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uide) 생명의 본질 탐구: 우주, 인간, 원자에 얽힌 이야기
생명의 본질,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그 이야기는 우주, 인간, 양자(아주 작은 입자들)와 얽힌 하나의 큰 이야기야.
먼저, 우주를 생각해 보자. 우주는 굉장히 넓고 복잡하지만, 사실 우주 속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별, 행성,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구까지, 모든 것이 하나로 얽혀 있어. 마치 커다란 그물처럼, 모든 존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거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방식도 사실 우주와 함께 춤추는 것처럼, 우주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어.
이제,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간은 몸과 마음이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 기쁨, 슬픔, 사랑, 분노와 같은 감정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지. 그 모든 감정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야. 만약 우리가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있다고 느낄 수 없을 거야. 그런데, 이 감정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중요한 역할을 해. 예를 들어, 우리가 슬프거나 힘들 때, 그 감정이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게 도와주기도 해. 마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가 성장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양자라는 아주 작은 세계도 있어. 양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입자들이야. 이 양자들은 정말 신기하게 행동하는데, 예를 들면, 한 입자가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양자 물리학에서는 그런 신비한 일이 자주 일어나. 그래서 우리는 이 작은 입자들이 서로 얽히고, 연결되는 방식을 통해 우주와 인간도 얽히고 연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어. 양자 세계에서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큰 세상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결국, 생명의 본질은 우리가 살아가는 그 자체에 있어. 우리는 매일 감정과 생각, 행동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며, 그 연결 속에서 우리를 이루는 모든 것이 계속해서 변하고 성장하는 거야. 어떤 사람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더 강해지고, 어떤 사람은 사랑을 통해 힘을 얻지.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우주와 인간, 양자가 얽힌 한 큰 이야기야.
우리는 이 우주의 일부로, 그 거대한 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야. 살아있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특별한 목적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만이 중요한 건 아니야.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느끼고, 배우고, 변화하는 것 그 자체가 의미 있다는 거지. 그래서 생명은 단지 '살아가는 것'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야.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결국 우리가 우주와, 서로, 그리고 작은 양자 세계와 연결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 이 모든 얽힘 속에서 우리는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지. 김성호 w/ ChatGPT.
> 연관 글: 'The Essence of Life: A Cosmic Dance of Purpose and Existence' https://meatmarketing.tistory.com/7880
" 새벽같이 나가려면 힘들겠네요 ."
"글쎄요. ..."
새벽같이 나가려면 힘들겠다는 말에, 담담함이 묻어나온다. 새벽에 움직이는 일이 익숙해졌거나, 새벽의 맑은 기운을 즐기기 때문일 수도 있다. 비록 운전이 부담스러울지라도, 그 순간의 즐거움이 새벽을 감수할 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길의 한 부분일 수도 있고, 이런 순간이 또 올까 싶어 담담히 웃게 되는 이유일 수도 있다.
새벽에 움직이는 일은 분명 고되고 뻐근한 일이다. 그러나 새벽이 주는 싱그러움과 새로운 시작 같은 느낌은 밤의 어둠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밤이나 저녁은 뭔가를 마무리하고 정리해야 하는 때로 느껴지지만, 새벽은 기대와 설렘을 품고 있다. 같은 어둠이지만, 새벽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다르다. 나이가 들수록 이 차이를 더 깊이 느끼는지도 모른다. 새벽에는 수많은 기대와 의미, 그리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만물의 생동감이 담겨 있다. 우주의 섭리 또한 새벽과 닮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새벽은 탄생, 새로운 시작, 출발, 잉태, 봄, 혹은 별의 생성처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축복과도 같은 시간이다. 내가 잠들면 우주도 함께 잠들고, 내가 깨어나면 우주 또한 깨어나는 듯하다.
