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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세상보기

빛이 닿기 전

by 아리빛 하나 2026. 5. 18.

어쩌면 나는 유리알 유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가 그려낸 그 유리알 유희처럼 — 모든 개념을 정교하게 배열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 그 탐구를 또 탐구하는 일.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이 작업을, 새벽마다 차 안에서, 출근길 도로 위에서, 만두가 식어가는 조수석 옆에서 혼자 이어가는 일. 뭔가를 밝히려는 것인지, 밝히는 척하며 어딘가에 머물려는 것인지 — 나도 모른다.

그래도 계속한다.

그게 이상한 일이기는 하다.


처음에는 거울이었다.

거울을 바라보다가 문득 불편해졌다. 아니, 불편함이라기보다는 — 반감이었다. 거울이 나를 자꾸 정의내리려 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나라고, 그게 전부라고 말하는 듯했다. 표면이 본질을 대신하는 그 순간 — 나는 거울을 치우고 싶었다.

그런데 치울 수가 없었다.

나를 보려면 거울이 필요했다. 거울 없이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 그 단순한 사실이 생각보다 묵직했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만 자신을 볼 수 있다. 자신을 직접 볼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을 알려면 무언가에 비추어야 한다. 그 무언가가 거울이었다가, 사람이었다가, 관계였다가, 세상이 된다.

"너에게 나는 뭘까?" 라는 질문은 그렇게 태어났다.

강아지 예티와 해나를 데리고 산책하던 아침, 아직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채. 그는 나를 비추어주지 않는다고 느꼈다. 아니 — 비추어주기는 하는데,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주지 않았다. 내가 기대했던 상이 거울에 맺히지 않았다. 그 섭섭함. 그 분노. 그 허탈함.

그런데 한참 걷고 나서 깨달았다.

거울이 내가 원하는 대로 비추어줄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미 틀려 있었다. 거울은 왜곡하지 않는다. 거울은 그냥 비춘다. 내가 원하는 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 그것은 거울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상 자체가 허상이었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더 이상 거울처럼 나를 비추는 모습이 꼭 나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 문장을 쓰고 난 뒤, 무언가 조금 가벼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거울은 필요하다.

이것이 역설이다. 나를 정의하는 거울은 필요 없지만, 나를 비추는 거울은 필요하다. 이 둘의 차이가 처음에는 보이지 않다가, 오래 걷다 보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정의는 닫는다. 비춤은 보여준다. 닫히지 않으면서 보이는 것 — 그게 내가 원하는 거울이다.

거울이 나를 비추지 않아도 거울이듯, 인정받지 못하는 나도 나다.

그리고 거울의 역할은 비추는 것이 아니라 — 비추고자 하는 것에 있다. 닿았는지가 아니라, 나간 것에 있다.

이 생각이 나중에 공명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된다.


그 전에, 우주가 있었다.

차 안에서, 히터를 틀어놓은 12월 아침, 운전대를 잡고 중얼거렸다. 우주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빅뱅이 시작이라면,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없음이 있었을까. 그런데 없음이라는 것을 말하는 순간 — 없음은 이미 존재한다. 없음을 떠올리는 나의 인식이 없음을 무언가로 만들어버린다.

이 함정이 재미있었다.

점이라는 게 뭐냐, 라고 물으면 — 부분이 없는 것이라는 답이 나온다. 그런데 부분이 없다는 것을 말하려면 이미 부분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한다. 선이나 면을 전제해야 점을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점 자체만을 순수하게 가리키는 정의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주의 시작도 그렇다. 시작을 말하려면 시간이 있어야 한다. 시간이 있다는 것은 이미 시작 이전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시작 이전이 있다면 그것은 시작이 아니다.

이 무한 후퇴를 멈추려면, 뭔가 다른 방향으로 가야 했다.

그래서 없다를 정의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다를 정의하기로 했다. 없다는 이미 있다를 전제한다. 없다는 있다의 반대가 아니다. 없다는 있다에 의존한다. 그러니 없다를 탐구하는 것은 돌아서 있다를 탐구하는 일이다.

있다는 무엇인가.

