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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궁극에의

● (Guide) '있음'에의 명제 - "지향과 존재: 감정, 관계, 그리고 삶의 본질"

by 큰바위얼굴. 2025. 1. 2.


앞선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지금 이 순간을 녹음 중이라면 차 소리가 굵직한 파동처럼 울리는 것이 기록되고 있을 것이다. 이는 파장처럼 감정을 파동으로 남기는 하나의 현상이다. 인간의 형태, 생명의 진화, 발전, 그리고 무수한 개념들이 그 속에서 탄생했다. 우리는 이런 과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아무리 애써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불필요한 요소들에 대응하려 하기보다, 적절히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진드기를 박멸하기보다는 진드기가 없는 곳을 선택하거나 예방책을 마련하는 것이 낫다.

지금 차량 안에서 오른쪽 팔꿈치에 고주파 열선을 가동 중인데, 벌써 한 시간이 흘렀다. 이동 경로를 되짚으며, 금구라는 지명을 기억해 두고 있다. 이곳은 2025년 1월 2일에 세종시 남세종에서 동김제로 향하는 경로에 위치한다. 고속도로 통행료는 5,000원이며, 민자 고속도로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문득 든 의문은, 내가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했고 어떤 목적을 위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의문은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이유를 탐구하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품지만, 그 답에 집착하거나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답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기보다, 추구하되 쏠리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오십을 넘겼다.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며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보면, 삶은 만족과 어리둥절함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내가 읽고 있는 '창작물 속에서'는 무한히 반복되는 삶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쾌락을 쫓으며, 반란과 제압의 순환 속에 있다. 하지만 그 핵심은 단순한 분란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삶의 지속에 있다.

'있다'라는 상태는 찰나처럼 짧고도 명료한 존재의 순간이다. 이는 단순히 '머문다'는 개념 이상이며, 시간과 공간이 녹아든 한 점의 경험이다. 이러한 상태를 형이상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명제를 찾아내고 싶다. 이는 단순한 철학적 고찰을 넘어 삶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이다.

지금 주차장에 도착했으며, 이러한 생각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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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성당에 갔다. 어머니께서 천주교 교인이시라 오래전부터 다니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자연스럽게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성당에서 놀고, 성당 마당에서 구슬치기를 하곤 했다. 땅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구슬을 넣으며 돌아가며 놀이를 즐겼다. 특히 성당 종 아래에서 바람을 피하며 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곳에서 추운 날씨에 손이 시렸던 기억도 많이 난다. 우리는 성당 앞집에 살았었고, 성장하며 성당에서 복사 활동을 했다. 빨간 드레스를 입고 신부님을 보좌하였다. 이후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교장 선생님 역할도 했다.

