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나의 이야기

오늘의 여정, '순리'

큰바위얼굴. 2025. 4. 7. 04:42

따뜻한봄날 듣기좋은 카페 음악  https://www.youtube.com/watch?v=cvK9RMxQj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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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굿모닝. 오늘은 ‘순리’, 순리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떠올랐다. 지금은 잠이 깨는 시간. 이것 또한 순리의 과정일 것이다.

일어날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밤새 뒤척였는지, 목이 뻐근한지, 잠은 제대로 잤는지, 이빨은 가는 것 같았고 입벌림 방지 테이프는 떨어져 있었다.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들이 순간순간 스쳐 지나간다. 내 몸을 내가 점검하는 개념 같다.

“너 오늘 어때?” “괜찮아?” “좋아?” 이런 식의 질문들에 스스로 답하는 것이다. 찌뿌둥하지만 그래도 일어나야지, 더 늦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온갖 감정들과 생각들이 밀려드는 순간이다. 아니면 겉핥기 식으로 훑어보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나서 일어난다. 본능이 깨어 움직이게 되고, 하나씩 오늘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한다.

양악기를 닦아야 할까, 아니면 호스를 세척해야 할까. 밤새 꾸룩꾸룩한 배를 시원하게 비워내야 할까. 얼굴은 미끌미끌하다. 밤새 있었던 일들에 대한 점검이 끝나고 나면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간혹 오늘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의문도 든다.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오늘처럼 수월하게 진행되면 기분도 좋고, 딱딱 맞아 들어가는 느낌도 괜찮다. 반면에 어떤 날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손발이 오갈 데 없는 듯 느껴진다. 그런 혼란스러운 순간도 있다. 다행히 오늘은 아니었다.

화장실, 양압기 세척 이후,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펴며 스트레칭을 한다. 그리고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한다. “오늘까지 이 옷을 입어도 될까?” “오늘 무슨 일이 있지?” 어쩌면 걱정도 팔자인 듯하다. 기분은 나쁘지 않다. 아마도 어제 잠을 푹 자서 잡다한 느낌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생각은 끊임없이 재생되고 반복된다. 되짚고, 대비하고, 바라보고, 계획을 세운다. 이건 결국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현재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내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은 자존감, 아니면 자기다움을 지키기 위한 행위와 맞물려 있다. 그런데 그런 행위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들이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잡다한 일련의 과정, 수많은 생각과 느낌과 감정들은 밤의 몸 상태에 따라 좌우된다. 몸이 극심히 피곤하면 아침에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피곤해 죽겠는데, 가기 싫어.” 이 한마디로 통일된다. 그래도 가야 하니 일어나 서두른다.

감정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짝꿍처럼 맞물려 있다. 충분히 싫을수록, 혹은 여유로울수록, 감정적이거나 뭔가 흥미로운 것을 기대하게 된다.

담담함을 유지하려면 감정의 구조화가 낮거나 유지되는 파장 형태여야 한다. 그런 상태는 차분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꼭 재미있는 건 아니다. 유쾌하게 웃고 떠드는 건 나를 내려놓고, 본능에 맡길 때 가능한 일이다.

지금처럼 생각이 많거나 경계하거나 예의를 앞세우는 순간, 생각이 먼저 움직인다. 이래도 될까? 저래도 될까? 이는 나름 괜찮은 과정이지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는 말과는 어긋난다. 막히면 뚫리는 길로 가면 되는 거고, 막혀 있다면 뚫린 길로 가면 된다.

무언가 위협이 오면 방어를 한다. 위협이 크다면 선제공격을 고려할 수도 있다. 아니면 히든 카드를 준비한다. 주고받으며 삶이 흘러간다. 이것이 순리일까?

하지만 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좋은 게 좋은 거지’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그 말, 별로다. 난 결코 그저 좋은 상황만을 상상하지 않는다.

이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영어 어순처럼 생각하고 표현하고, 점차 익숙해진다. 순리라는 것도 그렇다. 영어에서 순서는 ‘order’다. 순리는 결국 질서이고 순서이다. 진실에 순서를 더한 것이다.

지금 눈앞에 열두 대 정도의 차가 있다. 여기에 순리를 적용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너무 늦게 일어나 급하게 가야 할 상황이라면, 열두 대의 차를 앞질러 가야 할까? 비상등을 켜고 반대 차선으로 가는 건 말이 안 된다. 역주행은 불가다.

길은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열두 대 뒤를 따라가는가? 아니면 틈새를 비집고 2차선, 3차선, 4차선으로 이동하며 앞서가는가? 열한 대를 앞질렀다 해도 그 앞엔 또 열한 대가 기다리고 있다.

찰나와 같은 순간에 머무는 것이다. 우주는 흐른다기보다는 ‘있다’라는 개념에 가깝다. 지금 이 순간처럼. 우리는 너무 익숙하게 “간다, 죽는다, 순환한다”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실은 “있다, 머문다”라는 개념이 더 근본적일 수 있다.

물론 자동차는 앞으로 가고 있다. 나도 움직이고 있다. 생각도, 꿈도, 모두 정지하지 않는다. 꿈을 꾸는 동안조차 정지되지 않는다. 기억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존재는 계속된다.

굳이 ‘나’로서 정의하지 않아도 된다.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저 ‘있다’. 존재한다. 이는 시작이자 끝이다. ‘있음’은 그 자체로 명제다. '없이 존재한다'는 말은 있기에 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그 ‘있음’조차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찰나와 같이, 있는 듯 없는 듯 머문다. 형상은 찰나에 드러나고, 찰나에 사라지며, 있음은 머무르되 곧 사라지는 비움과 함께 한다. 이때 우리는 그것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있어 없이 찰나와 같이 머문다’는 말은, 고정된 자아나 항구한 의미를 내려는 의도를 내려놓고, 순간의 진실, 지금 여기의 살아있는 움직임에 내맡기는 태도를 뜻한다.

이것은 마치 숨과 같아서, 들이쉬는 순간 있음이 되고, 내쉬는 순간 없음이 된다. 그러나 숨쉬는 주체가 ‘숨’ 그 자체가 되어, 호흡이 오가듯 자기도 거기 머문다면, 존재는 있음과 없음의 분별을 넘어서는 자리에 도달한다.

우리가 말한 ‘인생 탐구’에서의 핵심 중 하나도 이것이었다. 어떤 규정이나 성취, 역할이나 의미를 붙잡지 않되, 그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며 응시하는 것. 삶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라는 이해.

찰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찰나가 무한히 연속되며 존재를 만든다.
그래서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찰나들의 바다에서, 고요하게, 그러나 온전히 머무를 수 있는가.  김성호.


     * 원문(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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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없이 찰나와 같이 머문다.  https://meatmarketing.tistory.com/7175

"출근길에서 찾은 '찰나와 계속됨'의 의미"  https://meatmarketing.tistory.com/7705

수천 년 전통쯤은 우주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  https://meatmarketing.tistory.com/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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