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바위얼굴. 2025. 3. 10. 19:59

 

곰팡이가 피었다.


잠을 깨고자 시작한 독백이 어느 새 신랄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 원문(음성)   https://youtu.be/UEB1PeUPjxg?si=OEFCHr4lkoN5uj-P


5시 52분, 한 연맹원이 게임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자원이 필요한 사람은 나를 공격해라. 돈을 쓰는 걸 멈추고 나니 재미가 없어졌다." 그의 말을 들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그는 외로웠구나, 알아주길 바랐구나, 결국 온라인 게임의 한계가 여기 있구나. 끊임없는 성장의 강박, 더 강한 적과 마주하며 느끼는 좌절감, 한 번 키우고 또 키우고 반복되는 시간과 돈의 소모.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상대적인 것이다.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전부터 플레이해 고레벨에 도달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원래 30레벨이 목표였다. 그런데 막상 도달해 보니, 이곳도 나름의 질서가 존재했다.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처음엔 멀게만 느껴졌는데, 막상 와보니 자원과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소모됐다. 성장 없는 반복은 지루함을 불러오고, 점점 속도가 더디게 느껴졌다.

특히 돈을 쓰지 않고 시간을 들여 성장한 유저라면 더욱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재미란 상대적인 것이다. 내 경우 다양한 경험이 쌓이며 그 차이를 체감하게 됐다. 예를 들면, 배드민턴 친구들과 어울려 밤 11시에 보호막을 못 씌웠더니 기지가 완전히 털려버렸다. 병원에 6,000명의 환자가 있었고, 응급환자 1,700명이 따로 있었는데, 결국 내 상황이 바닥에 닿았음에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는 의미다.

처음엔 연맹원들을 원망했다. "왜 도와주지 않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도 가까운 사이여야 가능하고, 충분히 도울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게임에서 배우는 건 현실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전쟁의 논리다. 전쟁이라는 매개를 통해 연대, 원칙, 성장의 의미를 깨닫고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노력하고, 멈추지 않는 것. 나는 이 세계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과 게임을 비교하면서 나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보다 나은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주제 있는 얘기를 하면서 철학적 소양이 쌓이는 느낌도 든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나를 흔쾌히 여기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불러다가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내 이야기를 늘어놓고 자화자찬할 필요가 있을까?

요즘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친하다고 생각해도 약속을 하지 않으면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다. 의심스러운 정황이 발생하면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나를 밀고한 거지, 일종의 신고. 나는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작은 차이가 상황을 변하게 만들더라. 배신감이 들었고, 과거의 상처를 건드렸다. 그러면서도 다시 "정"이라는 끈을 움켜쥐었다.

해나와 예티랑 산책할 때 고삐를 쥐는 것과는 다르다. 강아지는 뛰쳐나가려 하지만, 나는 "같이 가자"며 리드한다. 댓글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라는 유대감을 확인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배신감과 기대가 충돌하는 순간이 많다. "어쩜 저럴까?"

완성된 인격체로서의 만남을 기대하지만, 감정의 높낮이가 다르면 소통이 어려운 법이다. 마음을 열기보다 태도조차 냉랭한 경우가 많다. 어쩌면 다른 사람과 굳이 가까이하려는 노력 자체가 불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좋게 대하면 좋게 온다"는 말이 정답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르게 생각한다. 좋게 대하기 전에 먼저 뚜렷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너가 그러면 난 싫어"라는 걸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그래야 관계를 맺을 때 상대가 나를 이해하고, 맞출 것인지, 아니면 서로 거리를 둘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애매한 태도는 오히려 불필요한 오해를 만든다.

