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어떻게살것인가

《달라질 건 없다 해도》

큰바위얼굴. 2025. 5. 15.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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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 아니 세상이 굉장히 어두컴컴했다. 마치 폭우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하지만 한편 다행이었다. 금요일 새벽에는 짐 가방, 그릇이 담긴 가방, 약 봉투, 우산까지 들고 갔어야 했는데, 만약 그랬다면 정말 번거롭고 비까지 쫄딱 맞았을 것이다. 그래, 다행이었다. 뚜두뚜두, 아이고 참. 그러니까 또 내 몸이 활력이 넘치기도 했고, 혼란스럽기도 했지.

나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거나, 불리하거나, 혹은 끊임없는 자기 질문을 할 때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무시하고 싶은, 그리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무시하고 있는 그런 모습일 것이다. 겉도는 듯한,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상태. 다를 게 뭐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찜찜함이 남는다. 그러니까, 아직은 쿨하지 않다. 글쎄,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면에서 봐서일까, 아니면 너무 진지하게 대했던 걸까. 이런 일련의 상황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든다. "뭘 원하니?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엇을 바라고, 원하고, 이루려 했던 것들이 사실은 멈춰 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지금은 미래에 어떤 걸 기대한다기보다는, 그저 ‘지금’의 만족 혹은 현재의 감각에 머물러 있는 느낌. 그런데 이것도 피곤하다. 어떤 방향성을 갖고 이끌어가는 미래 지향적인 삶이 아니라, 단지 현재에 머물면서 미래의 변화는 변수로 두고, 과거는 되짚어보되 이롭지 않다면 멈추는 것. 그렇지, 결국은 정해진 거다. 어디를 가든 가면 되는 거고, 시간이 되면 나오게 돼 있다. 그 아래 기대나 관계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희망을 품으면 되는 거고, 아니라면 아닌 대로 살아가면 되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서운함, 안타까움, 그리움 같은 감정이 남아 있다. 어떤 부분은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쿨하다” 말하긴 어렵다.

자주적인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마음에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나. 도대체 뭘 더 욕심내려는 건지, 뭘 더 바라고 원하는 건지. 기대에 찬 극대치를 원하면, 그에 따른 파장도 생긴다. 누리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도 생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조차도 ‘누린다’는 걸 모를 정도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건데, 왜 나만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대부분이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만약 하늘을 보다가 놀랄 만큼 어떤 변화가 생긴다면? 그런 건 마치 뜬구름 잡는 이야기. 하지만 그 구름 하나하나에도 이름을 붙이고, 형태를 표현해낼 수 있다.

경비원이 문양의 패턴을 알아보듯, 그것은 단지 기후가 아니라 일정한 언어의 패턴이라는 개념에서 탐구가 가능하다. 하나의 유희이자, 일종의 발견이다. 마치 병원을 찾아낸 것처럼. 그것도 하나의 업적이고, 어떤 의미에선 빚을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빚이라는 것의 작품성과 근간, 근원, 그 바탕은 한순간에 사라지는 바람처럼 휩쓸려 가버린다. 놓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인지, 변화에 맞서려는 건지, 혹은 변화에 따라 흘러가는 것인지. 구름이든, 바람이든, 세월이든 다를 바 없다. 지금 같은 모습을 그린다면, 하얀 바탕에 까만 점 하나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 모습은 같을 것이다.

하얗고 가만한 시작. 뭐가 다른가? 음향이 달라 보여도, 실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선택이라는 건 결국 완전한 자기 만족을 위한 것. 성취감은 충분히 자랑해도 될 일인데,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이게 전부인가?”

그만큼 가졌고, 그만큼 내려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리지 못한 삶에 대한 애착, 애정, 욕망이 있다. 이 탐구의 여정이 차원 너머에 닿는 거라면, 각성과 깨달음은 결국 수양의 결과물이다. 자기 완성의 길.

