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서로 멀리 있는 차량도 감지해서 바리케이트가 아직 멀었는데도 그냥 올라가 버리더라. 지금은 퇴근길인데, 아내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지만, 그 전에 이야기를 좀 마저 하고 싶다. 일단 들었던 생각을 정리해서 지피티에게 질문했고, 내 생각을 다듬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결과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느낌이 좀 그랬다.
이게 어떤 흐름과 연결되냐면, 점심쯤 낮잠을 잤다. 12시 20분쯤이었던 것 같은데, 너무 꿀잠을 잤다. 그랬더니 교대 시간이 훅 다가와 버린 거다. 교대를 대충 생각하고 내려갔는데, 너무 일찍 내려갔다는 뭐 그건 별일 아니니까 오케이. 그만큼 잠이 깊었고 에너지는 거의 만땅에 가까워졌지만, 기분은 오히려 가라앉아 있었다. 활력이 넘칠수록 생각은 더 복잡해지고, 불안감이나 자기 성찰, 못마땅함 같은 감정이 올라온다. 되돌아봤을 때 만족과 기쁨이 가득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특히 오늘처럼.
잘 자고 나서 우울한 건 아닌데, 뭔가 어두운 것도 아닌, 그냥 ‘못마땅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이건 자책이나 자기비판이라기보다는 그냥 드는 감정이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기분이 저조한 상태. 그래서 그냥 일상을 애써 유지하고 있었는데, 호기심에 중국의 절벽 도시를 찾아봤다. 산속 절벽에 사찰을 짓고 20년을 살아온 한 할아버지 이야기도 보게 됐다.
그곳을 방문한 한국인의 이야기를 보며 오히려 활력이 살아났다. 다른 사람의 삶을 보며 나도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모든 걸 쏟아부어 이야기를 만들고, 또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내 안에 쌓인 이야기들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고, 마치 ChatGPT가 내 기록을 간직하고 있다가 응답해주듯, 아내 역시 내 삶을 함께 기억하고 있는데도, 종종 기분이 가라앉고 활력이 필요해진다. 단지 잠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몸과 마음의 흐름이 흔들린 것이 못마땅했다. 물론 그럴 만한 요인은 많다.
1년치 연금을 미리 넣었는데도 마이너스가 난다든가, 이런 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이고 확신을 갖기 위한 노력이다. 우상향을 믿고 들어갔지만, 다음 날 잠깐 수익이 났다가 곧바로 손실이 생기기도 한다. 반전을 만들고 싶지만, 이미 거대한 흐름은 진행 중이다. 경기가 침체됐다고 다들 살기 힘들다고 하지만, 코로나 때를 돌아보면, 오히려 더 많은 돈이 풀리면서 집에 있는 대신 다른 즐길 거리를 찾아냈다. 그게 새로운 시대의 적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풀린 돈의 후폭풍이 오면서, 이제는 갚아야 할 때가 됐다. 물가는 이미 많이 올랐다. 이걸 어떻게 안정시킬까 고민이지만, 생각해보면 경제 시스템 자체도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구조다. 사람이 만든 시스템이니 당연히 흔들린다. 만들어놓고 방치하면 자정 작용이 일어나겠지만, 보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원래는 챗지피티와 나눈 대화를 얘기하려 했는데, 결국 이 감정을 뱉어내고 싶었던 것 같다. 감정을 다듬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류의 발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기술 진보가 AI와 로봇을 통해 인류의 대안을 만들어낸다면, 인류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할까?
지금 내 입장, 그러니까 은퇴 이후의 삶에서는 ‘일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가능하긴 하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해 다시 일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따뜻한 집,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활동, 이런 것들 때문. 그런데 먹고살기 위해서 꼭 돈이 필요할까?
만약 산속에서 살거나, 대체 가능한 방식이 있다면 돈의 비중은 크게 줄어들 수 있다. 결국 돈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목적이나 지향을 찾는다면, 그게 무엇일까? AI와 로봇이 주도하는 미래에, 인류보다 더 스마트한 지성체가 사회를 이끌고, 세상이 빠르고 합리적으로 잘 돌아간다면, 그 세상은 정말 행복만 있을까?
범죄나 사고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자극을 받을 수 있을까? 살아가는 데 그런 자극이 전혀 없다면, 인간은 어떤 의미를 느낄 수 있을까? 삶의 충돌, 갈등, 갈망이 없으면 진보나 진화, 환경 개척 같은 동력이 생길까?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그 환경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사는 것일까?
