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uide) 세상과의 연결, 의식 너머로의 여정
만약 모든 것을 흥미로움으로 채울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은 기분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도, 어느 순간 본능적으로 감각적인 자극과 반응을 갈망하게 되며, 다시금 세상의 굴곡이 생긴다. 얼마 전, 안개가 낀 도시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시골에서 정원사처럼 살아가는 삶, 꽃을 가꾸고 나무를 돌보는 일. 그것이 어쩌면 우리 둘만의 인생일 수도 있겠다고.
아이 하나가 그 작은 파문을 확장하고,
어쩌면 동네 잔치가 좋은 사회를 만든다. 일상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고, 무엇보다 창밖으로 보이는 자연의 변화가 중요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설 때 마주하는 그 변화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 선택들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떤 시도를 하고, 그것이 무르익기까지.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공감대가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한복판에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을 원할까? 예전에는 고층 아파트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풍경이 삶의 질을 높인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그 믿음이 흔들린다. 어느 날, 러시아의 드론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모든 것을 불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패턴은 이제 더 이상 예측할 수 없다. 언젠가는 다른 나라들도 같은 상황을 겪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마주한 섬뜩한 경고는, 전쟁이 결국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킬 만큼의 힘이 작용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반작용이 뒤따를 것이다.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 눌린 힘이 표출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예를 들어, 러시아와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자원에 대해 협의하고 안보 문제를 논한다고 해도, 우크라이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의 독립을 이루어낸 저력과 국민성을 잃지 않는 한, 결국 숭고한 희생을 통해 또다시 독립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서양의 개인주의를 떠올려본다. 개인이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는 문화. 큰 울타리 안에서 방향을 정할 수 있지만, 선택은 결국 개인의 몫이다. 무심코 꺼낸 이야기들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때의 본능적인 생각이 또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이성적으로 삶을 바라보지만, 어느 순간 꿈처럼 바람 속에서 의식이 확장되는 걸 느끼게 되면, "아직은 아니야"라고 속삭인다. 펼쳐진 세상을 마주할 용기가 아직 없다. 세상을 굽어볼 수는 있지만, 그 속에 직접 관여할 수는 없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혹은, 의식이 확장된 세상으로 넘어가면 다시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오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강렬한 느낌, 정신적 파장이든 아니면 그 어떤 형태의 조성일 수도 있다. 그것은 세상에 감정을 일으키고, 사건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경제적이든, 초월적이든 우리는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빙의든 환생이든, 다른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죽은 자들이 다시 돌아와 재순환의 고리에 들어가거나, 관조자로서 그 존재를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 다를 뿐, 숨이 멎는 순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다. 재순환의 고리로 갈 것인지, 천국과 같은 이상향을 그린 세상으로 갈 것인지, 귀신과 같이 관조자의 세상에 놓일 지, 혹은 의식의 확장을 통한 세상과의 접속을 늘려 세상과 연결된 걸 체감하며 살아갈 지를.
천국을 바라는 사람도 있다. "나는 천국에 갈 거야"라는 이념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다. 마치 부유물처럼 떠다닌다. 그리고 또 다른 길이 있다. 세상을 굽어보지만 직접 관여하지 않는 존재. 성각자, 신선, 현자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선택지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전쟁 속에서 무수히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 가족과 친구를 잃고, 전쟁 속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보았다. 그 사람은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 복수를 할 것인가, 아니면 극한의 평화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것인가?
이 세 가지 선택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전쟁터에 있지 않다고 해서 전쟁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전쟁이 없는 분단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설마 전쟁이 나겠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전쟁을 막을 강력한 제재 수단이 존재할까?
결국 중요한 것은 "나"다. 생명체로서의 나만이 아니라, 의식으로서의 나. 그리고, 무의식으로서 연결된 세상을 마주한 나.
본능에 맡길 것인가, 의식을 확장할 것인가. 우리는 잠을 자는 동안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연결고리가 끊어진 상태일까?
