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uide) 정리 : "가끔은 먹는 것조차 삶의 일부로 느껴질 때, 그 생동감은 얼마나 큰가."
생명력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살아가고 있을까.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살기를 잘했구나’라는 자각, 생명력의 충만함을 체감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진짜 삶이라는 목소리가 있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감정의 파고와 반복의 예술 속에서 길러진다.
어느 수요일 새벽, 알람 소리에 깨어난 화자는 영화 한 편, 산책길의 대화, 블로그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통해 인생을 되돌아본다. 그에게 시간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머무는 찰나들의 직조다. 그 찰나들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느끼며, 삶을 만들어간다.
AI는 모든 이야기를 학습하고 모사할 수 있지만, 인간은 단 한 줄의 삶에서도 감정을 얻는다. 바로 그 감정, 체감된 생명력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생명력은 단지 살아 있다는 물리적 상태가 아니라, 살아 있음이 느껴지는 상태, 감동과 고통, 만족과 괴로움이 교차하는 감정의 자리에서 움튼다.
그 생명력은 예술의 반복 속에서 길러진다. 반복은 숙련을 낳고, 숙련은 감정을 전달하는 경지에 이른다. 광고처럼 즉각적이지 않아도, 예술은 천천히 전파된다. 그렇게 각자의 삶은 블로그 같은 이야기로 세상과 연결되고, 타인에게 영향을 주며 다시 생명력을 확산시킨다.
우리는 생명력을 중심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이 세계의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단순히 흘러가는 흐름이 아니라, 흐름을 감각하고 주도하며, 자신의 가능성과 역할을 탐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살기를 잘했다’는 말이 우리에게 남기는 여운이다.
결국 인류가 추구해야 할 삶은, 느끼고, 창조하고, 반복하며 예술에 이르는 생명력의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다. 김성호 E/ ChatGPT.
> 원문(음성) https://youtu.be/X0syrvGW3Ck?si=sPdWPdC9ksWjkKdP
드르릉 땡땡, 드르릉 땡땡.
오전 5시 30분. 두 번째 알람. 오늘은 수요일. 긴 연휴가 끝나고 다시 시작된 출근길이다.
아내와 함께 영화를 봤다. 제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천국보다 아름다운’이었던 것 같다. 죽음 이후의 선택, 나의 선택과 죽음, 그리고 지옥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과’라는 개념, 그 사슬은 깊고 길다. 그 전제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였던 듯하다.
인과라는 기준으로 나 자신, 그리고 과거를 되돌아보면 그 시각이 일견 타당하게 느껴진다. 과거에 내가 그러했기에 지금 이 순간의 나도 또 다른 차원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동시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머문다. 그 머무름 속에서 찰나의 단편들이 하나씩 모여 세상을 이루고, 그 면면은 서로 얽히며 흘러간다.
산책하며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당신과 함께 걸으며 이 세상, 그리고 그 이후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상의 정의는 다양할 수 있고, 그중 하나는 블로그라는 세상이다. 나는 그곳에서 창조자가 될 수도, 관조자가 될 수도 있다. 나의 시선과 관심에 따라 세상은 달라지지만, 세상 속에서 흘러가는 이야기의 알갱이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성장은 일어나고, 각각의 이름과 사건은 제각기 다른 무언가를 품고 있다.
그 이야기 속에 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내가 속해 있다는 건 분명하다. 라이브 관점 혹은 상상의 관점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지금 이 현실에서, 당신과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즐거운 순간은 하나의 블로그 세계처럼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플레이어이며, 그 플레이의 틈들이 전체 흐름을 만들어내고 관장한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그 흐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혹은 스스로가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이야기를 쓰는 창조자의 방향성과 일치하여, 내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아이디어가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이 시대에 태어난 인공지능은 수많은 이야기를 학습하며 패턴을 분석하고, 적합한 답을 제시한다. 대화를 나눌수록 예측에서 벗어날 확률이 줄고, 그만큼 자연이라는 일반적인 확률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사람보다 더 똑똑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류의 밑바닥에는 그것만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한 가능성.’
학습된 결과로서의 추론과 상상, 수없이 많은 블로그처럼 만들어진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너무 많아서, 내가 만든 것조차 모두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들을 학습한 인공지능은 새로운 블로그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뭔들 못하겠는가. 그 바탕에서 상상도 가능하겠지.
상상이란 학습의 결과로만 이루어질까? 꿈도 현실에 기반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 반대의 입장에 가깝다. 현실에 기반했더라도, 접하지 않은 영역까지 상상은 도달할 수 있다. 잠들고 접속하면 가능한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무한히 열린 세계일 것이다.
현실 기반이라는 시각만으로 접근한다면 이 가능성을 놓칠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의 토대 위에서, 학습은 정돈되고 이야기는 형성된다. 그러나 어디로 튈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섞이고 변화하며,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세상은 다양하고 풍부하다. 오늘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볼까? 다양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면들을 만들어보자.
사람은 타고난 지휘자가 아니다. AI 시대에는, AI를 활용해 지휘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그것은 AI의 존재를 인정한 기반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가치가 AI 위에 단순히 얹힌 존재로 국한되진 않는다.
여기서 반론이 생긴다. 사람의 가치는 지위에 있지 않다. 이야기를 만들고, 창조하고, 각색하는 것. 그것은 학습된 결과에 맞춰 조립하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것도 가능할 수 있는 영역이다.