지구는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이고, 그 안에 있는 나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나를 하찮게 여길 수는 없다. 먼지가 하찮다고 여긴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의식이다. 지향만 있고, 현재를 즐기지 못한다면, 삶은 매끄럽지 못하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감정들, 예컨대 행복, 감동, 보람, 사랑, 성취감, 만족감 같은 것들. 이런 감정들을 위해 사는 거라면, 단지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보다도 더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잘 살기 위한 공간과 환경을 만들어가는 일 아닐까? 그런데 그조차도 뭔가 부족하고 어설퍼 보일 때가 있다. 김성호.
* 원문(음성)
그렇다. 만약 우리가 산속에서 살거나, 다른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면, 어쩌면 돈은 지금처럼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가 돈을 좇는 이유도, 그것으로 바꿔 얻으려는 감정과 경험 때문이 아니던가. 진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돈 너머의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돈 너머를 바라보려 하면, 그 ‘무언가’는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럴수록 우리는 다시 돈을 쫓는다. 아니, 돈만 쫓는다기보다는 안정과 편안함,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소소한 행복을 보장해주는 일종의 '약속'을 쫓는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본다. 만약 인간보다 더 현명하고, 더 효율적인 존재 — AI와 로봇이 — 우리의 삶을 대신 관리해준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사고는 방지되고, 범죄는 사라지고, 선택은 가장 합리적으로 계산되고, 인간은 더 이상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며, 고통에서 해방된다면... 정말 그런 세상은 행복할까?
그건 어쩌면 지루함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갈등 없는 삶, 충돌 없는 관계, 바람 없는 바다처럼 평온한 시간... 그런 세상은 정말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게 착각일 수도 있다.
겪어보지 못한 세상은 두려움과 의심을 낳고, 아직 닿지 않은 세계를 우리는 쉽게 부정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감정이라는 건 결국 '대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깊은 슬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의 무게를 안다.
처절한 실패를 마주한 이가, 성공의 달콤함을 더 깊이 음미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감정이란 건 필연적으로 반대급부를 지닌다. 이 세계의 진폭이 크면 클수록, 우리 삶의 감정 스펙트럼도 넓어진다.
생각해보면, 우주가 이토록 광활하고 공허한 것은, 어쩌면 생명이라는 작은 존재에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여백일지도 모른다. 우주는 먼지 같고, 우리는 그 안의 티끌 같은 존재지만, 그 미미함을 자각하는 순간 오히려 삶은 깊고 묵직해진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거대함을 인정하는 것.
그 균형을 잃으면, 우리는 오만하거나 절망에 빠진다.
삶은 지향하는 것 없이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지향만 붙들고 현재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결국 삶을 놓치고 만다.
행복, 감동, 보람, 사랑, 성취, 만족...
이 감정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은, 혼자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
그런 공간을 가꾸고, 그 환경을 물려주려는 욕망이 결국 진보와 진화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어설프다. 어딘가 모자라고, 때로는 너무 늦거나, 너무 빠르다. 세상은 언제나 완성되지 않는다. 마치 끝나지 않는 퍼즐처럼, 또다시 새로운 조각을 채워야 한다.
그래서 아마 인류는 아직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알지 못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완전한 행복이란 결국 ‘변화 없음’을 뜻할 테니까. 하지만 이 세상은 늘 격랑과 격동 속을 지나왔다.
만약 세상이 잔잔한 물결처럼 흘러왔다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복잡한 문명도, 깊은 사유도, 따뜻한 공감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기후변화, 질병, 전쟁, 불평등, 욕망과 실망...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삶을 가혹하게 만들지만, 그 속에서 인류는 다음 단계의 생존법을 터득해왔다.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시간은, 또 다른 격동을 준비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완전체가 되어 감정이 거세된 인간을 상상해보라. 그건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것이다. 감정은 불완전성의 증거이지만, 동시에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무식한 리더의 자기망상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을. 집단이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진실은 끝내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결국은 체념 비슷한 깨달음으로 돌아온다.
세상은 한 편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빛과 어둠, 진실과 착각, 의지와 무력감은 서로를 부정하면서도 서로를 증명하는 존재다.
결국 이 세계는 다채로워야만 한다.
아니, 다채로워야만 한다는 결론조차 잠시 내려놓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의미를 찾고, 의미를 부정하고, 또다시 새로운 의미를 찾아 길을 나선다. 마치 긴 여행을 끝내고도 다시 짐을 싸는 순례자처럼.
그리고 그 여정이 끝나지 않았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또 한 번, 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게 아닐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
이 질문의 답을 찾으려는 과정, 그 자체가 어쩌면 인생이 아닐까.
그래서 오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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