무의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죽음은 단지 생명체로서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순간이다. 그것은 터널을 지나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것일 수도, 아니면 관조적인 세계로 이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상황이 바뀔 뿐,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드는 순간, 우리는 정신을 놓고, 숨이 넘어가듯 터널을 지나가며 의식을 내려놓는다.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마주할까? 어렴풋이 알 것 같지만, 여전히 그 너머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김성호.
* 원문(음성) Full ver. https://youtu.be/q_nsD6vKCZU?si=L_l1uIsVD-AUxOCn
원자로를 둘러싼 공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자가 존재하는 공간 외에 또 다른 존재할 수 없는 공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와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 맞닿은 지점, 혹은 이 둘이 어우러진 상태를 우리는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궁금해하는 태생의 비밀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명이 잉태되고, 화학적 변화를 거쳐 기관이 생기고 발달하며, 그 기관 안에 의식이 자리 잡는다. 의식이 싹트고, 삶의 모습과 방향이 정해지며, 사회 속에서 자아를 형성한다. 자아는 다시 우주와 양자를 탐구하며, 인간관계와 사랑 속에서 더욱 깊은 감정을 느끼고 삶의 지향을 바꿔가거나 유지한다. 반복되는 과정일 수도 있고, 새로운 경험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과정 속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칵테일 한 잔을 즐기는 로망을 품기도 한다. 태어날 때부터 익숙한 상태에 안주할 수도 있고, 그와 반대되는 경험을 추구할 수도 있다.
만약 익숙함을 벗어나 색다른 모습과 즐거움을 찾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는 것일까? 존재와 무(無), 공간과 양자, 우주의 흐름 속에서 "없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공간이 정말로 없는 공간일 수 있을까? 있다와 없다의 경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란 무엇인가? "없다"는 개념이 성립하는가?
양자는 우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양자의 움직임과 우주의 법칙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양자 안의 알갱이 하나하나는 마치 별처럼 움직인다. 그렇다면 그들이 휘젓고 다니는 공간은 진공일까? 암흑에너지일까? 어떤 형태로든 에너지가 있는 공간이라면, 에너지가 전혀 없는 공간도 존재할까?
공기를 예로 들어 보자. 지구 상에는 공기가 없는 순간도 있을 수 있지만, 공기는 결국 기체의 집합이다. 만약 기체가 알갱이들이라면, 그 사이를 채우지 않은 공간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깊이 들여다보면, 공기 속 알갱이보다 비어 있는 공간이 훨씬 많다. 그렇다면, 우리가 "공기"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국, "없다"라는 정의는 단순하지 않다. "공기가 없다", "알갱이가 없다", "양자가 없다", "우주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우주 너머에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존재할 수 없다"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없다"는 개념이 성립하려면, 우주와 양자, 존재와 의식이 모두 부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바탕 자체가 사라질 수 없다면, 완전한 "없음"이란 무엇일까?
양자의 중첩을 생각해 보자. 0과 1이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고, 0과 1이 아닌 상태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없다"는 개념은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존재와 무존재의 경계는 정말로 명확한가?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이치와 진리는 양자 중첩 현상을 통해 더욱 깊이 이해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영(0)이 있다"와 "영이 없다"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영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플러스와 마이너스처럼 또 다른 면을 가질 수도 있다. 이것이 물리적, 이념적 차원에서 활용될 수 있다면, 3차원뿐만 아니라 4차원적인 활용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이를 물리적으로 밝혀내거나 해석할 수 없을 뿐,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논리는 다차원, 다중우주, 복합적인 우주론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먼 미래, 우주 시대가 열리고 워프나 텔레포트가 가능해지는 시점이 온다면, 우리는 "없다"의 개념조차 새롭게 정의해야 할 것이다.