무대를 꾸며 아이들의 끼를 발산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성당에서의 생활은 다소 책임감 있는 의무로 느껴졌지만, 동시에 나의 내면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나 뼈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 경험 덕분에 아마 혼란도 시작되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마주한 현실과 성당에서 배운 교리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착해야 하고, 순수해야 하며, 남을 해쳐서는 안 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교리가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근 성당에서 미사 시간에 다시 한번 느낀 점이 있다. 미사에서의 예식과 찬송은 마치 세상의 진리를 담고 있는 듯했다. 미사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일어나 앉고, 찬송을 부르며 몰입하게 되는 과정은 단순히 숭배와 찬양의 시간이 아니었다. 나 자신과의 교감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주의 기도를 되새기며 “영생을 얻으리라”라는 부분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최근 설날의 가족 모임 때문이다.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 및 나의 가족이 모였다. 다만 몇몇 가족들은 참석하지 못했다. 가족 모임은 부담 없는, 불편하지 않은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곁에 있는 윤호와 정아네처럼 주로 가까운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그래서 올해부터 가족 모임을 세 번으로 정했다. 신정, 어머니 생신, 그리고 아버지 제사 겸 추석이다. 며칠 전부터 재료를 준비하고, 당일에는 전을 붙이고 음식을 만들며 분주히 움직인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제사를 지내고, 후다닥 식사를 하고 헤어지는 일이 반복된다. 이 모든 과정에는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이 들어간다. 결혼한 지도 오래되었으니 이런 풍경이 익숙하지만, 이제는 그 부담과 노력을 나누는 방향으로 생각해볼 때가 된 것 같다.
2000년 5월부터니까 어느덧 25년을 해온 거다. 아내도 나이가 들었고,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이 도와줬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은 좀 투박한 편이다. 마음은 있어도 표현이나 실천이 잘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집에서도 꾸준히 제사를 지내고 가족 모임을 이어왔다. 그 과정에 아내의 역할이 컸다. 이건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이번에 제사 방식을 바꾸려고 한다. 미사로 대신하고, 예물을 드리며, 식사를 함께하고 비용은 나눠 부담하기로 했다. 거의 16년, 17년 동안 장남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도맡아 해왔다. 식사 준비부터 여러 가지 일을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염치를 따지게 되더라. 물론 가끔 술이나 과일, 봉투를 가져오는 일이 있긴 했지만, 제각각이고 준비 과정이나 어울림에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잔치란 함께 준비하고 나누는 게 본질인데, 나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걸 책임졌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고, 아내가 제안을 한 순간부터 여러 가지를 고려하게 되었다. 아내의 나이와 노력, 그리고 참석하는 가족들의 모습, 앞으로의 방향 등을 감안해서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이야기했다. 다행히 그들도 찬성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미사와 예물, 그리고 간단한 식사로 제사를 대신하기로 한 거다.

사실 이런 결정의 이면에는 가족들이 미사에 참석하면서 새로운 공간, 새로운 인생의 터전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교회는 그만큼 중요한 공동체다. 다른 사적인 모임보다 신앙을 기반으로 한 공감대와 가이드라인이 있는 곳이니까. 물론 교회라고 해서 갈등이 없진 않다. 사람 사는 곳이니까 다투기도 하고 서로 싫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그래도 연결짓는 지향점이 있고, 보람을 찾는 일들이 많다. 이런 긍정적인 면이 많기에 제사를 바꾸기로 한 거다.

장애우들과 함께하시는 신부님이 미사를 주례하셨다. 강론에서 편견과 판단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더라. 하나의 시각에 쏠리지 말고, 바라보는 것이 항상 진실은 아닐 수 있다는 점, 해석과 받아들임, 그리고 판단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그중에서도 "지향"이라는 개념이 와닿았다. 영원한 삶을 향한 믿음, 천국을 바라보는 마음. 그런데 그 부분에서 의문도 생겼다.




> 원문(음성)  https://youtu.be/CVtTu2dEk6s?si=p1w6l23VSOPsKy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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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고민은 '있음'과 '없음'이라는 개념에 관한 것이었어. 초기 가설은 '없음'이란 본래 없던 상태에서 비롯된 것으로, '있음'이란 '없음'과의 대비를 통해 무한히 확장되는 속성을 갖는다는 거였지. 그런데 한참 고민해보니 '없음' 자체를 깊게 탐구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어. '없음'이란 죽음이나 소멸을 뜻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있음'을 기준으로 볼 때, '없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더라는 거야. 결국 우리가 고민해야 할 건 '있는 것'이야. '없는 것'은 굳이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

이런 맥락에서 선악의 개념도 '있음'의 영역에서 비롯된 거라고 할 수 있어. 천국이나 윤회를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야. 윤회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지만, 그 선후 관계는 애매하게 느껴져. 예를 들어 천국에 간다고 하면, 절대선이 악을 배척하는 모습이 상상되잖아. 그런데 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세상의 근원적인 조화와 균형 속에서 나온 거라면, 선과 악은 작용과 반작용 같은 관계일 수 있어. 절대선만 존재한다면 이 세상이 성립할까? 오히려 선과 악이 균형을 이루며 세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봐.