어제 아내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잠을 설치며 나눈 이야기에는 관계 설정, "아끼면 똥 된다"는 말, 그리고 생명과 우주의 섭리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었다. 아내의 입장에서 배드민턴도 이제는 익숙해졌고, 지나친 기대나 환상에서 벗어나 적절히 조절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그만큼 여유로워진 것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한가로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으니, 그 안에서 새로운 뜻이 생겨난다. 한껏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은 그 상태에서, 또 다른 뜻과 바람이 생겨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이는 새롭게 시작되는 웅심(雄心) 같은 것이며, 뭔가를 바라고 찾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충만한 새로움이다.
그것이 바로 새로움이다. 새싹이 움트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바라고 찾고 싶어지는 것이다. 새롭게 채워진 마음은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몰입하게 된다.
배드민턴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어 더 잘할 수 없다는 변명을 하게 되지만, 이는 더 잘 뛰고 즐기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이급 선수의 멋진 플레이와 비급 선수의 엉성하지만 웃음이 넘치는 플레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성취감과 뿌듯함, 경기에 임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배드민턴은 단순히 운동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와 즐거움을 나누는 매개체가 된다. 이를 통해 함께하는 순간, 나눔의 기쁨, 추억을 쌓는 즐거움이 생긴다.
직장에서는 이러한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함께 일하며 뭔가를 이루어냈을 때의 사진 한 장조차 남지 않은 것이 아쉽다.
오늘은 아내가 싸준 만두를 출근길에 먹었는데, 지난번에는 식을 때까지 먹지 못했던 기억이 났다. 최근 음주가 과해지면 머릿속에서 알코올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모두가 일상의 따분함과 피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특별히 기대하지 않은 모임에서도 즐거움을 느끼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참 좋다. 서로를 칭찬하고 부족한 점에 웃으며 넘어가는 그 분위기가 만족스럽다. 우리는 배드민턴 유니폼을 맞추기로 했는데, 유니폼 뒤에 ‘잔소리 금지’라는 문구를 넣자고 했다. 이는 서로의 플레이를 존중하며 즐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제안이다.
마지막으로, '팥빵'에 있는 음악 다방이 떠오른다.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곳이 주었던 분위기와 추억이 지금도 아련히 남아 있어 틀게 된다. 잠들기 전 듣는 음성 콘텐츠들이 있어. 음악실 같은 공간이랄까. 내가 자주 듣는 걸 팟이라고 부르기도 해. 팟캐스트는 여러 종류가 있고, 그중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썬킴 것도 있고, 경제에 대해 다루는 이진우 것도 있어. JBS인지 JS인지, 이름이 확실히 기억나진 않네. 뉴스와 관련된 것도 있었는데, 이름을 얘기하지 않으니 흐릿해져 버렸나 봐.
호남선에 탔고, 새벽 5시 38분쯤 보이는 시각이야. 지금 속도는 100으로 설정해 크루즈 모드로 달리고 있어. 도로에 차들이 많진 않지만, 텅 비어 있지도 않아. 속도를 안정적으로 맞추고 크루즈를 켰더니 발을 떼고도 앞차와의 간격만 살피며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겠네.
여기서 이야기의 목적은 졸음을 쫓아내려는 거지. 목소리 톤에서 느껴지듯 기분이 특별히 들뜨거나 억눌린 상태는 아니야. 그냥 졸음을 없애려 하고 어제 아내와 나누다 마친 생명에 대한 얘기를 이어가 보고 싶어. 생명의 정의 같은 주제를 놓고 생각이 이리저리 오가며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안개는 심하지 않아 다행이지만, 앞차가 조금 느리게 달리는 것 같아. 어쩌면 길을 양보해 주는 건지도 모르지.
> 원문(음성) : https://youtu.be/CrpvsJJc7H4?si=uaWt7SyDyfY2qykX
잠시 창밖을 보니 안개 낀 고속도로의 모습이 멋져 보였어. 이런 풍경을 닮고 싶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 그러다 문득 생명에 대해 본격적으로 얘기하고 싶어졌어.