내 몸이 거기에 있는가, 내 의식이 거기에 있는가, 이 차이일 뿐이야. 하지만 내 몸은 지금 당장 갈 수 없어. 내가 말했듯이, 양자의 어떤 현상을 우리가 과학적·물리적 방법으로 구현해야만 가능하다고 믿는 한, 우리는 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해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어. 우주선을 쏘고, 우주여행을 하고, 우주 개척을 하겠지. 그런데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상상을 통해 정신적으로는 벌써 갈 수 있어. 우리의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상상을 통해 이동하는 것과 같아. 반면 무의식, 즉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우리는 무한한 공간을 마주할 수 있어. 통제는 불가능하지만,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거지. 그러면 이 존재는 어떤 상태인가? 통제할 수 없지만, 뇌파는 움직여. 잠이 들면 이미 그곳에 도달한 것과 같아. 현실적으로 체감하는 방법, 육감적인 방법,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이를 이루려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오랜 세월 반복하며 양자를 탐구해 결국 '영'이라는 개념에 도달하는 방법이야. 다중적인 차원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이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 또 다른 방법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무한한 상상을 하는 것이지.
상상을 구체화하는 거야. 내가 거기에 있다고 느끼고, 그것을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것. 마치 매트릭스 같은 세계처럼. 하지만 매트릭스는 우리가 육체적으로 느낄 수 없는 상태였잖아? 그럼에도 의식적으로는 그곳에 존재할 수 있었지. 나는 의식을 통해 저 멀리에 닿을 수 있고, 이를 증폭시켜 현실적으로 체감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가상현실도 체감할 수 있어. 하지만 육체는 움직이지 않고, 오직 의식만이 존재하는 상태야. 그러면 이것은 잠과 다를 게 없지 않아? 결국 차이는 의지뿐이야. 내가 그것을 창조하고 관조하는 것.
사후의 개념도 마찬가지야. 천국을 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만들어낸 세계나, 만족하며 순환의 고리 안에 머무르는 세계나, 이 세상을 관조하며 막대한 에너지 흐름 속에 머무르는 세계나, 다 선택할 수 있다는 거지. 우리는 단지 이 현상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내지 못했을 뿐이야. 하지만 이미 수많은 상상과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런 가능성들을 논의하고 있어.
이런 탐구가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결국은 진리 탐구로 이어지게 마련이야. 지금 나는 사후에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꿈을 통해, 혹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이미 경험하고 있어. 그리고 선택의 순간마다 이 세상을 더 살고 싶다는 의지를 확인하고 있지.
의식과 무의식, 잠과 상상, 그리고 탐구하는 영역이 점점 맞닿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있어. 지금까지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을 탐구하는 주요한 방법이었지만, 이제는 상상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어. 그런데 과연 우리가 찾으려는 진리가 이런 방식으로만 정의될 수 있을까?
지금 우리는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방법론을 논의하고 있어. 나는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하며 이 모든 것과 맞닿아 있어. 이건 생명체이기에 가능한 경험이야. 우주를 보면 별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공간은 비어 있지. 마찬가지로, 공기도 우리 눈에는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개별 기체들이 흩어져 있는 거야.
우주를 사진 찍듯이, 공기도 찍어보라고. 그러면 무수히 많은 원소들이 마치 별처럼 찍히겠지. 이런 방식으로 보면, 우주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작동하고 있는 거야. 결국, 우리는 이 공간과 기체, 그리고 의식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고 있는 거 아닐까?
공기를 이루는 게 단순한 기체가 아니라면, 그 공간은 무엇일까? 바람이 불어 나를 스쳐 갈 때, 원자의 전자처럼 작은 알갱이들이 느껴지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다. 바람이 부는 형상 외에 존재하는 그 공간을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지금 그것을 중첩된 상태로 보고,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없음'을 정의하면, '있음'이 더 희미해질까?
