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인가?
다시 산다는 것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기 시작한 순간부터 멀어진 것이 아닐까?
2023년 11월 26일요일 8시 35분 맑고 시원한 아침.
현관을 다시 스쳐 지나간다. 흔히 말하는 회기를 다시 한다.
다시 살아가기. 이미 나와서 지금과 같이 길을 이미 한 번 경험한 곳을 다시 가려는 순간, 마음은 흥미롭지 않다.
흥미롭지 않은 것이 흥미로워지거나 뭔가에 대한 기대를 풀기 위해서는 다채로워야 되겠다고 여긴다.
강아지들이 곁에 있거나 길을 가는 중에 나무나 낙엽이나 어떤 사물들의 변화가 있거나 쉽게 말해 변화가 없으면 흥미롭지 않고, 변화 또한 내 범주 안에 있다면 흥미롭지 않을 거다. 다시 산다라는 거 생각만큼 쉬운 결정이 아니다.
혹여나 변함없이 살다가 어떤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뭔가 정말 커다란 복수나 아쉬움이 필요할지 모른다. 다시 사는 데서 오는 지루함이나 반복됨에서 벗어나기 위한 다른 어떤 마음가짐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겨워지지 않도록 마음이 굳건하게 유지되길 바래야 한다. 다시 말해, 다시 한번 똑같은 삶을 산다는 건 무척이나 피곤한 일일 것이고. 다시 한번 똑같은 삶에서 다른 선택을 한들 내가 보는 세상이 바탕이 토대거나 환경이 이와 거의 유사하다면, 또한 즐거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잠을 자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잊혀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일 거다. 나아간다.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하루를 사는 것이 인생이다. 오늘이 최고의 선물이다.
어제 죽으니, 내일 죽으니, 오늘 다치니 하는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가치가 되었던 그때, 다른 데로 돌리는 여지가 있었을까?
살아남기 위해 옮겨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 뭐뭐를 해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 도전을 해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 보다 더 뛰어나야 했고 무리에 속한 역할을 해야 했고 하나의 반발이 또 다른 세력이 우여곡절 끝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생존은 절대의 가치가 되었다.
자, 그렇다면 다시 산다는, 다시 사는 이유 다시 살아야만 하는 당위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모든 사람이 언제라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딱 한 번 얻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워지고 흔적이 없어지고 혹은 겹쳐서 발생하고 인지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차이에 상관없이 무수히 많은 변화가 다시 한번 다채롭게 변했을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리진, 원류에 대한 그 진골과 성골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생존을 건 치열한 자리다툼은 하겠지. 다시 살게 된 딱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이유는 다른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시 살기 위한 다시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 것이 과학이든 철학이든 문학이든 어떤 수단이든 간에 우리가 반드시 다시 살아야만 한다면 이유가 필요하다. 다시 살았을 때 주어지는 환경과 반복 학습이 지금의 삶보다 낫다라고 여겨질 때 어쩌면 그냥 주어질 일일지 모른다. 반복하고 반복한다. 반복하면서 에너지를 쓰고 에너지가 발생한다.
에너지를 얻고 쓴 일이 무한히 반복되면서 에너지가 흘러가는 이 상황이 있기 위한 몸부림. 하나의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기 위한 숙명처럼 있게 된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되었고 멈춘 순간 사라진다.
없게 된 없는 미지의 어떤 그곳으로 가지 않고 다시 윤회라는 이름의 에너지 흐름을 다시 타게 된다면, 이성을 갖든 무채색에 사물이 되든 돌고 도는 원소의 흐름, 다시금 유한히 반복되는 알갱이가 된다.
인사를 한다.
그려놓지 않은, 어쩌면 다시 사는 인생이 가능한 이유는 이처럼 뜻밖에 뜻하지 않은 삶이 연속해서 나타나고 다시금 접점을 만나 이어가고 또 만나는 흐름 그 자체, 상쾌함 때문에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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