생명은 무엇일까? 일단 유기체를 떠올리며 사람을 예로 들어봤어. 하지만 사람만 생명은 아니지. 생명은 살아있다는 거, 움직인다는 거. 혹은 감정과 본능 같은 것도 포함될까? 동물도 감정을 느끼고 생각한다고 한다면, 이 모든 게 생명에 포함될 수 있을까 싶어. 나무나 돌도 숨 쉰다고 하는데, 그것도 생명이라 볼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
> 참고 : 생명이란, 자체 신호를 가지고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물체를, 그러한 기능이 종료되었거나 (죽음) 또는 그러한 기능이 없어 비활성체로 분류되었거나를 막론하고 그렇지 않은 것과를 구별짓는 특성이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생명체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지만 엄밀하지는 않다. (자료: https://ko.wikipedia.org/wiki/%EC%83%9D%EB%AA%85)
생명이라는 건 고차원적인 인지나 깨달음 같은 개념보다는, 더 본질적인 무언가에 가까운 것 같아. 생명은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해. 살아 있다는 건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잖아? 그렇다면 생명에는 유한함이 필수적일까? 무한한 건 생명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 참고: 물질대사에 바탕을 둔 생명에 대한 정의 - 생장한다. 물질대사를 한다. 자신과 닮은 개체를 생산해 내는 생식기능이 있다. 외부 자극에 반응한다. (자료: https://ko.wikipedia.org/wiki/%EC%83%9D%EB%AA%85)
생명의 본질은 박동, 움직임, 그리고 유한성에 있다는 생각이 드네. 살아 있다는 건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상태를 뜻하는 것 같아. 결국 생명은 유한하면서도 살아있음을 담고 있는 개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어. 하지만 이건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주제 같아. 나중에 다시 정리해 보자.
생명이란 살아 있는 것 자체로 바라볼 수 있다. 숨을 쉬고, 움직이며,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생명은 정의될 수 있다. 바위처럼 겉으로는 움직임이 없어 보이는 것조차도, 사실은 무수히 많은 움직임과 속도를 품고 있다. 예를 들어, 지구 자체가 회전하고 공전하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참고: 열역학적 정의. 주변 환경의 기울기를 활용하여 자신의 불완전한 사본을 만드는 열린 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외부의 에너지와 상호작용을 하는 개체로 정의한다. 외부의 에너지를 뺏어와 계의 전체적인 열적 평형을 이루는, 그리고 취득한 에너지는 활동, 배설, 죽음 등의 형태로 다시 자연계로 배출시키는 거시적인 열역학법칙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체는 단순히 에너지의 입출입 시스템이다. (자료: https://ko.wikipedia.org/wiki/%EC%83%9D%EB%AA%85)
생명을 단순히 "살아 있다"는 상태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배드민턴 경기를 즐기는 것처럼, 특정 목표를 지향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고 즐거운 것이 생명이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표현에는 어딘가를 향해 나아간다는 목적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생명은 목적이 없어도, 단지 존재하고 움직이는 상태로도 충분히 의미를 가진다.
우주 또한 하나의 생명체처럼 어디론가 향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우주를 하나의 개체로 본다면, 그 외부에 무엇이 있는지, 혹은 외부가 존재하기나 하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빅뱅으로 시작된 우주의 태동 또한,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본능적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없는 상태는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있는 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에 그 가치는 더욱 크고 소중하다. 무한하다면 생명의 의미는 퇴색될 것이다.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생명에게는 충분한 가치와 동기를 부여한다. 살아가는 방향성, 즉 "어디로 향한다"는 목적에 너무 집착하면, 생명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주와 생명 모두, 단순한 움직임과 존재만으로도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다. 양자 물리학의 원자와 전자가 가진 성질처럼, 우주도 끊임없이 반짝이고 나타나며 사라진다. 이처럼 생명과 우주는 본질적으로 닮아 있다. 양자의 세계를 파고드는 것은 곧 우주의 신비를 탐구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생명과 우주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그 본질에 다가서려는 여정이다.