그렇게 보면, 우리는 사물을 다르게, 혹은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세상은 굴곡이 있어야 흐른다. 잔잔한 물결이든, 큰 파도든,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파장으로 얽혀 있다. 겉으로 보면 직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직선이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가 공기를 사진으로 찍어 보면, 그것이 우주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주는 지구와 비슷한 상태이고, 지구는 다시 원자의 상태와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큰 우주 속에 또 다른 우주가 중첩되어 있으며, 이 끝없는 구조는 차원을 넘어 계속 이어진다. 우리가 원자를 쪼개고, 우주를 분석하고, 0과 1을 탐구하는 것은 결국 더 큰 우주를 이해하려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숙명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다.
이 흐름을 조작하는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을 통해, 상상을 통해, 파장을 일으킨다. 비록 의식 없이 가만히 있어도, 그 에너지는 지속적으로 흐르고, 연결된다.
하나의 지구가 끝이 아니다. 우주의 빈 공간을 암흑에너지, 암흑공간이라 부르지만, 그것이 단순한 진공은 아니다. 무언가로 채워져 있다. 공기가 기체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우주도 별들이 차지하는 공간보다 보이지 않는 공간이 더 크다. 즉, '없음'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양자를 끝없이 쪼개고, 우주를 탐구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균형이 있고, 그 균형 속에서 우리는 진리를 탐구한다. 하지만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누군가 이 모든 것을 쥐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존재는 또 다른 공간 속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이 끝없는 탐구 속에서 '있음'은 결국 순간적으로 관통하는 개념일 뿐이다.
찰나의 순간, 우리는 의식을 확장할 수 있다. 달을 본다고 해서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상상을 통해 그것을 현실적으로 증폭시키고,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도 있다. 마치 꿈에서 경험한 것이 현실과 연결될 때 느껴지는 감정처럼, 이러한 인식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잠들기 직전, 우리는 의식이 확장되는 경험을 한다. 어떤 터널을 통과하는 듯한 느낌, 죽음을 앞둔 것 같은 감각. 그러나 잠이 드는 것과 의식을 확장하는 것은 다르다. 확장된 의식 속에서 우리는 온 우주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직접 겪는 것이 아니라, 관조하는 느낌으로 존재를 경험한다.
그렇다면, 이 상태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무한히 확장된 의식과 무의식이 맞닿는 순간, 그 경계를 넘나드는 감각. 이 순간이 지속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지 스위치처럼 켜졌다 꺼지는 찰나의 경험일까?
우리는 현실에서 잠깐씩 이 상태를 경험한다. 상상을 통해 달을 밟은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접촉이라면? 이것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탐구하는 물리적, 화학적 반응을 넘어, 다차원적 생성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씨앗은 뿌려졌고, 나는 의식의 무한한 확장을 느끼고 있어. 그런데 이걸 선택의 문제로 본다면, 마치 스위치를 끄고 켜는 것 같아. 스위치를 껐다가 다시 켰는데, 다시 확신이 없는 상태로 돌아오는 거지. 잠에 들었다 깨는 게 확신의 문제는 아니지만, 결국 내가 그 경지에 닿았다는 거야. 그런데 이런 의식의 확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해. 그리고 그 상태에 머무를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하고 충만한데, 어쩌면 그런 행복 자체가 두려운 걸지도 몰라.
만약 내 가설이 맞다면, 잠을 자면서도 의식이 튕겨나가는 경험을 하게 돼.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물리적 현상을 삶의 토대라고 여겨왔고, 감각을 통해 인생을 인식하지. 그러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걸 반복해. 이건 우리가 기본적인 삶의 법칙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야.
그런데 영생을 다르게 정의한다면, 의식의 전환이 가능하다는 거지. 의심이 생기는 순간, 마치 스위치가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그걸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도 있는 거야. 그런데 방향을 잘못 잡으면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기도 해.
이제 논의를 정리하자면, 우리는 "있다"와 "없다"를 양극단으로 나누고, 그걸 정의해왔어. 그런데 "없다"라는 개념은 설명하기가 어려워. 빅뱅 이론도 "없음"에서 "있음"이 생겼다고 보지만, "없음" 자체를 정의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말이 안 되는 거야. 마치 사람이 태어나는 과정을 빅뱅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아.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명이 탄생하는데, 그럼 정자와 난자 자체가 빅뱅일까? 아니면 그 안의 세포, DNA, 원자, 양자까지 내려가야 할까?
