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4차원을 볼 수 없는가? https://www.youtube.com/watch?v=uQq9A3qTkjc
당신은 지금 상상 속 작은 우주에 들어섰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세계에는 넓이도, 높이도 없습니다. 오직 ‘길이’만 존재하죠.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좌우로만 움직일 수 있는 세계.
바로 이것이 ‘1차원’입니다.
‘차원’이란 공간의 자유도를 말합니다.
즉,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를 의미하죠.
0차원은 ‘점’입니다. 존재는 하지만, 위치가 없습니다.
움직일 수도, 방향을 가질 수도 없는 상태죠.
하지만 이 점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의 ‘선’을 얻게 됩니다.
이 선이 바로 1차원 공간입니다.
1차원에서는 단 두 방향—앞과 뒤(혹은 좌와 우)로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 이제 상상해봅시다.
만약 어떤 존재가 1차원 세계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세상을 어떻게 인식할까요?
그는 앞과 뒤만 볼 수 있을 겁니다.
옆도, 위도, 아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선 위에 있다’는 개념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그에게 세상은 단지 나열된 점들의 연속일 뿐이죠.
누군가 그를 위에서 내려다본다 해도
그는 그 시선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세계에는 ‘위’라는 방향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1차원에는 구조도 없습니다.
선 위에서는 두 존재가 서로를 지나칠 수도, 비켜설 수도 없죠.
예를 들어 A와 B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면
그들은 결코 서로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그럴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1차원에서는 ‘안’과 ‘밖’의 개념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양 자체를 만들 수 없으니까요.
삼각형도, 원도, 심지어 선분의 내부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단지 점의 나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단순한 세계를 왜 이해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3차원 세계를 넘어서는 차원을 이해하려면
1차원처럼 더 낮은 차원을 상상할 수 있어야
우리가 어떤 인식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지를
감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철학적 사고일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에서도 실제로 사용하는 중요한 ‘직관의 도구’입니다.
1차원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나 자신이 지금 어떤 틀 속에 살고 있는가’를
더 깊이 자각하게 됩니다.
자, 이제 2차원 세계로 들어가 봅시다.
길이뿐만 아니라 ‘너비’를 가진 세계.
이곳에서는 좌우, 앞뒤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여전히 위아래는 없습니다.
이 넓어진 선은 이제 ‘면’을 이루고,
삼각형, 사각형, 원 같은 도형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안과 밖’이 생깁니다.
1차원에서는 점과 점 사이에 안팎이라는 개념이 없었지만
2차원에서는 원 안에 무언가가 들어가고, 나올 수 있습니다.
단 하나의 차원이 추가되었을 뿐인데
세계는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고 풍부해졌습니다.
이제 상상해보세요.
어떤 존재가 이 2차원 세계—‘플랫랜드(Flatland)’—에서 살아간다고 가정합시다.
그 존재는 삼각형, 사각형, 선형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존재는 자신의 세계를 ‘평면’이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위나 아래라는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한 원형 생명체가 평면 위를 돌아다닌다고 해봅시다.
그가 또 다른 정사각형 생명체를 마주치면,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접하는 선분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즉 3차원 존재가
그 평면을 뚫고 내려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그 원의 ‘속’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계 속 존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위’라는 개념 자체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2차원 세계는 모든 것이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건물도, 계단도, 입체도 없고
그림자의 개념조차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 평면이 전 우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3차원 세계도
혹시 더 높은 차원의 존재에겐
그저 ‘평면’처럼 보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3차원 공간 속에서
좌우, 앞뒤, 위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이 방향들이 바로 우리의 ‘세계 축’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전부’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혹시 우리가 4차원 혹은 그 이상의 세계 속에서
단지 제한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존재라면?
2차원 존재가 ‘위’를 이해할 수 없듯
우리는 4차원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이 닿을 수 없는 세계,
즉 ‘한계’입니다.
단 하나의 차원이 늘어났을 뿐인데
세계는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집니다.
모양이 생기고, 안팎이 나뉘며, 물질이 형태를 갖기 시작하죠.
하지만 그 세계조차
또 다른 차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기 안에 갇힌 ‘한정된 우주’일 뿐입니다.
우리 눈엔 이 3차원이 전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 ‘전부’가 진짜 전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제 도달한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그 3차원입니다.
당신이 손을 뻗는 방향,
당신이 걷는 길,
하늘과 땅—모두 3차원 안에 존재합니다.
1차원에선 선만,
2차원에선 면이 생겼고,
3차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든 사물이 ‘형태’를 갖게 됩니다.
공의 부피, 사람의 체형, 건물의 높이.
이 모든 ‘실체’는 3차원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3차원에 살고 있을까요?
단순한 우연일까요?
물리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이 세계가 2차원이었다면,
중력은 안정적인 궤도를 만들 수 없고
원자는 구조를 유지하지 못하며
복잡한 생명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4차원이었다면
물리 법칙이 너무 복잡해져
전자 궤도는 무너지고,
중력은 파괴적인 형태를 띠며
질서 있는 세계 자체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즉, 3차원은
우주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차원이며,
생명이 발생하고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구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한계’입니다.
우리는 이 3차원을
전부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앞서 본 2차원 존재처럼
우리는 더 높은 차원을
감각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만약 4차원 존재가 있다면,
그는 우리의 몸 안을 꿰뚫어 보듯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겐 불가능한 ‘투시’가
그들에겐 당연한 시야일 수도 있죠.
우리의 문명, 기술, 사랑, 예술, 역사—
모든 것은 3차원의 질서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공간을 떠날 수 없으며,
더 높은 차원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살 수’는 없습니다.
이 당연해 보이는 3차원은,
사실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고,
별이 빛나고,
행성이 돌고,
생명이 진화하며,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까지—
모두가 3차원이기에 가능한 기적입니다.
우리는 그 기적 속에 살고 있지만,
그 기적 ‘밖’은 아직 알지 못합니다.
어느 날 누군가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더 높은 차원의 단면일 뿐이야."
그 말은 얼핏 들으면 철학 같지만,
사실은 물리학과 수학이 실제로 던지는
가장 깊은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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