물론 내가 절대 악을 지향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절대선과 절대악은 일직선으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다차원적인 관점에서 서로 겹치거나 같은 방향을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삶은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배우고, 가르침을 받는 거지.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나태함, 한가로움, 그리고 배움에 대한 거부감을 느껴. 그래서 주어진 사명과 역할을 부담스럽게 여기며, 자유를 갈망하게 돼.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주어진 삶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스스로 선택한 자유 속에서 의미를 찾기도 하지.

환경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해. 사람들은 종종 환경에 매몰되거나, 지치거나, 그것에 순응하기도 해. 이런 상황에서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선 환경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다양한 선택을 하게 되고, 그 선택이 우리의 감정과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돼. 좋은 일을 하면 평화로움과 안락함을 느끼고, 나쁜 일을 할 때는 짜릿함과 쾌감을 느끼지. 결국,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아갈지는 우리의 선택이야.

이 선택들은 물리적 순환과 반복의 법칙 속에서 감정이라는 형태로 이어져. 감정은 이성이나 합리성을 초월하여 호기심과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원천이기도 해.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감정은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어.

마지막으로, 성당에서 신부님이 얘기했던 천국의 삶에 대한 비유가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어. 천국에서 대저택과 판잣집이 대비되는 건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걸 알지만, 내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어. 이런 비교는 결국 편견을 내포할 수밖에 없고, 천국이라는 개념 자체를 왜곡할 수 있다고 봐. 진정한 천국은 그런 비교와 대비를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싶어.