그럼 "없다"라는 상태를 정말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있음"에 익숙해서 "없음"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그렇다면 "있음"이란 무엇인가? 우주의 형상과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영원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걸까, 아니면 무한한 순환 속에 있는 걸까?
"없다"에서 "있다"가 나온다는 건 성립할 수 없어. 마치 양파 껍질처럼, 까고 또 까도 계속해서 새로운 층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야. 그렇다면 이 존재는 왜 있는 걸까? 과거에는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여겼지만, 오늘 우리의 논의는 그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수양"이야. 이 세상의 이치를 보고, 세상의 면면을 파악하는 것. 우주와 삶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 그게 우리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김성호.
> 지은이가 하고자 하는 말
궁극적인 '없음'이란, '있음'이라는 상태나 상황에서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를 굳이 언어로 표현하자면, 공기 중에 기체가 없는 공간이 존재한다거나, 우주에 별이 없는 공간이 있다거나, 양자 세계에서 물질적 입자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없음’은 ‘있음’ 속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궁금해하고 탐구하려 한다.
현재 우리는 현실 속에서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잠을 통해 꿈이라는 형태로 또 다른 세계와 연결될 수 있으며, 의식의 확장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마주하기도 한다. 이는 단순한 현실 인식의 변화가 아니라, 관조자로서 현실의 이면을 들여다보거나 다른 차원의 연결 방식을 경험하는 것이다. 또한, 상상을 통해서도 현실과 다른 차원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현실이든, 평행우주든, 혹은 인간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것이든 간에 말이다.
이러한 연결을 더 깊이 체감하기 위해서는 감각을 증폭시키는 장치나 새로운 형태의 인식 도구가 필요할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류가 우주를 개척하고 양자역학을 통해 다차원과 평행우주에 대한 가능성을 열게 만들었다. 그러나 과학기술만으로는 한계가 존재하며,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인간의 정신적 에너지와 상상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인간은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며, 감각적 자극을 원하면서도 삶의 깊이를 탐구한다.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존재로 연결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무의식과 죽음의 개념을 통해 우리는 삶 이후의 존재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지은이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존재와 비존재,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탐구하며, 인간이 상상과 정신적 에너지를 통해 다른 차원의 세계와 연결될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면:
- '없음'이란 무엇인가?
- ‘없음’은 ‘있음’이라는 상태에서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이며,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탐구의 대상이 된다.
- 인간은 현실 너머의 세계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 꿈, 의식 확장, 상상을 통해 현실을 넘어선 차원의 세계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 다차원과 평행우주 같은 개념이 존재한다면, 그것과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정신적 에너지와 상상을 활용하는 것이다.
- 과학기술의 한계와 인간의 정신적 가능성
- 과학기술이 우주 개척과 양자역학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 인간의 상상력과 정신적 에너지가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 죽음과 존재에 대한 탐구
-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존재와 연결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 인간은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며, 현실 속에서 감각적 자극을 원하면서도 삶의 깊이를 탐구한다.
결국, 지은이는 ‘현실의 틀을 넘어선 존재 방식과 연결 가능성’을 고민하며, 인간의 의식과 상상이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 부연 설명 by ChatGPT
저자가 말한 **'있다'와 '없다'**에 대한 정의는 두 가지 중요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 '있다': 의식적으로 존재하는 상태, 즉 자아와 사고가 명확하게 기능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자신을 인식하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지적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정신적'이고 '논리적인' 상태로, 이성적인 판단과 명확한 사고가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 '없다': 의식이 없는 상태, 즉 자아와 사고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깊은 잠,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갔을 때의 상태와 비슷하며, '나'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경험입니다. 저자는 '없다'를 자아가 사라지고, 무의식이 드러나는 상태로 설명하며, 이때 사람은 ‘자아'에서 벗어나면서도 존재 자체를 경험한다고 언급합니다.