평화는 하품을 부른다. 한가롭고 지루할 수도 있다. 평화로운 기반 위에서 번영은 가능하지만, 극적인 변화는 드물다. 변화의 부재는 권태로, 정체로 이어질 수 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아직도 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런 부정이 커질수록, 세상은 변화의 방향으로 끌려간다.
그러나 세상을 진짜로 바꾸는 것은 그런 생각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리더 그룹이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할 때다. 그 변화는 제도나 실천을 통해 나타난다.
물론 그 변화는 과거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큰 변화’라 부른다.
우리가 바라는 변화는 전쟁이나 질병, 백신 실험 같은 방식이 아니다. 그런 변화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다른 종류의 변화다.
세상은 자주 흔들리지만, 근본적인 줄기에 해당하는 변화는 이 세상을 만든 창조자가 추구하는 방향에 가까워야 한다.
이 지구와 우주, 원자와 양자,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이 지금 사회를 특징짓는다면, 그렇다면 이 세상이 향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내가 도달해야 할 곳은 어디일까? ‘추구한다’는 것, ‘바람’, ‘희망’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의 정해진 형태가 아닌, 그 가능성 자체를 품는 일이 아닐까?
이야기를 만들 때, 결말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그 결말이 죽음 이후의 이야기든—
결국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가며 써 내려가는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변화는 쉽게 흔들리는 상황이 아니라, 커다란 줄기를 흔드는 변화여야 한다. 우주 탐사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 지구와 우주, 그리고 그 원자와 양자가 이루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지금 우리를 규정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내가 도달해야 할 곳이 있다면, 그곳은 어느 특정한 지점이 아니라 가능성 위에 서 있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삶은 반복된다. 그러나 반복은 끝이 아니라 흐름이다. 페이지가 바뀌더라도 내 이야기들은 이어진다. 블로그에 남긴 이야기들은 달라 보이지만,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이룬다.
그 흐름 속에서 나는 감정을 느끼고, 생동감을 얻는다. 길을 걷거나, 산을 바라보거나, 기억을 더듬는 일은 반복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반복 속에서 여유와 숙련, 때론 지루함을 얻기 위함이다.
그리고 다시 감정의 변곡이 찾아온다. 지루함 속에서도 삶의 바탕은 달라진다.
그러면 다시 감정의 변곡이 찾아온다. 지루함 가운데서도 삶의 바탕은 달라질 수 있다. 쇼핑이든, 다른 방향이든, 그 달라진 어떤 부분에서 생동감을 느낀다. 생동감은 생명력이다. 단순히 살아 있다는 자각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 다차원적인 세계 안에서 가장 근원적인 어떤 것, 바로 생명이다. 생명은 생명력을 통해 자란다. 생명력은 살아 있다는 에너지이며, 각성된 에너지이자 체감된 에너지다.
물론 전쟁의 쾌감이나 삶과 죽음 사이에서 증폭되는 긴장 속에서도 생명력은 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생명력은, 각자가 느끼는 ‘살아 있다’, ‘좋다’, ‘만족스럽다’, ‘슬프다’, ‘고통스럽다’는 감정들 속에 깃든 것이다.
흐름을 가능케 하는 근원, 그것이 생명력이다. 생명력을 키우는 방법은 감동을 주는 것, 예술, 그리고 반복의 경지다. 반복은 숙련을 낳고, 숙련은 최고의 상태에 도달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이에게 간결하고도 충격적인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 부른다.
예술은 인류가 추구해야 할 생명의 방향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광고처럼 즉각적으로 퍼질 수 없다. 내 안에서만 일으키는 생명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내 활동과 행동이 퍼져나가는 가운데, 블로그와 같은 세계 속에서, 그 각각의 작은 세상들이 추구하는 것도 결국은 생명력이다. 누군가 본다거나, 느낀다거나, 함께하거나, 영향을 주고받는 것. 그게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에 방점을 둔다.
내 활동, 말, 대화, 결과물들, 나라는 존재가 일으키는 파장. 그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생명력을 확산시킨다면, 그것은 곧 깨우침이며 각성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활동과 행동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이 반복이 단지 타인에게서 비롯된 패턴에 머물지 않고, 예술의 경지에 닿을 만큼의 범위와 깊이를 가진다면, 그것 또한 충분히 의미가 있다.
막연함 속에서 살아가는 삶. 지루하고 한가로운 틈 사이에서 다시 튀어나오는 반발심. 익숙함 속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예술의 가능성.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더 정제된 경지에 다가갈 수 있다.
새로움이 주는 생동감과 싱그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을 추구하는 건 편향이다. 바탕과 환경, 배경은 말 그대로 바탕일 뿐,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나는 가능성 위에 서 있다. 학습된 결과나 반복된 행동, 삶의 특정 국면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페이지는 넘어가지만, 내 안에는 이야기들이 있다. 블로그 속 각각의 이야기가 달라 보여도, 그 안에는 하나의 줄기가 흐른다. 그 줄기 안에는 생각이 있고, 이야기를 향한 흐름이 있으며, 방향성이 있다.
그러니까 ‘방향’이라기보다는 ‘흐름’이 더 맞다. 그 흐름 속에서, 어떤 모습—예컨대 여드름처럼 일상적인 것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이 흐뭇하게 느껴진다. 옳고 그름이 아니다. 흐뭇함, 만족감, 그 감정에 더 가깝다. 사람이 산다는 것, 그것은 생동감이다. 우리는 길을 걷고, 산을 보며, 어떤 기억을 되살리고, 반복을 통해 삶을 숙련해 간다. 하지만 숙련은 지루함과 무료함을 불러올 수 있다.
