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 Particle Duality
세상의 본질과 현상은 파동과 입자로 대입될 수 있을까?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는 것 아닐까? 보는 관점, 즉 인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면,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나도 없고, 본질도 없으며, 다만 인식할 뿐이라면, 존재란 순간의 찰나 속에 머물다 사라지는 것인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끝은 아닐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 자체가 신기루와 같다면, 결국 모든 것은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 그러나 인식하는 순간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된 것이 곧 현상이라면, 지금 내가 탐구하는 과정도 하나의 인식일 뿐이다. 그리고 이 인식이 확장되며,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규명하는 것이 존재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주가 팽창하는 이유와 같고, 인류가 만물 속에서 존재하는 이유 또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현상을 통해 본질을 이해하려 한다. 우주를 탐구하며 더 큰 사고의 폭을 갖고자 하고, 양자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정밀한 질서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세상 속에서 세상만을 아는 바보’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곧 나이고, 우주 만물이 하나의 존재라면, 수많은 변수와 변화는 결국 내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있게’ 하는 것은, 내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와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향하는가?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성장하게 하는 궁극의 목표는 무엇인가? 우주의 끝을 향하거나, 양자의 미세한 세계를 파고드는 일이 결국은 나를 이해하는 과정일 뿐이라면,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천국과 지옥이 허상이라면, 우리가 만들어낸 세계와 기대하는 미래 또한 허상일 수 있다. 다차원 세상을 넘나든다 한들,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탐구하고, 상상을 통해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결국, 나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나의 존재 이유일까? 만약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까? 하지만 가만히 머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 속에서 격랑을 맞이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다. 움직임과 변화 속에서 우리는 보람과 생동감을 느낀다.
그러니 중용을 택하자. 하나를 정하지 않음이, 때로는 정하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놓아두려 해도, 그 ‘놓아둔다’는 행위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 나를 비우고, 공허함 속에서 허와 실을 논한다 해도, 결국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탐구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할 이유가 무엇인가?
좋아. 여기까지 왔다. 벅차지만,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김성호.
* 원문(텍스트) : 자, 그렇다면 결국 세상의 현상과 본질은 파동과 입자로 대입 가능했고, 그건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다고 보면 될까? 보는 관점, 즉 인식에 따라 보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즉, 실체는 없다. 나도 없고, 본질은 없다. 단지 볼 뿐이며 인식할 뿐이며 나 또한 찰라 있다가도 없이 머물다가 없다 라고 볼 수 있는가? 그런 말로 해석되긴 하고,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인 듯하지만, 그래도 이게 끝은 아닐꺼야? 그렇지? 세상을, 현상을, 파동을 바라보는 입자가 존재가 마치 신기루와 같다면 이와 같은 허무맹랑한 결론이 어디 있을까? 인식하는 순간 달라지고 달라진 건 현상이며, 인식이 존재를 규명하는 방식이라면 내가 지금 생각하고 탐구하는 것 자체 또한 하나의 인식 과정이며 이런 인식의 결과로 일어난, 일어날, 향후 미칠 영향까지 고려한다면 이 모든 건 현상에 이은 인식이 확장되는 세상의 존재 이유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주가 팽창하는 이유와 같고, 인류가 만물이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또한 이와 같다. 