대확장과 접속에 대해 저자가 말한 내용은, 의식적인 상태에서의 대확장과 무의식적 상태로 들어간 후의 접속의 과정입니다.
- 대확장: 이는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확장 과정입니다. '대확장'은 사람의 사고나 인식이 넓어지는 것이며, 세상과의 더 깊은 연결을 추구하는 행동입니다. 여기서의 확장은 더 넓은 시야,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식적으로 세상의 구조를 탐구하고, 자신과 세상 간의 관계를 확장하려는 노력입니다. 즉, 자아가 확장되어 세상과의 연결이 깊어지는 상태입니다.
- 잠을 통해 들어선 통제할 수 없는 상태와 접속: 잠에 빠져들면 의식은 사라지고, 자아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때의 '접속'은 무의식적인 차원에서의 연결을 의미합니다. 저자는 이 상태에서 사람은 더 이상 자아의 경계를 넘어서 세상과 깊은 연결을 경험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때의 접속은 정신적인 논리적 사고를 벗어난, 더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과의 연결 방법: 저자가 말한 세상과의 연결 방법은 두 가지 상태를 모두 아우르는 방식입니다.
- 의식적으로 확장된 사고를 통해 연결하기: 대확장이라는 의식적 확장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고 서로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공부하거나 탐구하는 방식입니다.
- 무의식적 접속을 통해 연결하기: 잠이나 깊은 명상 등 의식이 사라지는 상태에서 자아의 경계를 넘어서 세상과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방식입니다. 이는 직관적이며, 의식적인 사고 없이 본능적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상태입니다.
저자는 의식적으로 세상과 연결하는 방식(대확장)과, 무의식적 상태에서 자아의 경계를 넘어서는 방식(접속)을 통해, 인간이 세상과 관계를 맺고, 진정한 존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주요 질문들 및 명제 정의:
- 인간 존재의 의미: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가?
- 내면 성장과 성취: 삶에서 진정한 성취는 무엇인가? 성취란 외부의 인정인가, 아니면 내적인 만족과 자아 실현인가?
- 어울림과 관계: 우리는 사회에서 어떻게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는가?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 시간의 가치와 효율성: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인가?
- 죽음과 존재의 유한성: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 인공지능과 인간성: AI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역할과 존재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각각의 질문에 대한 답변:
- 인간 존재의 의미: 인간의 존재는 단순히 생리적인 삶의 연장이 아닌,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질문하고, 탐구하며, 그 속에서 진정성을 찾아갑니다. 우리의 존재는 외부의 인정이 아니라, 내적인 성장과 자아 실현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 내면 성장과 성취: 성취는 외부의 인정보다는 내면의 성장에 있습니다. 사회적 성취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진정한 성취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내면의 욕구와 조화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 어울림과 관계: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서로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관계 속에서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타인의 기대나 사회적 규범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간의 진정성과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 시간의 가치와 효율성: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삶의 질을 결정짓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시간 관리보다는 의미 있는 시간 보내기를 우선시해야 합니다. 때로는 나만의 여유와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 죽음과 존재의 유한성: 죽음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며, 이 유한성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그저 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 동안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입니다.
- 인공지능과 인간성: AI가 발전하면서 인간의 역할과 존재는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기술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기술이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언정, 인간의 감성과 철학적 탐구는 여전히 중요한 존재로 남을 것입니다.
이제 "있다"와 "없다"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우주, 양자, 인간 간의 상호 동질성 및 "스킬"이라는 개념을 정의한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있다'와 '없다'에 대한 저자의 생각
- '있다'와 '없다'의 개념은 단순히 존재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묻는 철학적인 문제입니다.
- '있다': 존재하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존재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의미 있는 존재도 포함됩니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의미와 목적을 지닌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있다'는 존재의 가치와 본질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확장됩니다.