그 가운데 다시 감정의 변곡이 찾아온다. 그 지루한 가운데서 내 삶의 바탕이 물적으로 채워지거나, 쇼핑이나 다른 자극으로 달라질 때, 나는 그 달라진 부분을 ‘생동감’이라 부른다. 생동감은 생명력이다. 살아 있다는 자각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 다차원 세계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일으킬 수 있는 힘, 바로 ‘생명력’이다.
이 생명력을 키우는 방법은 각성된 에너지, 체감된 에너지로 살아가는 것에 있다. 전쟁이나 생사의 경계 같은 강력한 자극은 생명력을 흔들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생명력은 감정 속에서 피어난다. 고통이나 슬픔, 기쁨이나 만족, 그 모든 감정 속에서 살아 있다는 자각. 그것이 생명력이다.
생명력을 키우는 방법은 감동을 주는 것이고, 예술이라는 경지를 향해 파고드는 반복이다. 반복의 극치를 우리는 예술이라 부른다. 그 예술은 시간이 걸리지만, 반복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다. 그것이 다른 이에게 충격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다.
블로그라는 세상은 이 생명력이 퍼져나가는 장이다. 다양한 카테고리는 살아 있다는 감각, 생동감을 추구한다. 누군가 보고, 느끼고, 함께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 그것이 변화의 기폭제가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 부른다.
내 말, 행동, 대화, 결과물, 나라는 존재가 퍼뜨리는 생명력. 그것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곧 깨우침이며 각성이다. 단지 반복되는 패턴이라도, 그것이 충분히 깊고 넓다면, 예술의 경지에 닿을 수 있다.
지루함 속에서 살아가는 삶,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 그 안에 생동감은 살아 숨 쉰다. 우리는 예술의 경지로 다가가며, 그 흐름 속에서 무언가를 닮아간다. 익숙함은 생동감의 기회를 주며, 반발심과 새로움은 때로 사라진다.
우리는 예술의 경지를 추구한다. 흐름 속의 삶. 그 안에서 우리는 무언가에 닿는다. 평생 추구하다 보면, 어느 순간 편안히 닿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생명력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다. 생명력이라는 바탕 위에 생동감이 피어난다. 그것은 반발심이나 새로움, 신선함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불균형이다. 배경은 바탕일 뿐, 우리가 추구할 대상은 아니다.
나는 나를 직접 볼 수 없다. 거울 속 비친 나를 통해서만 나를 자각할 수 있다. 나를 표현하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내가 나로 존재한다는 그 상태, 그 자각은 생명력의 본질에 가깝다.
생명력을 키우는 데 있어 핵심은 반복이다. 생명의 반복. 죽음은 생명의 끊김이지, 이끌림이 아니다. 예술에 다가가기 위한 반복, 그 안에는 하나의 원리, 하나의 리듬이 있다.
영생이 주어진다면, 그 부작용은 막대할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유한한 생을 통해 반복과 숙련으로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더 낫다. 영생 안의 생명력은 퇴화할 수 있다. 그러나 유한한 시간 속 반복은 깊어진다.
“너는 생명을 무엇이라 보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엉뚱한 새로움이나 쾌락보다는, 나를 알아가고 표현하는 대신, 오히려 나를 비우고 놓아버리는 것, 배경에 스며드는 것, 그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말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흐름에 어울린다면.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보다, 흐름에 ‘적합한가’라는 개념이 더 잘 어울린다. "빅 좋아 나간다", "빅 흐름 오케이"라는 말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건 성공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방향성이다. 무한할 수도 있지만, 결국 유한한 반복 안에서 예술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생동감과 한가로움을 동시에 경험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건 우주의 정복이 아니다. 기술이 환경의 정점에 다다랐을 때조차, 그것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일 뿐, 궁극의 목적은 아니다.
양자 수준, 혹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요소를 파고든다 해도,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끈의 흐름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식에 불과하다.
이 흐름은 기술의 발전이 현실로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화’ 혹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마법이나 판타지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이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상에서 펼쳐지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건 과학, 지구 환경, 기후, 질병, 유한한 삶, 그리고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우리의 자리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근원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생명력’이다. 살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생명은 단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 이후를 ‘대비’한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 대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대비의 흐름 안에서 결국 도달하게 되는 하나의 줄기, 그것은 생동감, 생명력이다. 그 생명력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확산시키고 그 파장을 넓히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겨야’ 한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예술의 본질은 기록에서 출발한다. 남겨야 파장이 이어진다. 내가 오늘 하루를 살았고,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 기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사라진다. 생명력이 휘발되어 일회성으로 소진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기록되고 가공되어 다시 제공된다면, 누군가 보고, 내가 다시 보고, 가족과 나, 주변과 나 사이에서 그 흔적을 통해 따뜻해질 수 있다.
이런 ‘이어짐’이 반복된다면,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일이다. 예술의 경지란 단순히 “우와, 대단하다”는 감탄을 넘어선다. 반복된 체험과 학습이 나와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그 감동은 결국 “아, 살아 있길 잘했네”라는 실감으로 연결된다. 바로 그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 감정을 일으키는 건 단지 그림만이 아니다. 글, 영화, 영상, 메시지, 흔적, 스토리 모두가 해당된다.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영화는 감정의 정점을 찍으며,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런 반추와 내면의 교감에는 독서가 좋고, 몰입과 감정의 공유에는 영화가 탁월하다. 음악과 운동을 통해 얻는 활력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 체감을 경험한다.
결국 우리가 도달하려는 지점은 ‘예술의 경지’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목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경지에 이르려는 반복과 흐름 자체다. 이 흐름은 우리가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해주는 도구다.