지구는 유한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해보자. 그렇다면 지구 또한 생명을 가진 존재라 할 수 있다. 결국, 세상 전체가 생명을 가진 것이고, 우주 역시 생명을 지닌 존재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별들이 생성되고 소멸하며, 움직임과 나아감을 보이는 모습은 마치 생명의 꿈틀거림과도 같다. 이러한 역동적인 움직임은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지향하는 생명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는 단순히 움직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 살아가는 것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우주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보면, 모든 것이 살아있다. 생명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생명이란 살아 있다는 그 자체로 정의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멀리서 보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현상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수많은 작은 움직임이 중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물리적이고 본능적인 생명 활동의 한 부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정신 또한 육체 기반의 활동으로 착각되곤 한다. 하지만 정신은 육체와는 다른 차원의 영역에 속할지도 모른다. 모든 존재가 생명을 지니고 있다면, 지구는 우주라는 더 큰 생명의 일부이고, 우주는 또 다른 우주와 연결된 집합체로 상호작용하며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물리적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생명이라는 본질을 탐구하며, 우리는 생명체가 단순히 살아가는 것 이상을 지향한다고 본다. 육체적 활동은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일 뿐, 그 너머에는 더 깊은 의미와 방향성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별들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단순히 생존의 반복으로 볼 수는 없다. 이는 더 큰 지향점을 가진 존재의 활동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거대한 배경에 불과하다. 이 환경 속에서 생명은 자신의 의미를 탐구하고, 존재와 움직임의 본질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육체는 단순히 소통과 깨달음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렇기에 생명 자체로서의 의미는 단순한 물리적 활동을 넘어선다. 움직임과 나아감 속에서 우리는 꿈틀거리는 생명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생명이란 나아가는 행위 그 자체로 정의될 수 있다. 별들의 생성과 소멸,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모든 문명과 우주의 움직임은 이러한 생명의 본질을 반영한다. 우주가 우리 안에 있다는 관점에서, 생명은 단순히 물리적 현상을 넘어 정신적, 영적인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연의 기운과 소통하며, 육체적 한계를 초월하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우화등선이라는 표현처럼 어딘가에 간다는 것이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를 의미하지 않아. 지금 내 눈에 펼쳐진 물리적 세계, 내가 느끼는 육체는 어디까지나 제한된 한계를 가진 일부일 뿐이야. 생명을 육체적이고 본능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고 했을 때,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나 목적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생명이 필요한 근본적인 원인은 뭔가를 이루고 나아가기 위해서야.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우주를 개척하기 위해서일까?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처럼 에너지는 끊임없이 순환하고, 죽음마저도 원소로 분해되어 다시 재생산되잖아. 내가 죽은 뒤에도 그 원소들은 재조합되어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내. 그 과정에서 이전의 경험과 유전적 요소들이 새롭게 세팅되고, 결국에는 생명에 내재된 본질적 신호가 작용하는 거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육체를 단단히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육체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야.
삶의 즐거움이나 행복은 육체적 본능과 연결될 수 있어. 하지만 그 궁극적인 추구점이 육체적 쾌락이나 즐거움에만 국한된다고 할 수 있을까?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 유한한 삶 속에서 행복을 누리려는 시도가 목적일까? 지구가 행복을 누리려고 하는 걸까? 아니면 우주 자체가 행복을 추구하는 걸까? 우주의 행복이란 계속 살아가는 것일까?
생명은 유한하고, 지구 또한 유한하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주가 끊임없이 별을 만들고, 먼지가 뭉쳐 다시 별이 되는 이 과정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야. 이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찰나의 과정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 눈 깜빡할 새 우주가 생기고 사라지는 그런 느낌 말이야.
우주 속에 또 다른 우주, 그리고 그 안에 겹겹이 쌓인 구조를 생각해봐. 은하, 태양계, 지구, 인간, 세포, 원자, 양자… 계속 안으로 파고들면 결국 무엇이 남을까? 이 우주의 본질은 무엇일까? 팽창하고 나아가기 위한 과정일까?
우주의 탄생과 그 지향점을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와도 연결되지 않을까? 삶과 죽음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어. 내가 아닌 나로,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으면서, 우주를 넘어 새로운 것을 개척해 나가고 있어. 이 과정은 단순히 성장일까, 아니면 그 너머의 더 깊은 의미를 가진 무엇일까?
