 꿈, 잠 또한 이루기 위한 쓸모.
온갖 만물을 구성하고 이루고 있는 모든 건 이루기 위한 쓸모.
에너지가 에너지를 이루기 위해 에너지를 순환하기 위한 반복을 계속 이어가듯이 에너지는 단지 육체나 물체로 인한 것 만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육체를 통한 에너지 발생에 치우쳐 있기에 개발이 되지 않았을 뿐, 정신체로서의 소인은 여러 정황을 보더라도 에너지로써 작동됨을 알 수 있다. 궁금한 것이 무엇인가? 궁극에의 바라는 바가 무엇인가?
궁극에의 바라는 바가 무엇인가?
알고 싶은 것인가? 
알고나면 무엇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하는가? 그로 인한 힘을 얻고 싶은가? 단지 원천에의 호기심인가? 의미를 찾기 위한 의미없는 행위는 아닐까? 즐기다 못해 기쁘다 못해 행복에 겨워도 부족할 판에 쓸데없이 메달리는 건 아닐까? 자문자답을 해본다.
에너지. 파장. 흐름. 
씨앗. 생명체. 인류. 우주.
물아일체. 과연 바라는 바가 무엇인가? 각성인가? 초월인가? 더 나은, 더 낫다고 여기는 경지인가? 이런 생각 저변에는 어디에 근거하는가? 과연 스스로 체득한 것이라고 자신하는가? 무엇 하나 온전히 홀로 있을 수 없다. 나란 존재조차 나를 나로 표현하기 보다는 주변과 성향을 비교해야 나를 정의내릴 수 있듯이, 존재 또한 있음을 바탕으로 한다라는 한계가 있듯이 없음이 공이나 허, 상실, 무, 존재없음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을터. 만물이 이룬 지금, 그 자체다.
에너지가 에너지를 이루기 위해 에너지를 순환하기 위한 반복을 계속 이어가듯이 에너지의 의미는 있게 하고 순환하기 위한 반복을 위한 원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있게 하고 순환하고 반복하기 위한 원천이 에너지다. 에너지 없이 있을 수 없고 순환할 수 없고 반복할 수 없다. 그렇다고 여긴다. 정함은 정하지 아니함만 못하다. 마치 없이 있어 순환과 반복이 일어난다는 일방적인 사고의 흐름은 있어 순환과 반복이 일어난다고 여기는 게 맞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없이 있어 시작되었다. 아니, 있어 없이 반복과 순환이 시작되었다. 시작이 있어 끝이 있다고 여긴다. 우주의 팽창을 보노라면 없이 있어 시작되었다고 여기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어찌 그러할까? 우주의 팽창은 단지 몸집을 키울 뿐일 수 있다. 아기가 태어나 꼬마로 자라고 청년이 되어 성년이 되어 가듯이 우주 또한 아기로부터 꼬마에 이른 단계일 수 있다. 억지일지 모를 일이지만.
우주 내에서 생성과 사멸이 일어난다. 인간의 몸 속에서 세포의 생성과 소멸이 반복해서 일어나듯이. 모든 만물은 우주 단위, 인류 단위, 세포 단위, 원자 단위, 원자 보다 작은 단위에서 생성과 소멸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그렇다고 여긴다. 생성과 소멸 만이 에너지를 올바로 사용하는 길이라고 여긴다. 더구나, 인류는 태어나 죽는다. 우주의 팽창이 없이 있어 시작되어 어디로 향하는 지 궁금해 하는 것처럼, 인간은 없이 태어나 있어 행하다가 죽는다는 걸 하나의 단위로 여긴다. 생성과 소멸이 인간과 우주 단위라고 하면 맞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어디 그러한가?
인간의 나고 죽음이 인간 단위가 아니라 에너지 순환을 위한 최소한의 단위가 아니라 그저 다른 면에 불과하다면 어떠할까? 인간으로 나고 자라 인간 중심이 아니길 바라는 건 무척 힘든 시각 전환임에도 불구하고, 만약 세상 만물이 인간 중심이 아니라면 어떠할까? 먼지가 되어 떠다니다가 뭉쳐 먼지 덩어리가 되었다. 혹자는 먼지를 인류라고 칭하고, 혹자는 먼지 덩어리를 우주라 칭할 지도 모른다. 혹은 먼지 덩어리가 덩치를 키워 뭔가 그럴 듯한 화학반응을 통해 인류에 이르기까지 수만 년이 걸렸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먼지가 되어 떠다니다가 뭉쳐 먼지 덩어리가 되었다.