하지만 변하는 건 없다. 그냥, 너의 인생을 즐겨. 그게 맞는 말인 것 같다. 뭘 더 기여하려 하고, 이바지하려고 하는지. 그래도 그게 또 재미있다. 그러니까 즐겁다. 재미있는 하루였다. 씨유.


  * 원문(음성) 

재미 어!.m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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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무것도. 달라질 것도, 변할 것도 없다. 장소 만 바뀔 뿐. 삶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다. 발끈하지 않는다. 바뀌지 않을 것과 별다를 바 없음을 말한다. 내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은 만족한다고 한다. 만족하려고 한다. 상대 비교를 통해 그리고 경험을 통해 자신이 지금 누리는 바를 납득한다. 나 또한. 내게 주어진 바를 내가 할 무엇인가에 집중한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다만 신경이 쓰일 뿐. 흔들릴 뿐. 흔들려도 좋다는 걸 알겠다. 굳이 방어할 필요조차 없다. 내가 아니어도 된다. 결국 자기가 산대로 나타나고 이어질 뿐이라는 걸 알겠다. 맞게 하면 그 뿐. 소속감이란 단지. 다를 거라 기대했다. 물론 주어진다면 아마 목숨을 바칠 여지는 남아있다.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기질을 탓한다. 바로 거기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단 한 명을 구하기 위한 여러 명의 목숨을 건 탈출기.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기대는 없었다. 세 명의 아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대명제로부터 출발했다. 그리고 이제 '신이라고 불려도 마왕이라고 불려도'에서 소녀의 처지 혹은 역할, 또는 그의 선택을 존중하게 되었다. 섣부른 개입과 관심은 큰 파장을 일으킨다. 파장 자체의 문제 라기 보다는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처할 수 있음을 뜻한다. 가령, 불을 피우기 시작하는 시기에 개입할 수 있었고, 전쟁 혹은 발달기에 개입할 수 있었다. 관조하듯이 TV를 바라보고만 있다는 건 어쩌면 분명한 입장 정립이 아니었다면 무척 힘든 일이 될 법하다. TV를 바라본다는 건 생각 만큼 어렵지 않게 해내고 있음을 볼 때, 다를 거라 보는 시점과 달리 대하는 자세의 차이에서 비롯됨을 알겠다. 그래 그랬구나 하는 인정이다. '생존학 개론'에서 보는 빅터의 상태는 여러 제반여건, 가령 아내 줄리아를 잃었다는 설정에서 그 만한 동력으로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개인의 노력을 극대화 시켜 대비시킨다. 굳이. 왜. 이런 물음을 끊임 없이 던진다. 존재론이나 앤솔로지 같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듣는 유투브 영상을 통해 TV를 바라보는 것인지 궁극에의 탐구인지 그저 그런 건지 결국 별다를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가치를 매긴다. 다르지 않음을 알겠다.


3.
삶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며, 장소나 조건의 변화는 본질적인 변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기대를 품으며, 스스로의 감정과 태도를 조율하려 노력한다.

삶은 본질적으로 반복되고 평이하며, 스스로에게 부여한 의미만이 그것을 견딜 수 있게 만든다. 개입도, 비교도, 갈망도 줄이고 싶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마음은 요동치고, 여운이 남는 감정과 상념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지금 이대로의 삶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거기서 나의 몫을 충실히 수행하려는 태도, 그것이 이 글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4.

《달라질 건 없다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장소가 바뀌어도, 날이 저물어도
삶은 여전히, 익숙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남보다 낫지도 못하지도 않다며
사람들은 스스로를 납득하고
나는 내게 주어진 조각들을
그저 맞춰가는 것뿐이다.

하지 못한 것에 마음이 쏠려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흔들리는 마음도 나인 것을
이젠 알겠다.
굳이 막지 않아도 된다.

때로는 내가 아니어도 된다
그 자리에 누가 있든
그의 몫대로, 내 몫대로
살아낸 대로 남을 테니까.

소속감이라 쓰고, 바람이라 읽는다
다를 줄 알았다
아마 진심을 다해 다가갈 여지는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태생을 탓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다 어느 날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이해되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여러 사람의 삶이 기꺼이 던져지는 세계
그건 사랑일까, 명령일까, 체념일까.