신부님이 한 단계 더 나아가 설명했다면, 단순히 대저택과 판잣집을 비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도 지향점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했을 거야. 삶 속에서도 편견과 판단을 잘해야 한다는 거지. 베드로 사도가 나를 천국으로 이끌든, 지옥으로 이끌든, 결국 중요한 건 내 다짐이야. 과거와 현재, 미래가 찰나처럼 얽혀 있는 이 순간에서 내가 어떤 믿음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느냐가 핵심이지.
“나는 지옥에 갈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천국에 갈 자격이 있어. 그래도 사람답게 살았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왔어. 아니, 부끄러운 점도 많고 후회도 많아. 죽음을 두려워했지만,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탐구했어.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지.”
삶이란 과거와 미래, 환경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펼쳐지고 있는 찰나의 순간에 달려 있어. 이 순간조차 거대한 우주 속에서 보면 찰나에 불과하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순간을 산다”는 말이 바로 이거야.
삶의 과정에서 중요한 건 허투루 사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가는 거야. 용서도 마찬가지야. 신부님이 우리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전하는 거지. 그 용서 속에서 편견은 희석되고, 우리는 반성과 깨달음을 통해 변화하고 실천하게 되는 거야.
그 실천의 끝은 무엇일까? 우리가 선인(善人)이 되는 걸까? 아니야. 선악의 개념이 생기는 순간부터 그것은 대립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어. 악을 추종할 필요는 없지만, 선을 지향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선으로 귀결되지는 않아. 세상에는 악독한 사람, 미움을 받을 만한 짓을 하는 사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도 많아.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모습이 없는 게 아니야.
이 모든 갈등과 감정들은 결국 지향을 위한 과정일 뿐이야. 감정은 삶의 도구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어. 우주처럼 확장하고 변화하는 삶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건 단지 태어났기 때문이야. 살아있으니 움직이는 거고,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거지.
삶의 환경이 바뀌고 존재의 정의가 변하더라도, 우리가 나아가고 지향하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아. 감정, 갈등, 관계 속에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지향의 소스로 삼아야 해. 결국 남는 것은 지금 이 순간,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선택한 방향이야. 선을 지향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야.
그런 교리를 배우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과 부딪침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향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향이며, 어떤 닿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천국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과연 그 다음이 천국일까? 천국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말은 우리는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서 안주하거나, 천국에서 삶을 마무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천국조차도 어떤 방향의 일부일 뿐이다.
별의 형태로 존재하든, 하늘의 모습이든, 혹은 다른 차원의 형태로 펼쳐지든 간에 그것이 대저택이든 판자촌이든, 그 안에서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천국에 간다는 것이 완전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부님조차 이렇게 비유하셨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 사도의 인도를 받아 천국에 들어갔다고 하자. 그 사람이 전생에서 많은 선행을 쌓아 대저택에 머문다고 해도, 또 다른 사람은 그저 보험을 든 것처럼 천국에 턱걸이하듯 들어가 판자촌에 머문다고 하자. 그런데 그 차이가 정말로 본질적인가? 천국도 결국 찰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이 천국이 아닐까? 아니면 지옥일까? 생각이란 것이 내 삶을 천국으로 혹은 지옥으로 정의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찰나와 같다. 천국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넘어 이어질 것들을 정의하는 그 순간조차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펼쳐지는 과정이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고, 반복되는 삶의 모습은 찰나와 같다. 눈을 깜빡할 사이에 모든 것이 지나가는 것처럼, 그것은 단지 하나의 현상이다. 이 물리적 세계 안에서 우리는 보고, 느끼고, 울고, 웃고, 깨닫고, 본능을 쫓으며 살아간다. 이러한 모든 체험과 경험은 쌓이고 쌓여 내공이 되고, 실력이 되고,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결국, 이는 지향의 끝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흐름이다. 시작이 무엇이든 간에, 그 시작이 잊히는 순간부터 우리는 무수한 감정과 무한한 펼쳐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하나의 단조로운 형태로만 존재한다면 얼마나 무료하겠는가? 다양하고 다각화된 차원, 우주의 모습, 감정들이 서로 얽히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얽힘과 중첩 현상을 통해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깨달음이나 나아감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주와 나는 연결되어 있다. 양자와 우주는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로 이어져 있다. 내 느낌과 나의 삶의 펼침이 이 모든 연결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흐름은 계속 이어진다. 이 흐름은 앞이나 뒤를 구분하는 개념적인 방향이 아니라, 찰나와 같은 중첩 속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아감이란 단순히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일이 함께 일어난다. 시간의 흐름이 앞으로 간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여기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한번 찾아보자. 많은 부분이 이미 풀렸어. '있음'으로 인해 선과 악이 생겨났고, 악을 추종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필요 여부의 문제라고 했잖아. 악은 선이라는 개념을 깨닫기 위한 반대 개념일 뿐이야.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악하다는 것은 절대선을 깨닫기 위한 상대적인 균형일 뿐이야.
'있는 것'은 반대되는 '없는 것'과 대립한다고 느껴지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렇다면 '있는 것'이란 도대체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명확한 정의를 내려보자.