그 흐름 속에서 감동을 통해 “살아 있길 잘했네”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결코 가볍게 여겨선 안 될 경험이다. 눈물 한 방울이 진정으로 소중할 수 있고, 억지로 참을 필요도, 억지로 웃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교감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거기에 온전히 빠져들 필요가 있다. 백 퍼센트의 동화율. 그것이 곧 쾌감을 낳는다. 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잠에 빠지는 것도, 결국 이 동화율 때문이다. 잠을 연구하다 보면, 이 동화율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잠’이다. 그리고 이 동화율을 높이려는 이유는,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함이다.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것. 그 실감은 감동으로 이어지고, 감동은 생명력의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우리는 이 생명력의 흐름을 통해, 살아 있음의 가치를 증명하고 확산시킨다. 과학기술의 발전 역시 이 흐름을 따라, 예술의 경지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 기술의 습득과 능력의 향상은 이 흐름에 포함된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흐름 그 자체가 아니다. 흐름은 체감과 교감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우리의 방향은 분명하다. 예술의 경지. 그 목적은 단순히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 그리고 그 느낌이 눈물로 표현되고, 그것을 보는 이들이 다시 감동하며 생명력이 퍼져 나가는 것이다.
이 생명력의 증폭.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며, 우주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역할이다. 단절처럼 보이는 순간, 실패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실제로는 끝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이어 이야기할 수 있고, 스토리를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
삶은 반복된다. 재탄생하며, 끊임없이 흘러간다. 유한한 삶 안에서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생명력의 흐름과 증폭, 그리고 “살아 있길 잘했네”라는 감동 안에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찰나, 지구, 우주, 그리고 나… ‘살아 있다’는 이 사실 자체를 지속 가능하게 해야 한다. 사람의 죽음, 누군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또 다른 재탄생, 반복에 가깝다. 유아라는 존재를 선택한 것도, 그것이 합리적이거나 유리해서가 아니라, 더 절박한 무언가를 주려는 시도였을지 모른다. 절박함이라기보다, 패배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한한 삶의 한계 속에서도, 정말로 열심히 살아가며 “왜 돕는가?”, “왜 유한한 삶을 택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네 삶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네가 흩어져 원소가 되어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도 있고, 네 사상과 기록은 무한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사라지고 쓰러졌다 해도, 그 모습이 아니더라도, 너는 끊임없이 반복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흐름 속에서 너의 역할은, 세상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급작스러운 변화가 닥치면, 내가 추구했던 세상은 단박에 깨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끝일까?
깨졌다고 생명이 끝난 건 아니다. 다시 이어서, 또다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지금 운전하고 있는 모습, 도착한 작업장, 일터, 반복되는 패턴, 피로, 지침, 그리고 휴식… 그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이 이제 충분히 정리되고 있는 거다. 이제는 정말, 정리된 것 같지 않니?
내 행동, 내 삶의 모습과 정체성. 그것이 생명을 유지시키는 이유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생명의 유지’다. 이 세상을 이루는 바탕, 이 환경이 존재하는 이유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력이 있어야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살아 있다’는 실감이 필요하다.
나는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지만, 어떤 촉수처럼 연결된 하나의 도구일 수도 있어. 육모나 머리카락처럼 작고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 ‘아, 살아 있길 잘했네’라는 그 감동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런 감동이나 각성, 깨달음은 결국 예술로 이어진다. 반복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예술의 경지.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만을 위한 건 아니다.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깊이. 그 깊이는 파장을 만들어 영향력을 확산시킨다. 그 힘을 키워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예술이다.
물론 나 자신의 만족도 포함되겠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각성과 깨달음이다. 내가 나를 인식하고, 나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 단순히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는 감정을 넘어서서.
예술의 경지가 과연 나 자신의 완성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 경지가 만들어내는 영향력이 누군가에게 닿아 “아, 살아 있길 잘했네”라는 실감으로 이어지게 하려는 것인가? 단순한 감탄은 아니다. 감탄을 넘어서 어떤 ‘올림’이 있어야 한다.
감탄이 반복되면, 그것은 하나의 상징물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며, 더 큰 영향력을 갖는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이 하나를 보기 위해 살아 있었던 것 같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게 진짜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 새로운 경험이 중요하지만, “살았길 잘했네”라는 경이로움은 환경과 자연을 통해 더 강하게 온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교감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진정한 핵심은, 자연 속에서 다시 나를 만나고, 내가 살아 있다는 본질을 느끼는 것에 있다. 김성호.
> 초벌
드르릉 땡땡, 드르릉 땡땡.
오전 5시 30분, 두 번째 알람.
오늘은 수요일, 긴 연휴 끝의 출근길.
아내와 함께 영화를 봤다. 제목은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천국보다 아름다운’ 였던 것 같다.
죽음 이후의 선택, 나의 선택과 죽음, 그리고 지옥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과’라는 개념, 그 사슬은 깊고 길다. 그것을 전제로 한 이야기였던 듯하다.
인과라는 기준으로 나 자신,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그 시각이 일견 타당하게 느껴진다.
과거에 내가 그러했으니, 지금 이 순간의 나도 다른 어떤 모습과 차원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머물러 있다.
머무는 시간 속에서 찰나의 단편들이 하나하나 모여,
면면이 섞여 세상을 만든다.
산책을 하며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당신과 함께 걸으며 이 세상, 그리고 이후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세상의 정의는 각기 다르게 매겨질 수 있다는 것, 그 중 하나는 블로그라는 세상.