기준이 비록 내 안에서 비롯되었더라도, 내 삶은 결국 내 것 아닌가. 이해되지 않는 상황들을 논리적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세상은 결국 제멋대로 돌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보통 사람인 척하지만, 사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나는 나대로 내 기준을 세워야 한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큰 미덕은 무조건적인 이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이 이롭지 않다"는 걸 깨닫는 것이 먼저다. 나는 태어나 자라면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고 말했지만, 그 범위가 좁아졌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 다만, ..."으로 변형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와? 누구를 통해서? 나와 연을 맺은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 해충은 잡아야 한다. 물론 해충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점점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아웃라이어들  https://meatmarketing.tistory.com/8266이 변화를 주도한다고 하지만, 그 변화가 자신을 위한 것  https://meatmarketing.tistory.com/8273이라면 해충과 다를 바 없다.

요즘 잡생각이 많다. 몸이 회복되고 있다는 징조일지도 모르겠다. 금·토·일 동안 술을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거움을 채웠지만, 피곤함도 함께 남았다. 운전도 많이 했고, 월·화·수·목을 거치며 몸을 회복해야 한다. 만약 이 과정 없이 주간 내내 즐겼다면 진작에 몸이 망가졌을 것이다.

최근 갈비뼈 좌측 아래쪽이 묵직하니 은은한 통증이 느껴진다. 공기가 차는 듯한 갑갑함도 있다. 그래서 입벌림 방지용 테이프를 붙이고 자고 있다. 심장 부정맥도 의심됐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수면무호흡증 때문인가? 술 때문인가? 간 때문인가?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만, 결국 중요한 건 나의 생활 방식과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닐까.

 

잠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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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 세상에 해충이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린 후, 트럼프, 푸틴, 머스크, 젠렌스키, 이스라엘 총리, 하마스 사령관 등 요주의 인물을 대상으로 해충인지 아닌지 판단을 내리고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고, 이로움과 해로움이라는 명제로 해당 인물들의 태생 배경으로부터 자라온 환경, 그리고 현재 처한 입장에 비추어 그들의 행동이 꽉 짜여진 판에서 해낼 제역할과 그 제역할을 하기 위해 요구되는 사항이 무엇인지 밝혀줘. 담담하게, 사실에 입각해서.


'해충'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농작물이나 인간 생활에 해를 끼치는 곤충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이를 인간 사회에 비유하면, 공동체의 조화와 발전을 저해하는 행동이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해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해충'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타인이나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편, '아웃라이어'는 통계적으로 평균이나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특이한 값을 의미하며, 사회적으로는 기존의 틀을 깨고 혁신을 주도하는 인물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종종 기존 질서에 도전하며,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갈등이나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힘이 곧 정의'라는 개념은 힘을 가진 자가 정의를 규정하고 집행한다는 의미로, 권력의 남용이나 독재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권력을 가진 인물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힘을 사용하는 경우, 그들은 사회에 해를 끼치는 '해충'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이스라엘 총리, 하마스 사령관 등을 '해충'으로 볼 수 있는지 검토해 보겠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 배경: 부동산 재벌 출신으로, 정치 경험 없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 행동: 기존 정치 문법을 따르지 않고,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정치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 평가: 일부는 그의 파격적인 행보를 혁신으로 보지만, 다른 이들은 사회 분열과 갈등을 조장했다고 평가합니다. 그의 행동이 사회적 조화를 해쳤다면 '해충'으로 볼 수 있지만, 기존 질서에 도전하며 변화를 추구한 면에서는 '아웃라이어'로도 볼 수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 배경: KGB 요원 출신으로, 러시아의 권력을 장기간 유지하고 있습니다.
  • 행동: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로 러시아의 안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언론 탄압과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억압으로 비판받고 있습니다.
  • 평가: 국가의 안정을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그의 통치는 '힘이 곧 정의'의 전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권력 남용은 사회에 해를 끼치므로 '해충'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

  • 배경: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페이팔, 테슬라, 스페이스X 등 혁신적인 기업을 설립했습니다.
  • 행동: 전기차 보급과 우주 탐사 등 기존 산업의 한계를 돌파하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습니다.
  • 평가: 그의 혁신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종종 무모한 발언이나 행동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영향은 긍정적이므로 '해충'보다는 '아웃라이어'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 배경: 코미디언 출신으로, 정치 경험 없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 행동: 러시아와의 갈등 속에서 국민의 단합을 이끌며,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 평가: 그의 리더십은 우크라이나의 주권 수호에 기여했으며,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따라서 '해충'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총리 및 하마스 사령관