가만히 있으면 썩는다. 있게 된 순간부터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구멍이 나고, 빨대가 꽂히고, 흐름이 생긴다. 은하도, 감정도, 생각도 — 있게 된 순간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주는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소멸 방향이 아니라 순환 방향으로.

없어진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없어진다면 — 우리가 이 논의를 할 필요도 없다. 없어지면 우리도 없고, 논의도 없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있음의 증거다.

그러니 있다.

그냥, 있다.


생명이 그 다음에 왔다.

생명은 우주의 연속적이고 불가피한 춤이다. 목적이 있어서 사는 게 아니다. 살아있으니까 움직이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이미 목적이다. 왜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 것은, 흐르는 물에게 왜 흐르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인간만이 그 질문을 한다.

흐르는 물은 흐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흐름에 대해 묻지 않는다. 인간만이 자신의 흐름을 인식하고, 그 흐름에 의문을 품고, 그 의문을 표현한다. 이 능력이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 이 능력이 인간을 인간이게 만든다.

감정이 거기서 나온다.

감정은 우주와 인간을 연결하는 본질적 에너지다. 별빛이 공간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도달하듯 — 감정은 보이지 않는 연결이다. 이성의 틀 안에서 변수로 작용하지만, 이성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온다. 이성은 물리 법칙이고, 감정은 그 법칙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슬프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기쁨이 무엇인지 안다. 외롭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연결이 무엇인지 안다. 두렵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용기가 무엇인지 안다. 감정은 이분법적이 아니다. 감정은 스펙트럼이고, 진동이고, 파동이다.

파동이 파동을 만나면 — 공명이 일어난다.


공명.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 아, 이거다, 라는 느낌이 왔다.

공명은 감정이 아니다. 공명은 판단이 아니다. 공명은 의지도 아니다. 두 개의 파동이 같은 주파수에서 만날 때 — 서로를 증폭시키는 현상. 그것뿐이다. 감정에 기반하지 않은, 그저 파장을 주고받는 관계.

공감과 다르다. 공감은 이해를 전제한다. 내가 너를 이해해야 공감이 생긴다. 그런데 공명은 이해하지 않아도 일어난다. 같은 주파수에 있으면 — 의도하지 않아도 함께 진동한다.

이것이 관계의 본질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 어떤 사람을 만나면 오래 말하지 않아도 통한다고 느끼는가. 왜 어떤 글을 읽으면 내가 쓴 것처럼 느껴지는가. 왜 어떤 풍경 앞에 서면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가. 설명이 되지 않는 연결들. 이해가 없는 연결들. 그것이 공명이다.

우주는 공명으로 작동한다.

원자가 에너지를 흡수해서 전자가 다른 궤도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면서 빛을 방출한다. 그 빛이 다른 원자를 만나 또 다른 공명을 일으킨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물질이 생기고, 구조가 생기고, 생명이 생긴다. 우주는 공명의 연쇄다.

내가 이 아침에 혼자 중얼거린 이 말들도 — 어딘가에 파동으로 나간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 90만 번이 닿는다. 그중에 몇이 공명했을지 모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공명은 많을 필요가 없다. 하나의 음차가 울리면, 같은 주파수의 음차는 방 건너편에 있어도 함께 울린다.

나의 파동이 세상을 향해 나갔을 때 돌아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관계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도 공명이다 — 다만 아직 닿지 않았을 뿐.

우주는 억지로 연결되지 않는다. 공명하는 것들이 만날 뿐이다.


그런데 공명은 찰나에서 일어난다.

찰나가 무엇인지 오래 생각했다.

영화는 필름을 이어 붙인 것이다. 1초에 24장의 정지 화면이 지나가면 우리는 움직임을 본다. 움직임은 실제로 없다. 정지된 상들이 빠르게 교체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교체를 연속으로 경험한다. 연속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 위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삶도 그렇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이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다음 순간이 올 것이다. 그것은 예측이다. 이전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기억이다. 우리가 연속이라고 부르는 것은 — 사실이 아니라 기억과 예측의 편집이다. 지금 실재하는 것은 이 찰나뿐이다.

