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나의 이야기

"출근길에서 찾은 '찰나와 계속됨'의 의미"

큰바위얼굴. 2024. 11. 18.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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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논산을 지나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있다"와 "없다"라는 단어를 떠올렸는데, 이 둘은 언제나 짝을 이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듯하다. 우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낄 때 동시에 그것이 "없었던" 상태를 상상한다. 그렇다면, "없다"는 무의미일까? 아니면 단지 "있다"로 변하기 위한 과정일까?

출근길을 달리다 보면, 모든 것이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듯 느껴진다. 빛, 소리, 공기의 흐름까지도 마치 찰나의 순간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런 순간들을 우리는 얼마나 인식할까? 예를 들어, TV를 볼 때 우리는 화면 속 내용을 인지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픽셀과 전파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금세 잊어버린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재미있고, 그 순간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내 삶이 이런 화면 속 픽셀처럼 흘러가는 것이라면, 내 삶의 재미는 어디에서 올까? 혹은, 삶이 재미없다면 그것은 단지 "없다"는 것으로 치부될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나는 출근길의 졸음과 맞서고 있었다.

달리다 보면, 길 끝에서 사라지는 풍경도, 뒤에서 쫓아오는 차들의 존재도 모두 현재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이 움직임은 단순히 사라짐이 아니라 끊임없이 뭔가를 창조하고 이어나가는 과정이다. 마치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게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듯, 무언가가 "없어지기" 전에는 반드시 그 무엇이 "있었다"는 흔적을 남긴다.

출근길에 우리는 졸음에 눈을 감기도 하고, 잠시 머릿속을 비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잠깐의 찰나에도 세상은 움직이고, 나 역시 그 움직임 속에 있다. "있음"과 "없음"은 사실 정반대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처럼 느껴진다. 내가 오늘 이 길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없던 길"이 "있음"으로 바뀌었고, 내가 사라진 후에도 그 길은 누군가의 "있음"으로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졸음을 벗어나기 위해" 달린다기보다는, 이 찰나의 순간들을 한 겹 더 경험하며,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이 아침이 단순히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있게" 만든 또 하나의 순간임을 깨닫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졸음이든 찰나의 순간이든 그것은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일상의 한 조각이다. 그리고 그 조각은 우리 삶 속에서 "있음"과 "없음"을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 김성호 w/ ChatGPT.


Q.
다음은 출근길 졸음을 벗어나고자 탐구한 내용인데, 졸려서 인지 맥락과 요지, 말하고자 하는 바 등에서 부족해. 이를 담담하게 풀어줘. 앞서 고민해온 연장 선에서 너무 형이상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일상의 마주할 수 있는 일처럼 담담하게 풀어줘. 필요하다면 사례를 추가하는 등 풀이를 보다 쉽게 하기 위한 추가사항은 뭐든 좋으니 아이디어를 내서 들어도 좋아

발화자 1 (00:01)
2024년 11월 18일 월요일 롸잇 음 논산 오늘 지나가는 길 5시 34분 있어 없이 찰나와 같이 머문다라고 했던 말에 대해 자 먼저 먼저라는 게 뭘까와 그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거 눈으로 보고 이런 것들은 있다. 그러면 암묵적으로 이 시작 뭐 뭔가의 시작은 있다라고 시작했잖아 없이 써라고 해도 되는데 있어 없이라고 표현했듯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해 혹은 둘 다 가능할 수 있겠지? 일단 표현 사항은 있어 없이 등 없이 서든 자 그럼 순서가 바뀌면 어떻게 되는지 보자 있어 없이라는 말이 있다 있다.