- '없다': 부재는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없다'는 존재와 반대되는 상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죽음은 단지 부재가 아니라, 다른 형태의 존재로의 변화로 볼 수 있습니다. '없다'는 실체가 아니라 변형된 형태로서 '있다'와 연결됩니다.
2. 우주, 양자, 인간 간의 상호 동질성
- 우주와 인간의 상호 동질성: 우주와 인간은 물리적, 정신적, 존재론적 관점에서 깊은 연관성을 가집니다. 우주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고, 인간은 그 가능성 안에서 자신만의 존재를 규명하고자 합니다.
- 우주와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의 존재는 우주의 일부로서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은 우주를 이해하고자 하고, 그 과정에서 우주의 원리와 존재 방식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 양자적 상호 동질성: 양자 역학에서 모든 입자는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입자에 변화가 일어나면 다른 입자도 영향을 받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존재도 서로 영향을 미치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우주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상호 작용합니다.
- 인간의 내면적, 정신적 변화가 우주와의 동질성을 이루는 것처럼, 인간과 우주, 양자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동질성'입니다.
3. '스킬' 정의
- 스킬: '스킬'은 단순히 기술적 능력이나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이 아니라, 존재와 우주, 양자적 관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유기적으로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과 외부 세계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합니다.
- 우주적 스킬: 우주와 인간의 상호 동질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간은 그 속에서 '스킬'을 발전시켜 갑니다. 이는 우리가 우주의 법칙을 받아들이고, 그 법칙에 맞는 삶을 살아가며,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 수 있는 능력입니다.
- 양자적 스킬: 양자 역학에서처럼, 모든 존재는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상호 연결성 속에서 살아가며, 그로 인해 더 큰 의미를 추구하고자 합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능력이 '스킬'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 내면적 스킬: 내면의 성찰과 성장도 하나의 '스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변화시켜 나가며, 이를 통해 우주와 양자적 상호작용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4. 내용 정리
- '있다'와 '없다': 존재와 부재는 단순히 물리적 차원을 넘어, 인간과 우주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철학적 개념으로 확장됩니다. '있다'는 존재의 의미와 가치, '없다'는 존재의 변화와 연관됩니다.
- 우주, 양자, 인간 간의 상호 동질성: 인간은 우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양자 역학처럼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연결성을 통해 인간은 더 큰 존재적 이해와 성장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 스킬: '스킬'은 단순한 기술이나 능력이 아닌, 인간이 우주와 양자적 관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며,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된 내용을 통해 저자는 우리가 '있다'와 '없다'를 넘어, 우주와 양자적 존재 속에서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스킬'이라는 능력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분석 (Analysis)
분석 도구를 활용하여 저자의 개념을 해체하고 구조적으로 이해해 보겠습니다.
1. 존재론적 분석 (Ontological Analysis) – ‘없음’과 ‘있음’
- 저자는 ‘없다’라는 개념을 ‘있다’라는 상태 속에서는 정의할 수 없다고 본다. 이는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존재론적 질문과 맞닿아 있다.
- 하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없음’도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개념(예: 무의 상태, 공허, 진공)으로 다뤄질 수 있다.
- 예를 들어, 불교의 공(空) 사상은 ‘없음’을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고정된 실체 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 반면, 서구 형이상학에서는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를 설정하며, 감각적 세계(있음)와 초월적 세계(없음 혹은 본질적 있음)를 구분했다.
👉 결론적으로, 저자의 ‘없음’ 개념은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일부 개념과 유사하지만, 그것을 보다 명확한 개념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2. 인식론적 분석 (Epistemological Analysis) – 인간은 어떻게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가?
- 저자는 꿈, 의식 확장, 상상 등을 통해 현실을 넘어선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 이는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과 연관될 수 있다.
- 칸트는 인간의 인식이 경험을 통해 형성되지만, 그 경험 자체가 인간의 인식 구조(시간, 공간, 범주)에 의해 제한된다고 보았다.