우주가 다른 놀이를 즐기는 것처럼, 그것은 단지 즐거움일 뿐, 지향점이 아니야. 육체를 강건하게 하고, 지루하지 않으며, 나태해지지 않도록 하는 도구로서 필요한 감정일 뿐이지. 생명과 육체, 본능적인 태생의 비밀은 이러한 한가로움과 바쁨의 반복적인 순환 속에서 유지돼. 이 반복은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고, 그것을 위해 즐거움이라는 동기가 필요해진 거야. 하지만 행복이나 즐거움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순 없어. 이것은 단지 반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야.
행복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결국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해. 우린 때때로 희노애락을 극복한 중용 상태를 상상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무채색의 뚝심 있는 모습이라면 매력적이지 않아. 그러니 우주와 양자, 인간의 삶을 탐구하면서 우리는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귀결돼: "왜 살아가는가?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가?"
사람들은 즐거워도 괜찮을까, 행복하면 안 될까, 불행하면 어떨까, 나아가 내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질문을 던져. 그런데 이 모든 질문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질문으로 통합돼. 우주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원자를 쪼개면 그 안에 더 작은 입자가 있고, 그 속에도 또 다른 무엇이 있을까? 이런 궁극적인 탐구는 우리가 의미를 찾고자 하는 본질과 닿아 있어.
생명은 유한한 가운데 강렬한 감정으로 움직이고, 본능적으로 달리는 성향을 가진다. 우주도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반복을 계속하며, 그 반복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심어둬. 이 반복 속에서 한가로움과 바쁨, 만족과 불만족, 불평 같은 감정이 끊임없이 발생해. 하지만 이 감정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니야. 반복 속에서 생겨나는 감정들은 단지 에너지를 끌어내는 과정일 뿐이지.
생명은 소통하기 위해 파장을 내보내고, 그 자체로 생명 활동을 나타내는 거야. 우리가 소통을 통해 내보내는 정보는 생명의 파장이야. 빛의 속성이 파장과 입자로 나뉘듯, 생명 활동도 마찬가지로 파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 입자는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단순히 개체일 뿐이고, 우주를 나타내는 것은 파장이야.
입자와 파장은 서로 다른 개념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현상이야. 우주 위의 우주, 우주 속의 지구, 인간 속의 세포처럼, 입자는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며, 파장은 그 개체들이 물결 치듯 퍼져나가는 활동을 보여줘. 이처럼 우주적인 현상은 반복적이고,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어. 전자 등 모두가 같은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거지.
우주를 탐구하면 양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고, 양자 안에는 또 다른 양자가 있으며, 그 안에는 우주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궁극적이고 최초의 시작점이 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그곳에 도달하기까지는 엄청난 기술력이 필요하다. 양자를 쪼개는 데 걸린 시간만큼이나 전자, 그 안의 구성 요소들, 그리고 더 작은 단위로 나아가는 노력이 이어진다. 이는 우주 너머를 향한 탐구의 여정이기도 하다. 우리가 생명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탐구와 연결된다.
생명의 이유를 묻는 것은 곧 육체와 세포의 구성, 우주의 확장,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활동에 대한 물음이다. 마치 체육관 안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것처럼, 우주 역시 그 자체로 하나의 개체이며, 그 안에서 에너지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체육관은 단순히 존재할 뿐, 그 안에서 어떤 활동이 벌어지든 체육관 자체는 고요히 유지된다. 우주 또한 마찬가지다. 우주는 생명의 속성을 가지며, 이 속성은 다시 새로운 껍질과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생명의 근원과 나아감을 찾으려는 활동은 우주의 목적이 아니다. 태어나고 죽는 반복, 별의 생성과 소멸,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 반복은 단지 생명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에너지를 제공할 뿐이다. 에너지는 단순히 육체적 활동에 머물지 않고, 말하고, 소통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며 깨달음을 얻는 경지에까지 나아간다. 이는 모두 생명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활동은 체육관 안의 활동처럼 단순히 에너지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체육관이 존재하는 이유가 체육관 자체의 목적이 될 수 없듯이, 우주 역시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체육관이 단지 배경이자 터전으로 기능하듯, 우주는 환경과 토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과제이며, 우주가 나아가는 면이자 보이는 혹은 상상 속의 모습이다.