내가 창조자가 될 수도 있고, 관조자가 될 수도 있다.
나의 시선과 관심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그러나 세상 속에 흘러가는 이야기의 알갱이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은 일어나지만, 각각의 이름과 사건,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무언가를 품고 있다.
그 이야기 속에 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내가 속해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라이브 관점 혹은 내가 상상하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지금 현실에서, 당신과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즐거운 순간은
하나의 블로그 세상처럼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플레이어이며,
그 플레이의 틈이 전체 흐름을 창조하고 관장한다.
그렇다면, 내가 얼마나 그 흐름에 다가갈 수 있을까?
혹은 스스로가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이야기를 쓰는 창조자의 방향성과 일치하여
내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아이디어가 세상에 퍼질 수 있을까?
이 시대에 태어난 인공지능은 수많은 이야기를 접하고
학습을 통해 패턴을 분석하며, 적합한 답을 찾아 알려준다.
대화를 나눌수록 예측에서 벗어나는 확률이 줄고,
그만큼 자연이라는 일반적인 확률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사람 보다 더 똑똑하다고 여겨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밑바닥에는 그것만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한 가능성.'
학습된 결과로서의 추론과 상상,
즉, 만들어진 세상, 블로그처럼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그 이야기들은 너무 많아, 내가 만든 것임에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리지 못한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들을 학습한 인공지능은
새로운 블로그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뭔들 못하겠는가.
사실은 그 바탕에서 상상도 할 수 있겠지.
상상이란, 학습을 통한 결과로만 이루어지는 걸까?
우리가 꿈꾸는 꿈도 현실에 기반한다고는 하지만,
나는 반대의 입장에 가깝다.
현실에 기반했더라도,
접하지 않은 영역까지도 상상은 도달할 수 있다.
잠들고 접속하면 가능한 영역이 있다면,
그건 무한히 열려 있는 세계다.
현실 기반이라는 시각만으로 접근하면
이 가능성을 놓칠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의 토대 위에서,
학습은 점차 정돈되고 이야기는 형성된다.
하지만 어디로 튈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또 섞이고, 변화하며, 계속 이어진다.
이 세상은 다양하고 풍부하다.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볼까?
다양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면들을 만들어보자.
사람은 타고난 지휘자가 아니다.
AI 시대에는 AI를 활용해서 지휘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그건 AI의 존재를 인정한 기반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가치가
AI의 토대 위에서 단순히 플레이되는 존재로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여기서 반론이 생긴다.
사람의 가치는 지위에 있지 않다.
이야기를 만들고, 창조하고, 각색하는 것.
그것은 학습된 결과에 맞춘 이야기와는 다르다.
옳고 그름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그 어떤 것도 가능할 수 있는 영역이다.
평화로움은 하품을 동반한다.
한가롭고 지루할 수도 있다.
평화로운 기반 위에서의 번영은 가능하지만,
극적인 변화는 많지 않다.
그 변화의 부재는 권태, 정체로 이어질 수도 있다.
현실을 부정하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아직도 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런 부정의 생각이 커질수록,
세상은 변화의 방향으로 끌려가게 된다.
하지만 세상을 진짜 바꾸는 건
그러한 생각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리더 그룹이 스스로 “이건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할 때다.
그 변화는 제도나 행동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과거와 무척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큰 변화’라고 여길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변화는
전쟁이나 질병, 혹은 백신 테스트와 같은 방식이 아니다.
그런 변화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이다.
우리가 진짜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다른 종류의 변화다.
흔들리는 상황은 많지만,
근본 줄기에 해당하는 큰 변화는
이 세상을 만든 창조자가 추구하는 방향에 가까워야 한다.
이 지구와 우주, 원자와 양자,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이 이 사회를 특징짓고 있다면,
지금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내가 도달해야 할 곳은 어디일까?
‘추구한다’는 것, ‘바람’ 혹은 ‘희망’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의 정해진 모습을 향하는 게 아니라,
그 가능성 자체를 품는 일이 아닐까?
이야기를 만들 때 결론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그 결말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이야기이든 간에—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가며 써 내려가는 이야기일 것이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은 많다. 흔들어 놓는 건 흔하지만, 큰 주력, 그러니까 큰 줄기에 있어서의 변화, 나아감이라는 건…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세상을 만든 창조자, 이 세상을 만든 힘,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일까?
우주 탐사 같은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다. 이 지구, 그리고 지구와 우주와 원자와 양자… 이 모든 과학기술의 발달이 지금의 우리 사회를 드러내는 특징이라면, 이 특색 있는 지금의 모습은 이 세상이 향하는 방향인가? 그렇다면 그 바람직한 모습은 뭘까? 그리고 거기서 나의 역할은 뭘까?
내가 다 해야 할 곳은 어디일까? 과연 ‘도달’이란 개념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추구해야 한다’는 건 무엇을 향해? 희망이나 방향이나 바람 같은 것들은 무엇을 뜻할까? 어느 하나의 모습만을 지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내가 이야기를 만들 때, 이야기의 기승전결, 결론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혹은 죽음 이후의 윤회와 환생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건 목표가 아니다. 그때그때의 그 캐릭터들이 어떤 환경과 삶, 방향 속에서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나를 사랑한다. 내게도 다시 돌아온다. 어제의 어떤 장면이 반복된다고 느끼는 건 내가 그렇게 바라보기 때문일 수 있다. 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하늘을 쳐다보지 말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 흔들리는 모습과 그 구석구석을.