"                                         "
차이는 없다. 먼지든 공란이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발생했을 뿐 어디에도 있고 없고의 차이는 없다. 먼지를 존재라고 친다면 존재는 결코 있고 없음과 없고 있음에 있어서 하나의 구성품이 되어 문장을 나타낸다. 없어도 좋다. 표현하지 아니해도 좋다. 아니, 없다. 표현하지 아니한다. 좋고 나쁨의 의미 구분 또한 쓸데없다. " 먼지가 되어 떠다니다가 뭉쳐 먼지 덩어리가 되었다."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름이 생겼고 이름을 남겼고 이름이 영원하길 바란다. 존재의 의의란 그렇다. 숙명적으로 덧없으니 그렇게 주어졌다.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원하지 않아도 태어나 있어 살았고 원하지 않음에도 죽어 사라진다 여긴다면 편히 눈감기 싫을 것이다. 이를 영웅이라거나 신화라거나 이름 있는 누구라도 했을 법한 바다. 존재는 그렇다. 존재라는 말 자체가 이미 그렇다. 먼지와 같이 문장을 구성하는데 의미를 찾아 좇기 때문에 존재인 것이 존재로써 벗어날 수도 벗어난다는 자체도 쉽지 않다. 우주를 보메 먼지라고 여길 만한 간 큰 남자는 없을 것이다.
왜?
아니, 이유? 혹은 원인?
인류의 태생 배경은? 우주의 태동 배경은? 에너지의 발생 배경은? 먼지가 왜 생길까 라는 말로 이어진다. 털어도 털어도 생긴다. 털어내고 깨끗히 하려고 털어내면 털어낼 수록 먼지는 날리고 수북이 떠돌아다니다가 구석에 뭉쳐 쌓인다. 과연 먼지와 같다. 털고 털어 없이 있게 되니 깨끗이 하려고 털어낸 이유에서 존재의 태동배경을 찾고, 털어낼 수록 먼지가 날린다 함은 에너지의 흐름을, 수북이 떠돌아다니다가 뭉쳐 쌓인다 함은 존재, 즉 인류와 우주, 온갖 흘러흘러 뭉치고 쌓이는 만물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자, 여기에서 깨끗이 하려고 털어냈다. 먼지는 인간을 기준으로 몸에 붙어 있던 세포였다. 옷이라면 옷감의 파쇄된 원소로 볼 수 있다. 어찌 되었든 먼지라는 건 원래 있어 발생했다는 점이다. 원래 있어 다시 반복하니 돌고돈다. 이러니 먼지라는 지칭은 존재의 윤회를 벗어나질 못한다. 예를 잘못 들었다. 먼지를 알려고 하면 할 수록 돌고돌 뿐, 근원인 문장이나 문장 없음에 접근이 어렵다. 
먼지가 되어 떠다니다가 뭉쳐 먼지 덩어리가 되었다.
"                                         "
"  " 안을 공란이라 여기고 그럴 듯히 표현했으나 없다고 볼 수 있는가? 이 또한 먼지처럼 존재의 한계처럼, 표현의 한계에 부딪힌다. "  " 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보여주려는 것일 뿐, 오히려 먼지가 되어 떠다니다가 뭉쳐 먼지 덩어리가 되었다 라는 말 보다 함축적이면서 하고 싶은 바가 무궁무진하게 여겨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결국, 없음이란 "  "를 표현하기에 앞서 이전 단계. 그런데 문자를 통한 해석과 풀이가 과연 존재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문자 또한 에너지처럼 쓸모를 위한 도구인데 과연 문자는 생각과 상상의 범주 너머 없고 있거나 있어 없는 찰라에 닿을 수 있을까? 토막 난 마냥.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