결국, 체육관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기록과 활동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 활동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체육관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의 삶이 행복이라는 목적에 국한되지 않듯, 우주 역시 살아가는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우주의 존재는 살아있음과 살아없음, 혹은 없는 것을 아는 행위로 정의될 수 없다. 우주는 그저 존재하며, 그 속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들은 살아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 아래에 있는, 과거에 축적된 얽힘이든 현재의 얽힘이든, 과거에서 왔든 지금 얽혀서 돌아가든 모든 것이 시공간을 초월한다고 보자. 내 지금 이 말들이 이 시대, 한국,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 펼쳐지고 있지만, 영향을 끼치고 있잖아. 양자 세계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내 말이 여기서 끝나겠어? 어딘가에, 누군가에게, 아니면 지금 네 차에라도 스며들고 있잖아. 이게 어디론가 퍼지고 있잖아, 파장처럼. 그렇다면 이 파장이 우주로, 그리고 우주 너머의 우주, 그 위에 있는 무언가에 전파되지 않을까? 마치 세포가 활동하며 내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야.
내가 이런 활동을 했다고 치자. 그러면 내 활동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우주에 닿는다고 상상해보자. 이 광대한 범위의 활동을 운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갔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우주의 어떤 거대한 움직임에 일조하는 일이 되겠지. 그런 활동이야말로 삶의 의미를 더 뿌듯하게 만드는 것 아니겠어? 그리고 우주 너머의 우주, 그 너머에 또 다른 차원들이 계속 존재한다고 상상해보자.
이것을 하나의 생명체처럼 본다고 해보자. 생명은 유한하니까, 그 자체로 강한 동기를 가진다고 볼 수 있어. 그렇다면 생명이라는 것은 뭔가를 지향하고 있는 거 아니겠어? 생명이 태어난 이유는 없어도 좋다. 아니, 없다라는 답조차도 괜찮다고 생각해. 생명 그 자체가 삶의 본질이라면,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지. 결국 생명 활동은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며, 그것이 우주와 행성들 간의 얽힘처럼 펼쳐지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얽힘은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우리가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살아가는 본질적인 방식이야.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지, 우주가 왜 태어났는지 알 필요는 없어.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니까. 결국 우리는 별이 되어 다시 태어나고, 또 수억 년을 지나 다시 어딘가의 생명으로 나타날 거야. 찰나와 같이 말야. 그것이 어떤 형태든 간에, 예를 들어 상상 속 기계 문명이든, 전자적인 형태든, 그 본질은 지금과 다르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 예를 들면 불쾌함이나 기쁨 같은 것들도 생명 활동의 일부야. 이 감정들은 결국 순방향으로 에너지를 퍼뜨리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거야. 생명이 생명을 유지하려는 본질적인 동기가 여기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생명 활동이란, 우주의 먼지가 뭉쳐 별이 되고, 그 별들이 다시 생명을 만들어가는 과정과도 같아. 그래서 결론적으로, 생명은 유한하다고 하더라도 그 유한함을 넘어 무언가를 이루려는 본질적인 움직임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생명은 생명을 다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지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한 내용이야. 우주, 양자, 인간, 삶, 그리고 생명의 본질과 추구에 대해 정리한 건데, 네가 보기에도 어떤 연관성을 느낄 수 있을 거야. 모든 얽힘과 관계가 결국 생명이 생명을 유지하려는 바람으로 이어지는 것 같지 않아?
"우주는 내게 말했지. 그게 너의 사명이라고."
> 기존 주장과의 일치 및 불일치 분석: 명제 '생명' https://meatmarketing.tistory.com/78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