발화자 1 (01:26)
그러니까 이건 무용론을 얘기하는 거지 없어서 없는 세상 없는 상태에서 있게 되었다라는 표현을 하게 될 땐 어떤 말이 되냐면 없는데 잊게 됐어 이건 정말 뭐라 그럴까 숨겨도 좋 만약에 그렇다 할지라도 왜냐하면 없이 있었다라는 사실이 있게 된 순간 없었다라는 걸 짐작은 할 수 있고 추측은 가능하지만 확신은 못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의 만물이 흘러가고 흐르고 있고 어딘가로 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방향성은 몰라도 흘러가고 있잖아 뭔가가 일을 하고 있다라는 거지 내 눈에 보이는 혹은 관계 속에서 혹은 어떤 모든 자연의 이치와 우주와 어떤 이 세상이 움직이는 이 세상의 움직임을 만약에 그렇지 시뮬레이션 혹은 게임처럼 가상적인 맞다. 플레이에 대한 우리가 TV를 시청하듯이 TV 안에 있는 건 누군가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거긴 하지만 TV 자체는 보여줄 뿌리잖아, 그러니까 그걸 보고 있는 누군가는 어 만들어.

발화자 1 (02:59)
길거리 하지만 TV 자체만 보는 거잖아, 그랬을 때 느끼는 건 뭐야, 저게 사실이야 아니야 라는 건 중요하지 않지. 하지만 의심을 충분히 하지, 그럼에도 TV 보는 걸 멈추진 않지 왜 재밌습니까 자, 그렇다면 우리는 광대겠네. 내 삶이 재미가 없으면 어 어떻게 될까?

발화자 1 (03:29)
본인이 본인에게 어떤 말을 할 때 재미가 없어 어떤 의미부여나 말들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 뭔가 없어 없으면 누군가가 그 없음을 보고 음 뭐라고 할까 아니면 그냥 무시를 해버릴까 없는 건데 그지 좋아 그렇다면 이제 좀 반대로 생각해 볼까 없이 있었다라는 게 암묵적으로 볼 수 있다고 치더라도 잊게 된 순간에 없어라는 말을 듣죠, 보고 그럴 듯한 짐작 그런 어떤 것들을 할 수 있지만 확신할 수 없다라고 했잖아 자 그러면 있다 있다라고 해서 없다 없어진다? 사라진다 라는 말을 해석한다고 할 때 어떻게 달라지지 있어 그러니까 없이 있었든 아무튼 생겼잖아, 일을 하고 있어. 뭔가가 일어나고 있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고 자 있어야 있어.

발화자 1 (04:47)
근데 있는데 없어져 말이 되나 있는데 감쪽같이 사라져 여기에서 죽는다는 건 수단을 위한 어떤 맥의 창구 혹은 그 점프하기 위한 아니면 통과하기 위한 의뢰 이런 쪽에 가깝지 죽음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이 세상에 없어지는 건 우리가 표현할 때 없어지는 건 나의 존재 함평생 살았음 날 흔적 뭐 나의 사상 내 이름 내가 기록해 놓은 것들 아니면 내가 만들어 놓은 것들 어떤 요가마시까라나마 시부로야와와와 YO케이 자 110 에다 맞춰놓고 가고 있어. 더 졸릴지 모르겠지만 그냥 안전운전 생각했을 때 이게 맞는 거 같애 빠르에 가서 5분 10분 혹은 스킬을 개발한다.

발화자 1 (06:12)
뭐 이런저런 뭐 위안을 삼을 수는 있겠지만 말 그대로 그거 달리기 위한 달리고 있는 것에 대한 음 부연 설명일 뿐 달리는 자체의 위험성이나 이에 음 어떤 걸 다 잡아내지 못했지? 사실은 결론 결론을 다 내놓고 얘기하는 거잖아요. 있어 없이든 없이 있었든 샬라워 같이 먹는다라는 것도 따져보면 사실은 우리는 찰나야 눈 깜빡할 사이 이게 뭐 데이터로 혹은 디지털로 표현할 때는 깜빡 할 사이를 영점영일초다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

발화자 1 (07:05)
근데 이 세상에 그럼 0. 01초로 이루어져 있냐 아니야 인식의 범위지 그럼 세상은 내가 보는 거 아까 얘기했잖아, TV 브라운관을 보고 있는 건 네 내가 보고 있다고 치더라도 TV 안에 만들어 있는 진짜 세상 진짜 만들었던 그 과거 어딘가에서 만들었겠지 그러니까 이 과거에 행했던 어떤 이 플레이들이 맞물려 돌아간다는 거지. 그 다시 한 번 더 볼 수도 있어와 트로트리 많네, 뒤에 차들이 좀 많이 바짝 붙어 붙어오고 있고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