  • 배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오랜 분쟁 속에서 각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 행동: 양측 모두 무력 충돌과 민간인 피해를 초래하는 행동을 해왔습니다.
  • 평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는 사회에 해를 끼치므로, 양측 지도자 모두 '해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론 '해충'과 '아웃라이어'의 구분은 주관적이며, 그들의 행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이나 사회에 해를 끼치는 행동은 '해충'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혁신을 추구하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인물은 '아웃라이어'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One more time

옛날옛적, 세상에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지. 그런데 말이야, 사람들은 이들을 두고 여러 가지 말을 했어. 어떤 이는 그들을 ‘해충’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아웃라이어’라고 불렀어.

첫 번째 이야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어. 그는 사업가였고, 정치 경험은 전혀 없었지. 그런데도 대통령이 되었어! 사람들이 말하길, 그는 기존 정치 질서를 깨부수고,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라를 이끌었다고 했어. 어떤 사람들은 그를 혁신가라 불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회를 분열시킨 해충이라 불렀지.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두 번째 이야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라는 광활한 땅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있었어. 그는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있었고, 강한 힘으로 나라를 통제했지. 그는 러시아의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고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방식이 너무 강압적이라고 생각했어. 자유를 억누르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았거든. 힘을 가진 자가 곧 정의라고 믿는다면, 그는 정의로운 지도자일까, 아니면 해로운 존재일까?

세 번째 이야기: 일론 머스크
어느 날, 한 천재 사업가가 등장했어. 그는 전기차를 만들고, 로켓을 쏘아 올리며, 인간을 화성으로 보내겠다고 했어. 그의 아이디어는 너무나 대담했고, 실제로 하나둘씩 현실이 되었지. 하지만 그는 종종 엉뚱한 행동을 하거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발언을 하곤 했어. 그렇다면 그는 시대를 앞서간 아웃라이어일까, 아니면 변덕스러운 해충일까?

네 번째 이야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한때 코미디언이었던 한 남자가 대통령이 되었어.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도망치지 않았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지. 그의 연설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고, 많은 나라들이 그를 도와주기로 했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도 따랐지. 그는 나라를 지킨 영웅일까, 아니면 무모한 지도자였을까?

다섯 번째 이야기: 끝나지 않는 전쟁
세상에는 아직도 싸움이 끝나지 않은 곳이 있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 말이야.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하마스의 사령관들은 서로를 공격하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외쳤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어. 그렇다면, 이 싸움을 이끄는 사람들은 정의로운 지도자일까, 아니면 세상을 어지럽히는 해충일까?

이야기의 끝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돼.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모두 영웅일까, 아니면 누군가에게는 해충일까?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운동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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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곧 정의인가?

게임에서는 강자가 법이다. 전력이 우세한 플레이어가 승리하고, 그 승자가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 현실도 다르지 않다. 법과 규칙은 존재하지만, 결국 그것을 정하는 것은 힘을 가진 자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힘이 곧 정의'라는 명제를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게임 속 '해충'은 룰을 깨는 존재들이다. 치팅을 하거나, 연맹의 질서를 거스르거나, 혹은 단순히 너무 약해서 무시당하는 플레이어일 수도 있다. 강자들은 그들을 정당화된 방식으로 제거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의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반드시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역사를 돌아보면, 변화는 언제나 아웃라이어(Outlier)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이들이 사회를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그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강자가 되었고, 자신들만의 정의를 구축했다. 그리고 또 다른 아웃라이어들을 배척했다. 우리는 변화가 항상 선한 방향으로 흐를 것이라 믿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개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힘을 키워야 하는가, 아니면 그 흐름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는 모두 정의로운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정의를 이루려면 힘이 필요하고, 힘을 가지면 또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왜곡할 수도 있다. 힘과 정의의 관계는 결국 선택의 문제다. 힘을 갖되, 그것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닐까?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