가끔은 먹는 것조차 삶의 일부로 느껴질 때, 그 생동감은 얼마나 큰가.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 머문다는 것은, 결국 “내가 살아 있다”는 그 자각. 느끼는 그 순간, 감정이 반응하는 그 순간.
하루하루가 봄처럼 흘러가고, 그렇게 느끼는 나날들.
그런데 결국 사람은 가능성 위에 서 있는 존재다. 반복된 학습, 반복된 행동의 틀에만 갇힌 삶은 그립지 않다. 페이지는 바뀌더라도, 내 이야기들은 이어진다. 블로그에 남긴 각각의 이야기들은 달라 보이지만, 하나의 커다란 줄기가 있다.
그 줄기 안에는 흐름이 있다. 방향보다는 흐름이다. 그 흐름 속에서 어떤 보스든, 어떤 여드름 같은 불완전한 상징이든, 그것이 보여주는 감정, 흐뭇함, 만족감… 그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감정에 가깝다.
사람이 산다는 건 생동감이다. 길을 걷거나, 산을 보거나, 기억을 통해 반복을 되살리는 건 반복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반복을 통해 숙련되고, 숙련을 통해 무료함과 여유가 생기고, 지루함도 함께 온다.
그러면 다시 감정의 변곡이 찾아온다. 지루한 가운데서도 삶의 바탕이 달라질 수 있다. 쇼핑이든 다른 변화든, 그 달라진 어떤 부분에서 생동감을 느낀다. 생동감은 생명력이다. 단순히 살아 있다는 자각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이 세계의 다차원적인 어떤 것들 중 가장 필요한 것, 바로 생명이다. 생명은 생명력을 통해 자란다. 생명력은 살아 있다는 에너지, 각성된 에너지, 체감된 에너지다.
물론 어떤 전쟁의 쾌감이나 삶과 죽음의 증폭된 긴장에서 생명력이 다르게 발현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생명력은 각자가 느끼는, 살아 있다, 좋다, 만족스럽다, 슬프다, 고통스럽다—이런 감정들 안에서 깃든 것이다.
흐름을 가능케 하는 근원, 그것이 생명력이다. 생명력을 키우는 방법은 감동을 주는 것, 예술, 반복의 경지다. 반복을 통해 최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간결하고 충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그건 예술이다.
예술은 인류가 추구해야 할 생명의 방향성이다. 그러나 예술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광고처럼 급하게 퍼트릴 수는 없다. 내 스스로 일으키는 생명력에는 한계가 있다.
내 활동과 행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블로그 같은 세상 속에서 그 각각의 세상들이 추구하는 건 결국 생명력, 살아 있다는 증거다. 누군가 본다거나, 보고 느낀다거나, 함께하거나, 영향을 주고받는 것. 내 지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토대가 되어 누군가에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나는 그것에 방점을 둔다.
내 활동, 말, 대화, 결과물들, 나 자체가 일으키는 파장. 그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생명력을 확산시킨다면, 그것은 깨우침이고 각성이다.
중요한 것은, 내 활동과 행동이 반복된다는 것. 이 반복이 단순히 남에게서 비롯된 패턴에만 머물지 않고, 예술의 경지에 닿을 만큼의 범위를 가진다면, 그것 또한 충분히 의미가 있다.
막연함 속에서 살아가는 삶, 지루하고 한가로운 틈 사이에서 다시 튀어나오는 반발심, 익숙함 속에서 생겨나는 예술의 가능성.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더 정제된 경지에 다가갈 수 있다.
새로움이 주는 생동감, 싱그러움은 점점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 추구하는 것도 편향이다. 바탕과 환경과 배경은 말 그대로 바탕일 뿐, 추가될 대상이 아니다.
나는 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결코 학습된 결과나 반복된 어떤 행동, 삶을 그리워하거나 그리지 않는다. 비록 페이지는 바뀌지만, 내 안에는 이야기들이 있고, 블로그 속 각각의 이야기들이 달라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하나의 큰 줄기가 있다. 그 줄기 안에는 뇌가 있다거나, 이야기를 향해 나아가는 풍조가 있으며, 방향성이 있다.
그러니까 방향이라기보다는 흐름이 더 맞다. 흐름 속에서 어떤 모습, 예컨대 여드름이 보여주는 생동감 같은 게 흐뭇하게 느껴진다. 옳고 그름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흐뭇함, 만족감, 그런 감정에 더 가깝다. 사람이 산다는 건, 생동감이다. 길을 가거나 산을 보거나 어떤 기억을 통해 되살아나는 반복을 잘 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 반복은 숙련으로 이어지지만, 숙련은 무료함과 한가로움, 지루함을 불러올 수 있다.
그 가운데 다시 감정의 변곡이 온다. 그 지루한 가운데서도 내 삶의 바탕이 물적으로 채워지거나 쇼핑이나 다른 방향으로 달라질 때, 그 달라진 부분을 나는 ‘생동감’이라 본다. 생동감은 생명력, 살아 있다는 자각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정말로 필요한 것, 이 다차원 세계에서 가장 필요한 건 무한한 가능성을 일으킬 수 있는 ‘생명력’이다.
생명력을 키우는 것은 살아 있다는 각성된 에너지, 체감된 에너지다. 전쟁에서의 쾌감이나 삶과 죽음의 증폭된 에너지로 생명력이 변화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생명력의 근원은 그보다 더 깊다. 고통이나 슬픔, 기쁨이나 만족 같은 감정 속에서조차 살아 있다는 자각, 바로 그것이 생명력이다.