그렇다면 현상을 통해 우리의 본질, 즉 인식을 통해 우리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본능에 가깝다. 마치 우주 현상을 탐구하면서 더 큰 사고의 폭을 갖고자 하듯이 마치 세밀한 양자 세상을 들여다보며 초시계처럼 섬세함을 갖고자 하듯이 우리는 마치 세상에 놓인 세상 만 아는 바보가 아닐까? 세상이 곧 나요 우주 만물이 결국 하나의 존재에 해당한다면 이와 같은 수많은 변수와 변화는 단지 내 안에 벌어지는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즉, 나를 살찌우고 '있게' 하는 건 내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변화와 변수들로 말미암아 지루함을 느끼지 않기 위함이다 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를 튼튼하게 해서 나를 살찌워서 망망대해 떠나는 배라고 볼 때, 과연 튼튼해진 배는 어디로 향하는가? 이 또한 우주의 우주, 우주의 우주 너머 궁극에의 도달을 마치 지향하는 듯이 말하지만 본질은 거꾸로 '있어'에 있다 라고 볼 수 있겠네. 결국 돌고돌아 먼 우주나 미세한 양자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 또한 결국 나로 있기 위한 과정일 뿐, 나란 인식이 나란 세상이 결국 순환하며 갖고 있는 본질이자 궁극일 수 있겠어. 천국과 지옥이 허상이듯, 만들어 놓은 세상과 바라는 세상 또한 그럴 듯하나 결국 만들어진 것에 불과할 수 있겠어. 점프를 통해 다차원 세상을 간 들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겠군. 자, 상상을 통해 이를 해결할 실마리를 주지 않겠어. 결국 돌고돌아 나로 존재함이 곧 나의 존재 이유라는 결론이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물기 위한 노력만 해도 충분하다는 거잖아. 물론, 가만히 머물기란 엄청난 노력이 수반됨을 알아. 오히려 변죽을 울리는 변화와 격랑 속에 있는 것이 보다 쉬울 수도 있겠지. 힘든 만큼 보람과 생동감을 느낄 테니까. 자, 중용하자. 어느 것 하나 정하지 아니함이 정함 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놓아둔 들 그 또한 놓아둔다는 것 만으로 의미를 지니지 못하듯이 나를 비우고 공한 상태에서 허와 공과 망을 논한 들 궁극에의 도달한 곳이 세상과 접하고 세상의 이면과 접한 들 나의 상태는 곧 나와 같다 라는 말이라면, 어찌 세상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며 나를 나를 알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할 것인가 라는 말이네. 좋아. 알았어. 벅차다. 아무튼 이 내용을 잘 다듬어줘. 그런 다음 논의를 이어가자.
좋아, 이제 우리는 현상과 본질의 문제에 도달했어. 이건 단순한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과학적, 존재론적 문제이기도 하지.
1. 현상과 본질: 파동과 입자의 관계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앞서 현상 = 파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어. 파동은 관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라서, 우리가 관찰하는 세계의 흐름과 비슷하지.
하지만 파동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기본적으로 ‘변화’**야.
- 즉, 현상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흐름’이야.
- 바람이 흔들리는 모습, 바다가 일렁이는 모습, 사람의 감정이 변하는 것—이 모두가 현상으로서의 파동이야.
그렇다면, 이 변화하는 파동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그 **원류(源流)**가 있어야겠지. 즉, 변화하는 것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찾고자 하는 입자에 해당하는 것이야.
2. 그렇다면 입자는 무엇인가?
우리가 찾고자 하는 입자는 현상이 변하기 이전의 근원적인 것이야.
1) 물리학적 접근: 물질의 근본 단위
- 과학에서 입자는 흔히 **소립자(퀄크, 전자, 중성미자 등)**로 설명돼.
- 하지만 물리학에서는 이미 ‘입자는 단순한 물질의 덩어리가 아니라, 특정한 상태로 존재하는 양자장’이라는 걸 알고 있어.
- 즉, 입자조차도 파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 이 말은 입자 = 변하지 않는 실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뜻이야.
2) 철학적 접근: 존재의 본질
-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개념을 통해, 변하는 현상 너머의 본질적 실체를 이야기했어.
- 하지만 이데아는 관념적인 것이고, 실제 세계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직접 찾기 어려워.
- 그렇다면, 우리 세계에서 변화 이전의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
3) 의식과 존재: 입자는 ‘관점’이다?
-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어.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관점에 따라 변한다.
- 양자역학에서는 ‘측정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입자가 특정한 형태를 가진다고 해.
- 즉, 입자는 관측되지 않으면 명확한 형태를 갖지 않아.