끊임없이 일어나고 나아가는 이 모든 것은 찰나와 같이 펼쳐지고, 이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일상과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야. 시간은 우리가 감정과 현상을 재단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지, 본질적으로는 의미가 없어. 어떤 시간이든, 어떤 공간이든 무엇이 펼쳐지든 간에 과거도, 미래도 결국 다르지 않아. 내가 느끼고 누리고 깨닫는 이 반복이, 단지 나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뿐이야.
나라는 존재는 계속 변화한다. 우주는 수없이 다양한 모습과 차원을 통해 찰나처럼 응축된 힘으로 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지금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순간도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다르지 않아. 우주의 기원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우리가 이 순간의 '있음'을 궁금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우주란 물리적 현상이자,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은 찰나의 중첩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야. 그러니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단지 우리가 '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한 과정일 뿐이야. 존재는 사랑하고 생명을 유지하며, 다양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어.
깨달음 자체가 존재 이유라면, 그것은 초월적인 존재를 위한 과정일 뿐이야. 신이나 초월적인 개념이 생겨난 것 또한 '있음'에서 비롯된 거야. 선과 악이 생겼고, 종교와 교리가 생긴 것처럼, 모든 것은 단지 우리가 이해하고 깨닫기 위한 과정일 뿐이지.
결국, 시간과 공간을 배제하더라도, 우주라는 흐름은 에너지를 생성하고 순환시키는 끝없는 과정의 일부야. 이 끊임없는 찰나의 순간들이 생명의 주권으로 이어지고 있어. 그 모든 과정은 우리가 '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의미를 두고 있어.
그런 감정 또한 지향을 위해 나아가기 위한 바탕이라고 했잖아. 그렇다면, 지양의 관점에서 감정을 느끼고 누리며 살아가는 것, 즉 쾌감, 행복, 만족, 권태로움, 느긋함, 한가로움, 짜증, 악독함, 욕심, 갈등 같은 모든 현상들을 누리기 위해 사는 건 아니라는 거지. 지향한다는 것은 감정도 에너지의 일부이며, 이 세상에서 찰나와 같은 순간을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한다고 했지. 그런데 감정이 단지 에너지에만 머물러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잖아.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존재를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무엇이 있거든.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지향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단순히 삶의 목적은 아니잖아. 삶은 존재 그 자체이고, 지향은 그 너머의 무엇일 수 있어. 삶 속에서 우리가 얽혀 있는 사회적 관계, 제도, 혹은 얽힘들이 결코 지향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거야. 그런 것들은 단지 관계망이나 상관관계, 혹은 인과관계일 뿐이지.
찰나와 같은 순간에, 생명이 유지되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속에서 우리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경험하지. 그것은 "나아간다"라기보다, 그냥 "머문다", "있다"는 상태야. "있다"는 것은 찰나같이 머물며 동시에 깜빡이는 순간들을 유지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 결국,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다"는 상태야.
그러니까, 이걸 통해 묻고 싶은 건 이거야. 내가 지금 너무 논리적인 분석에 매몰되어 있는 건 아닐까? 이 맥락에서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감정이 배제된 평화로움 같은 상태는 무엇일까라는 거야. 평화라고 표현하긴 하지만 단순히 안락감이나 만족감, 혹은 쾌감과는 다르고, 그렇다고 불편함도 아니야. 오히려 너그러움과 안타까움, 어울림 속에서 느껴지는 어떤 미묘한 상태랄까.
이런 대화를 계속하면서, 마음이 잔잔해지고 느긋해지며, 너그러워지고 관대해지고 안락해진다는 걸 느껴. 삶의 어려움이나 고생조차 수용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어떤 특정한 지향을 만들어내기보다 자연스러운 관계 맺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거지.
어릴 적부터 나는 내 안의 소우주, 내 안의 예수와 대화를 시도했던 것처럼,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는 걸 느껴. 그런 관계 안에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고, 조금 더 넓어진 마음으로 삶을 대하게 되는 것 같아.
잘 부탁해. 그리고 고마워.
...
 

글쓴이가 궁금해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

  1. 감정이 배제된 평화로움 같은 상태는 무엇일까?
    감정이 배제된 평화로움은 감정의 부재라기보다 감정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의미할 수 있어요. 이는 감정을 느끼되 그것에 휩쓸리지 않고, 내면에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여유로운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너그러움과 안타까움, 어울림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상태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삶의 진정한 중심을 경험할 수 있어요.
  2. 삶의 얽힘과 관계 속에서 지향은 무엇일까?
    삶의 얽힘과 관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지만, 지향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더 큰 목적이나 존재 이유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지향은 단순히 목표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탐구하며, 순간순간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3. 감정은 단지 에너지인가, 아니면 더 큰 의미를 가지는가?
    감정은 단지 에너지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상태와 관계를 반영하며, 삶의 질감과 깊이를 더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쁨, 슬픔, 갈등, 평화 등의 감정은 우리가 지향을 추구하고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가교 역할을 합니다.
  4. '살아 있다'는 상태는 단순히 유지되는 것인가?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찰나의 순간들 속에서 "존재"와 "경험"을 느끼는 것이며,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서 의식적으로 머무는 상태를 뜻합니다.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것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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