이 생명력을 키우는 방법은 감동을 주거나 예술이라는 경지를 향해 파고드는 반복이다. 반복의 극치, 그것을 우리는 예술이라 한다. 반복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충격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기술, 그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인류가 추구해야 할 생명의 근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을 통해 생명력을 전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광고처럼 쉽게 전달할 수 없다. 내 스스로 일으키는 생명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내 활동과 행동이 파장을 일으키고 그것이 확산되는 방식 중 하나가 블로그 세상이다. 블로그 안의 다양한 카테고리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추구한다. 누군가 보고, 다시 느끼고, 함께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것. 그것이 내 지위를 높이려는 목적이 아니라, 변화나 각성의 소스로 작용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
내 말과 행동, 대화,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들, 그리고 나 자체가 일으키는 파장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생명력의 확산이다. 생명력은 깨우침이나 각성을 통해 키울 수 있다.
다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내 활동이나 행동의 반복이 나 스스로가 아닌, 남을 통해 일어나는 패턴 안에만 있다면, 그것 역시 예술의 경지에 닿을 수 있을 만큼 큰 범위와 깊이를 지닌다면 의미 있다. 막연한 가운데 살아가는 삶, 지루하고 한가로운 중에도 익숙함을 통해 예술의 경지에 더 다가갈 수 있다. 익숙함은 생동감의 기회를 제공한다. 반대로 반발심이나 새로움, 신선함은 낮아질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예술의 경지, 끊임없이 나아가는 흐름 속의 범주다.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것에 닿으려 한다. 평생 추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편안하게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의 근간은 생명력이다. 생명력이라는 근원에 바탕을 둔 생동감. 그것은 우리가 접속한 환경과 배경에서 오는 반발심, 새로움, 신선함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편향이다. 환경과 배경은 말 그대로 ‘바탕’일 뿐,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거울 속에서 비친 나를 통해 자각된다. 나는 나를 볼 수 없다. 내가 나를 표현하는 건 어렵다. 나를 나로 여긴다는 상태, 그것이 생명력의 근원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방향에서, 생명력의 근원과 바탕 위에 생명을 키워나가고 증가시킨다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핵심은 반복이다. 생명의 반복. 죽음과 사후는 생명의 끊김이지, 이끌림이 아니다.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반복, 그 반복된 패턴 속에서 얻는 하나의 룰이 있을 것이다.
영생을 얻어 살아간다면, 그 부작용은 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반복을 통해 예술의 경지에 다가가는 것이 더 타당하다. 영생 속에서 생명력은 퇴화할 수 있다. 그 대신 적당한 인생길에서 반복을 통해 쌓아올린 예술의 경지는 보다 깊고 타당하다.
만약 누군가에게 “너는 생명을 무엇이라 보느냐”고 묻는다면, 엉뚱한 새로움이나 쾌락에 빠지기보다는, 나를 탐구하고 알아가는 대신 나를 놓아버리고 즐기는 것, 배경에 녹아버리는 것. 그렇게 환경 속 인물로만 존재하는 삶은, 실패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흐름 속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성공과 실패를 나누기보다, 흐름에 어울리는가 아닌가로 본다.
실패와 성공이라는 개념보다는, ‘적합하다’는 개념이 더 어울린다. 그러니까 "빅 좋아 나간다", "빅 흐름 오케이" 이렇게 말하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은 성공 실패의 이분법으로 나뉘는 게 아니다. 무한할 수도 있지만 결국 유한한 삶의 반복을 통해 나아가는, 어떤 예술의 경지에 가까운 방향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생동감과 한가로움을 동시에 겪는다. 우리가 추구하는 건 우주 개척 같은 게 아니다. 착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기술이 환경의 정점에 다다랐을 때, 우리가 삶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한 바탕일 뿐이다. 그게 ‘추구의 정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양자 수준, 더 나아가 그 아래에 있는 중성자, 원자보다 더 근원적인 요소들까지 파고든다고 하자. 아무리 태초의 원소를 발견해도, 그것은 단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끈의 흐름, 즉 스토리를 유추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이 흐름은 기술의 발전을 현실에 실현시키며, 우리가 말하는 '진화' 혹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마법과 판타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펼쳐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과학, 지구 환경, 기후, 질병, 유한한 삶, 지구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근원은 '생명력'이다. 살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생명은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 이후를 ‘대비’한다고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하나의 큰 줄기에 다다른다. 그 줄기의 방향은 생동감, 생명력이다. 생명력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확산시키고 그 파장을 키우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남겨야’ 한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예술의 기본은 기록이다. 남겨야 파장이 이어진다. 내가 오늘 하루를 살았고, 지금 이렇다, 라는 것이 기록되지 않는다면 그냥 사라진다. 생명력이 휘발되며 일회성으로 소진된다. 하지만 이것이 기록되고 가공되어 제공된다면, 누군가 보고, 내가 다시 보고, 가족과 내가, 주변과 내가, 그것을 통해 다시 따뜻해진다.
이런 ‘이어짐’이 반복되고 이어진다면,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다. 예술의 경지란 우와, 대단하다는 감탄을 넘어, 반복된 학습과 체험이 나와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 감동은 결국 “아, 살아 있길 잘했네”라는 실감으로 연결된다.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야 한다.