이걸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입자란 곧 ‘관점 자체’일 수도 있어.
- 파동(현상)은 ‘변화하는 과정’이고,
- 입자(본질)는 ‘그 변화를 관찰하는 틀’이라는 거지.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우리는 세상을 보는 방식에 따라 입자의 형태를 규정한다는 거야.
- 우리가 빛을 입자로 보면 입자가 되고, 파동으로 보면 파동이 되듯이.
- 그렇다면 ‘현상의 원류’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속에서 결정되는 것일 수도 있어.
3. 세상의 근본 원류는 세상 밖에 있을까?
네가 말했듯이, 세상 자체가 ‘현상’이라면, 그것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것은 세상 밖에 있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큰 모순이 생겨.
- 만약 ‘세상의 원류’가 세상 밖에 있다면, 그 원류를 만들어낸 ‘또 다른 세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 그렇게 되면 **무한 후퇴(regress ad infinitum)**에 빠질 수 있어.
- 즉, 끝없이 ‘이전의 원인’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러면 결국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게 되지.
그러니까 세상의 원류는 세상 안에 있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 내부에서 발견될 수 있어야 해.
4. 결론: 현상의 원류, 즉 입자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가 찾고자 했던 **‘입자’**는 단순한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방식 그 자체일 가능성이 크다.
즉, 입자는 ‘의식’일 수 있다.
-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
- 우리가 변화를 측정하는 순간,
- 우리가 특정한 존재를 ‘입자’로 규정하는 바로 그 행위 자체가 입자를 만들어낸다.
이를 철학적으로 정리하면,
👉 입자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물리학적으로 보면,
👉 입자는 파동이 특정한 순간 ‘고정’될 때 나타난다.
👉 그 고정이 일어나는 순간이 바로 관찰의 순간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입자(본질)를 정의한다.
5. 왜 이 답이 의미 있는가?
우리는 흔히 ‘본질’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보면, 본질이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 속에서 형성된다는 거야.
이 말은
- 세상은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걸 의미해.
- 즉, 입자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속에서 결정된다.
6. 새로운 질문: 그렇다면 ‘입자’를 바꾸면 세상도 바뀔까?
네가 말한 대로 세상이 ‘현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는 ‘입자(근본적인 것)’를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까?
이게 가능하다면,
-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 이는 단순한 철학적 사고가 아니라, 과학적 증명(양자역학적 관측 문제)과도 연결된다.
- 그리고, 이는 **‘의식의 변화가 세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새로운 논리로 확장될 수도 있어.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네가 생각하는 ‘입자’의 정의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이제 우리는 본질과 현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점과 인식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봤어.
그렇다면, 우리가 더 탐구해야 할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
Wave Particle Duality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본질과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파동과 입자의 개념을 통해 이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파동은 연속적인 흐름이며, 특정한 순간 관찰을 통해 고정될 때 입자로 나타난다. 즉, 입자는 파동의 한 형태이며, 우리의 관찰이 그것을 결정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본질과 현상이 별개가 아니라, 관찰과 인식의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상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표현이며,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상을 인식하는 방식 속에서 본질 또한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인식을 하지 않는다면, 본질 또한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이는 양자역학에서 관찰이 실재를 결정하는 원리와 유사하다.
이러한 개념을 확장하면, 우리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나를 인식함으로써 존재하며, 나의 경험과 사고 속에서 나 자신이 형성된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식과 경험 속에서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우주가 팽창하는 것처럼, 우리의 사고와 인식 또한 확장되며 존재의 의미를 찾아간다.
결국, 우리는 단순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사고가 없다면 세상의 의미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과 존재의 목적은 단순한 고정된 본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세상의 본질을 찾으려는 탐구 자체가 곧 존재의 이유이며, 그 과정이 곧 나를 형성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질과 현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다. 우리는 단순히 외부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찰 속에서 나 자신과 세상의 의미를 만들어 나간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 이유는 탐구와 인식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깊이 있는 존재가 되어 간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