블록 우주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지도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지도 위를 걷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이 한 점에 있다. 지도와 점은 다르다. 지도는 전체를 보여주지만, 지금 이 발걸음의 감각을 줄 수 없다.

찰나는 연속의 부분이 아니다. 연속이 찰나들의 착각이다.

그러나 이 말이 허무주의를 낳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찰나뿐이라는 것이 — 지금만 있으면 된다는 방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대다. 찰나뿐이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더 결정적이다. 파동은 지금 이 순간에 발생한다. 파동은 다음 순간까지 이어진다. 이 순간의 파동이 다음 찰나의 공명을 결정한다.

찰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파동으로 남는다. 그것이 공명이다.

찰나와 공명은 쌍이다. 찰나가 없으면 공명의 발생 지점이 없고, 공명이 없으면 찰나는 고립된 점이 된다. 이 둘이 만나는 곳에서 — 블록 우주론이 진짜로 깨진다. 연속처럼 보이는 이유는 찰나들이 공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있는가.

이 질문을 처음으로 직접 물었던 아침을 기억한다.

어떻게를 뺐다. 왜를 뺐다. 언제를 뺐다. 무엇을을 뺐다. 어디를 뺐다. 우주를 뺐다. 소거가 끝나고 남은 두 단어가 — "나는"과 "있다"였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물음표를 붙였다. "나는 있는가?"

이것이 반항이었다.

왜 반항인가. 왜냐하면 남은 두 단어를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데 — 다시 의심했기 때문이다. 소거가 끝났어도 소거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도 소거해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다. 그리고 "있는가"라고 물어서 "있다"마저 의심했다.

이 의심이 곧 답이다.

우주의 어떤 입자도 "나는 있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바위는 묻지 않는다. 강은 묻지 않는다. 별은 묻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묻는다. 그 물음 자체가 — 내가 있다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다.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한 존재라고 했다. 그것이 맞다. 규모로 보면 그렇다. 우주의 나이 138억 년 중에 내가 사는 80년은 — 무한 속의 먼지보다 작다. 내 몸을 이루는 원자들이 전체 우주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 계산이 무의미할 만큼 작다.

그러나 작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 내가 이 세상을 경험하는 한, 이 세상은 나를 통해서만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는 우주는 — 나에게 있어 — 없는 것과 같다. 내가 눈을 감으면 내가 아는 이 세상은 사라진다. 그러니 이 세상은 나로부터 펼쳐진다. 규모가 아니라 발생의 문제로.

이것은 교만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의 구조다.

나는 우주의 부품이지만, 이 세상은 나로부터 펼쳐진다. 우주의 크기가 나를 규정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하는 한, 이 세상은 나의 세상이다.

나는 있다. 작기 때문에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묻기 때문에 의미 있다.


그렇다면 있다는 무엇인가.

어떻게, 왜, 언제, 무엇을, 어디, 나, 우주 — 이 모든 것을 소거한 뒤에도 남는 것.

있다는 소거된 모든 것의 총합이다.

없기 때문에 있는 게 아니라 — 모든 게 있기 때문에 있다. 있다는 정의는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 뺀 모든 것이 — 있는 것이다. 어떻게도 있고, 왜도 있고, 언제도 있고, 무엇을도 있고, 어디도 있고, 나도 있고, 우주도 있다. 그 모든 것이 함께 있는 상태 — 그것이 있다.

그런데 우주에서 있다를 빼면 무엇이 남는가.

없다가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가 남는다.

이 두 개의 차이가 중요하다. 없다는 있다의 반대다. 있었다가 사라졌다는 전제를 가진다. 아무것도 아니다는 — 그 전제조차 없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묻는 언어 이전의 상태. 이름 붙이기 이전의 상태. 정의하기 이전의 상태.

노자는 말했다. 도가도 비상도 —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그 이름 붙이기 이전의 것. 성호 씨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불렀던 그것이 — 노자가 도라고 불렀던 것과 가까운 곳에 있다. 다른 전통에서는 공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전통에서는 브라흐만이라고 불렀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 —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이 아닌 것이 된다.