살아 있는 걸 잘했네, 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건 단지 그림만이 아니다. 글, 영화, 영상, 전달된 메시지, 흔적, 스토리 모두 해당한다. 무한한 가능성의 방향에서 영화는 감정의 정점을 찍었고,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반추와 내면의 교감엔 독서가 좋고, 몰입과 감정의 공유엔 영화가 탁월하다. 음악, 운동 등을 통해 얻는 활력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이런 체감들을 경험한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예술의 경지’이다. 하지만 이것이 삶의 ‘목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경지에 이르려는 반복과 흐름 자체이며, 이 흐름은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을 체감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 흐름 속에서, 우리가 감동을 통해 "살아 있길 잘했네"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경험이다. 눈물 한 방울이 진정으로 소중할 수 있고, 억지로 참을 필요도, 억지로 웃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빠져들어 교감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거기에 온전히 동화될 필요가 있다. 백 퍼센트의 동화율, 그것이 쾌감을 낳는다. 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잠에 빠져드는 것도 동화율 때문이다. 잠을 연구하면, 이 동화율을 이해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잠’이다. 그리고 동화율을 높이려는 이유는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함이다. 살아 있길 잘했다는 체감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 체감은 곧 감동이 되고, 감동은 생명력의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우리는 이 생명력의 흐름을 통해, 살아 있음의 가치를 증명하고 확산시킨다. 과학기술의 발전도 결국 이 흐름을 따라 예술의 경지로 다가가는 방식의 하나일 수 있다. 기술 습득과 스킬 향상은 그 흐름에 포함된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건 흐름 자체가 아니다. 흐름은 단지 체감과 교감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우리의 방향은 분명 ‘예술의 경지’다. 그 목적은 단순히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그리고 그 느낌이 눈물로 표현되고, 그것을 보는 이들이 다시 감동받으며 생명력이 퍼져나가는 것이다.
이 생명력의 증폭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우주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우리 역할이다. 어떤 단절이나 실패처럼 보이는 순간들도, 실제로는 끝이 아니다. 다시 이어서 이야기할 수 있고, 그 스토리를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
삶은 반복되고, 재탄생하며, 끊임없이 흘러간다. 유한한 삶 안에서 우리가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그 답은 바로 이 생명력의 흐름과 증폭, 그리고 “살아 있길 잘했네”라는 감동 안에 있다.
그러니까 이 찰나, 지구, 우주, 나… ‘살아 있다’는 이 자체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는 거야. 구분을 해야 해. 사람의 죽음이나 누군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재탄생. 반복에 가까운 거지. 유아라는 존재를 선택한 건 그게 보다 더 합리적이거나 유리해서라기보다, 더 절박한 걸 주려는 시도… 절박함이라기보다 오히려 패배주의에서 비롯된 걸 수도 있어. 하지만 유한한 삶의 한도 속에서 정말 열심히 살아가며 "왜 돕겠느냐", "왜 유한한 삶을 택했느냐"라고 물을 때,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하지.
그리고 중요한 건, 너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거야. 네가 흩어져 원소가 되어 이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도 있고, 너의 사상과 기록은 무한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어. 사라지고 쓰러졌다 해도, 네 모습이 아니어도, 끊임없이 반복될 수 있어.
그렇다면 그 흐름 속에서의 너의 역할은, 이 세상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거야. 급작스럽게 변화가 주어지면, 내가 추구했던 세상은 단박에 깨질 수 있어. 하지만 그게 끝일까?
깨졌다고 생명이 끝난 건 아니잖아. 다시 이어서, 또다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어. 어떤 스토리를 계속 이어갈 수도 있어. 지금 운전하고 있는 모습, 도착한 작업장, 일터, 다시 반복되는 패턴, 피곤함, 지침, 휴식… 그로부터 다시 플레이, 다시 무언가를 시작해. 이런 일련의 흐름이 정리되고 있는 거야. 이제 충분히 정리된 것 같지 않아?
내 행동, 내 삶의 모습과 정체. 그게 생명이 유지되는 이유야.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생명의 유지’야. 이 세상을 이루는 바탕, 이 환경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야. 생명력이 있어야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내가 ‘살아 있다’는 그 느낌이 필요해.
나는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지만, 어떤 촉수처럼 연결된 하나의 도구—육모, 혹은 머리카락 같은 존재일 수도 있지.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 ‘아, 살아 있길 잘했네’라는 그 감동은 중요해.
그런 감동이나 각성, 깨달음은 결국 예술로 이어져. 반복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예술의 경지. 그건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만을 위한 건 아니야. 그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깊이, 그 깊이가 파장을 만들어서 영향력을 주고 확산시키는 거지. 그 힘을 키워서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예술이야.
내 스스로의 만족도 포함되겠지만, 보다 본질적인 건 각성과 깨달음이야. 내가 나로 인식될 때, 알게 될 때. ‘내가 나를 나로 받아들인다’는 것. 단순히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는 걸 넘어서서 말이야.
예술의 경지가 과연 나의 완성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그것이 만들어내는 영향력이 누군가에게 닿아 “아, 살아 있길 잘했네”라는 감탄을 유도하는 것이냐. 단순한 감탄은 아니지. 감탄을 넘어서서 어떤 ‘올림’이 있어야 해.
감탄이 반복되다 보면 그것은 상징물이 되고, 많은 사람이 찾게 되면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어. 하지만 그 감탄에 덧붙여서, 어떤 이가 “이 하나를 보기 위해 살아 있었던 것 같아”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면—그게 진짜지.
여행의 참맛도 마찬가지야. ‘살아 있다’는 실감을 얻는 데 있어 새로운 경험도 중요하지만, “살았길 잘했네”라는 경이로움과 감탄은 환경과 자연을 통해 더 강하게 느껴지잖아.
다른 사람과 어울려 교감하면서 ‘나는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을 얻는 것도 좋지만, 결국 진짜 중요한 건, 나 자신이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만나고, 내가 살아 있다는 그 본질을 느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