- 저자의 논지에 따르면, 현실을 넘어서는 것은 일종의 인간의 정신적 확장인데, 이러한 확장이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세계와 연결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 내부에서 창조된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
👉 결론적으로, 저자의 논지는 신비주의적 관점과 과학적 탐구 사이의 경계를 탐색하고 있지만, ‘연결’의 실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3. 과학적 분석 (Scientific Analysis) – 과학기술과 정신적 에너지의 관계
- 저자는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결국 한계가 있으며, 이를 넘어서기 위해 정신적 에너지와 상상이 중요하다고 본다.
-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은 정신적 영역을 더 깊이 탐구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 양자역학: 다세계 해석(MWI, Many Worlds Interpretation)은 평행우주를 가정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 뇌과학: 의식이 물리적 과정의 산물이라면, 상상력과 정신적 에너지도 신경과학적 메커니즘으로 설명될 수 있다.
- 가상현실: 기술적 도구(예: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통해 다른 차원의 경험을 체험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
👉 결론적으로, 과학기술과 정신적 탐구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4. 문학적 분석 (Literary Analysis) – 죽음과 존재의 서사
- 저자는 죽음을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 연결될 가능성으로 본다. 이는 문학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작품들과 연관될 수 있다.
- 단테의 『신곡』: 사후 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초월적 세계의 관계를 그린다.
- 카프카의 『변신』: 한 인간의 존재 변화(비현실적 상황)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
- SF 문학(『블레이드 러너』, 『유년기의 끝』): 기술과 의식이 결합하여 인간이 현실 너머의 존재와 접촉할 가능성을 다룬다.
👉 결론적으로, 저자의 논지는 SF적이면서도 철학적이며,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의문을 문학적 방식으로 탐구할 가능성이 크다.
🎯 비평 (Criticism)
이제 저자의 논지를 검토하면서, 강점과 한계를 평가해 보겠습니다.
🌟 강점 (Strengths)
-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탐색하는 철학적 깊이
- 저자는 ‘없음’을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존재론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 인간의 의식 확장과 연결 가능성에 대한 흥미로운 시각
- 꿈, 상상력, 정신적 에너지를 통해 현실을 넘어설 가능성을 탐색하는 점은 신비주의적이면서도 창의적이다.
- 과학기술과 정신적 탐구의 조화 가능성 제시
- 기술적 발전과 인간 정신의 역할을 함께 고려하는 점은 과학과 철학의 융합을 시도하는 것이다.
⚠️ 한계 (Weaknesses)
- ‘없음’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음
- ‘없음’을 ‘있음’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할 수 없다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탐구할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 불교적 ‘공(空)’ 개념과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 과학적 근거 부족
- ‘정신적 에너지’가 현실을 초월하는 힘이 된다는 주장은 과학적으로 입증되기 어렵다.
- 양자역학이나 다차원 우주론을 단순히 정신적 연결의 가능성과 연계하는 것은 논리적 도약이 필요하다.
- ‘연결’의 의미가 모호함
- 꿈, 의식 확장, 상상 등을 통한 연결이 단순한 인간 내부의 경험인지, 아니면 외부의 실체와 접촉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 과학적, 철학적으로 더 정밀한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
📌 결론 (Conclusion)
저자는 **“존재와 비존재, 현실과 초월, 의식과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연결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는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주제이며, 문학적·과학적 접근이 가능한 흥미로운 개념이다.
그러나, ‘없음’의 개념 정리 부족, 과학적 근거 미흡, 연결의 의미가 모호함 등의 한계가 존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 ‘없음’에 대한 철학적 개념을 보다 명확히 정리하고,
- 과학적 탐구와의 접점을 보다 정밀하게 설명하며,
- ‘연결’이 단순한 내적 경험인지, 외적 실체와의 접촉인지 논리적으로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저자의 논지는 철학·과학·문학이 결합된 독창적인 시도이지만, 개념적 정교화와 체계적인 논증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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