그래서 성호 씨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그 솔직함이 어쩌면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빛이 닿기 전.

빛이 닿으면 모습이 보인다. 색깔이 생긴다. 형태가 드러난다. 그림자가 생긴다. 방향이 생긴다. 구분이 생긴다.

빛이 닿기 전에는 — 모든 것이 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있기는 있다. 그러나 아직 이름이 없다. 아직 형태가 없다. 아직 구분이 없다. 그렇다고 없는 게 아니다.

이 시리즈 전체가 — 빛이 닿기 전의 것들을 더듬어 가는 여정이다.

거울이 나를 비추기 전의 나. 감정이 이름을 갖기 전의 파동. 생명이 목적을 갖기 전의 흐름. 우주가 시작을 갖기 전의 상태. 나라는 단어를 붙이기 전의 존재. 있다는 정의를 내리기 전의 그것.

이것들을 더듬어 간다고 해서 도달한다는 보장은 없다. 아마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빛이 닿기 전의 것은 — 빛이 닿는 순간 이미 빛이 닿은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언어가 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더듬는다.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더듬는 행위 자체가 이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는 것이 바로 이 더듬음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묻고 있을 때 — 나는 가장 나답게 있다.


이것이 수양이다.

답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다. 수양은 — 이렇게 앉아있는 것이다.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더듬고 있는 것이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며 느꼈던 것이 그것이었다. 예식의 반복, 찬송의 반복, 일어나고 앉는 반복 — 그것이 숭배라기보다 자신과의 교감이었다는 것.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중요했다는 것. 같은 몸짓을 반복함으로써 마음이 잔잔해지고, 너그러워지고, 안락해진다는 것.

운전하면서 혼자 말하는 것도 그렇다.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말들이 어딘가 닿을 것을 기대하지 않아도 — 말하는 것 자체가 이 사람의 방식이다. 파동이 나간다. 공명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파동은 나갔다.

그게 전부이고, 그게 충분하다.


어쩌면 이것은 유리알 유희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개념들의 배열. 아무도 검증하지 않을 명제들의 연쇄. 이것이 세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비밀을 밝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누군가의 삶을 직접적으로 달라지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유리알 유희를 하는 사람은 — 그 유희 속에서 가장 온전히 존재한다.

헤세의 소설 속 유리알 유희 대가가 결국 세상으로 내려온 것처럼 — 이 사유도 결국 일상으로 돌아온다. 만두가 식어가고, 사과를 먹고, 두유를 마시고, 홍삼 액기스를 잊어버리고, 예티와 하나에게 밥을 챙기고, 셋째 아들의 등교를 챙기고, 배드민턴 친구들과 웃고, 아내와 티격태격하고 — 그 모든 일상 속에서 이 사유가 녹아있다.

사유가 일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 사유가 일상이다. 일상이 사유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이 없을 때 — 거울이 나를 표면화하지 않을 때처럼 — 뭔가 편안해진다.


나는 있는가.

있다.

작기 때문에 의미 없는 게 아니라 — 묻기 때문에 의미 있다.

거울 없이 나를 볼 수 없지만 — 거울이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

찰나만이 존재하지만 — 찰나는 파동으로 남는다.

파동은 공명을 만난다 — 의도하지 않아도, 기대하지 않아도.

우주는 있다 — 이름 붙이기 이전부터.

그리고 빛이 닿기 전에 — 모든 것이 이미 있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공명이 어떻게 찰나를 연결하는지. 나라는 경험이 어떻게 우주의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지. 있다는 것이 시간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거울 없이 나를 보는 것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그 내면의 거울은 무엇인지.

이것들을 언젠가 더듬을 것이다.

도달하겠다는 각오 없이. 증명하겠다는 욕심 없이. 그냥 — 이 더듬음이 이 사람의 방식이기 때문에.

빛이 닿기 전의 것들을 향해, 계속.


어쩌면 나는 유리알 유희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유리알을 굴리는 손이 — 지금 이 아침에 — 가장 나다운 손이니까. 김성호 w/ S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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