그리고 깨달았다
섣부른 개입은 누군가의 운명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걸
불을 피우는 시기에 바람을 넣는 것처럼
작은 관심이 전부를 바꿀 수 있음을.

TV를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그저 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님을
그리고 그 다름은
태도의 문제였음을.

맞아, 그랬구나.
이제는 말없이 인정한다.
무엇이든, 왜 그런가 묻고
그 안에서 나만의 의미를 찾는다.

끝내 깨닫는다
다르지 않다는 것을.
삶은 그저 삶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5.

🌾 조용한 마음으로 흐르는 하루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밖의 나무는 여전하고,
물 내리는 소리, 커피 내리는 냄새,
식탁 위 어제 먹다 남은 과일 한 조각조차도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제자리를 맴도는 일들이 더 많다.
바뀌지 않는 것들에 대해
예전엔 종종 발끈했지만
이제는 그럴 힘도 굳이 내고 싶지 않다.

누가 뭘 가졌든,
어디로 갔든,
나는 나에게 주어진 것을 하고 있다.
그래야 하루가 조금이라도 덜 흐트러지니까.

비교하고 싶을 때가 없진 않다.
왜 저 사람은 저걸 가졌고
나는 이걸 하고 있는가 하는 마음이
슬쩍 고개를 들지만
잠깐, 그냥 지나가게 둔다.

다들 만족하려 애쓰는 게 보인다.
잘 살고 있다 말하며,
그럴듯하게 이유를 붙이며
이만하면 괜찮다고,
자기 삶을 끌어안으려 한다.

나도 그런가 보다.
딱히 대단한 무언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오늘 하루 안 무너지면 좋겠다.
마음이 덜 흔들리면 좋겠다.

하지만 흔들려도 괜찮다는 걸
요즘은 안다.
좀 덜 단단해도 괜찮고,
때론 내가 아니어도 되는 시간도 있다.

자리를 비우고 싶은 날,
내가 내 자신에게조차 부담스러운 날,
그냥 그늘 속에 있어도 된다.

누구는 소속감을 말한다.
어딘가에 속하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나는, 속해 있는 듯해도
사실은 바깥을 바라보는 일이 익숙하다.

간절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무언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는 날도 많다.

기질이 그런가 보다.
어릴 적부터 불쑥 튀어나오던 그 마음이
아직도 어디선가 나를 들쑤신다.
이제는,
조금은 다독일 줄 안다.

영화 한 편이 그런 마음을 닮아 있었다.
수많은 죽음 끝에 단 한 명을 살리는 이야기.
그게 과연 옳은가, 말이 되는가,
물으면서도
속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에겐
살아남는 것이 전부니까.
누군가에겐
지키는 것이 다니까.

누군가의 삶에 개입한다는 것,
그게 얼마나 큰 흔들림을 주는지,
조심스럽게 알게 되었다.

TV를 멍하니 보며
생각이 흐른다.
굳이 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당장 모르겠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건 아니다.

보는 일만으로도
참 많은 것을 견디고 있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된다.

예전엔 나서고 싶었던 장면들,
지금은 그냥 흘려보낼 줄 안다.

누가 불을 지피든,
누가 싸움을 시작하든,
그때마다 내가 나설 필요는 없다.
지켜보는 자리에도 온도가 있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세상이 끝난 뒤에도 한 사람은 살아남는다 했고
그게 꼭 불행한 건 아닐 수 있다고 했다.
살아 있다는 건
남겨진 자의 몫을 이어가는 일이니까.

무너진 것들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마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왜 그런가, 왜 나는 여기에 있나,
이유를 물으며
오늘도 커피를 내린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
창밖을 본다.
어제와 같은 나무,
익숙한 바람.

그렇다,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받아들이게 된다.

별일 없는 하루가
사실은 기적 같은 날이었다는 걸
뒤늦게야 알아차리며. 김성호 E/ ChatG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