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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궁극에의

오늘도 마주함

by 아리빛 하나 2025.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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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들은 연기처럼 흩어져 있고, 많지 않다. 하나, 둘, 셋 세어보아도 스무 채가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마을이다. ‘마을’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모호한, 고요한 곳이다.

산 아래 낮은 지붕과 벽돌색 집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넓게 펼쳐진 논에는 벼가 익어가고, 곧 추수의 날이 다가오겠지. 푸른 산 아래, 그 아래 다시 이어지는 집들과 들녘이 하늘빛과 맞물려 한 폭의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만약 하늘에 색이 없고 구름이 없다면, 모든 형태와 변화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막막할까. 아무런 형상도 없는 공간, 광활한 우주, 사막처럼 끝없이 비어 있다면 얼마나 외롭겠는가.
그래서 자연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어 있지 않기 위해, 다채로운 별의 순환과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리라. 거대한 역사가 그렇게 생겨났다.

그건 앞으로 나아가는 개념이라기보다, 지금 이 순간 찰칵—하고 찍힌 한 장의 사진 같다.
그 순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면, 그건 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아무 형상도 남지 않은 상(像)을 찍는다면, 그 시도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우리가 보는 세계는 필름의 한 장면처럼 이어진다. 바로 되돌아가거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거나, 잠시 정자에 앉아 쉬는 것처럼.
은행나무 열매의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졸음이 밀려오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신발을 신고 서둘러 문을 나선다. 비가 올까 망설이며 우산을 챙길까 말까—그 하나의 심상이 머릿속에 번진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피사체만이 실체일까?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그림은 허상일까? 흔들리고, 물결치는 바다 밑처럼, 실체와 허상은 늘 오가며 뒤섞인다.

백지와 같은 상태에서, 무수한 점과 선이 이어져 다채로운 역사가 만들어진다. 한땀 한땀 쌓인 노력의 결정체들이 모여 세상을 짠다. 만약 그것을 내가 처음부터 짜야 한다면, 그건 엄청난 노동일 것이다.

혹여 우리가 게임처럼 프로그래밍된 존재라면, 그 안의 변수와 확률, 다양성이 자연을 이룬 셈이다.
‘자연스럽다’는 건 결국 반복되는 행위의 평균값이다. 일정한 속도, 균형 잡힌 움직임이 자연스럽다고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우주의 광활함을 단칼에 한 면으로 잘라본다면, 그 단면엔 수많은 행성과 별들의 장면이 찍혀 있겠지. 그것은 거대한 멀티 설치물처럼, 면의 자름에 따라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로켓을 타고 우주를 가른다면, 그 면은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수많은 에너지의 교차점일 것이다. 모든 순환이 에너지라 말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업(業)’이나 ‘의지’일지도 모른다.

삐걱거리는 무릎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세월의 흔적일 뿐이다. 그 안엔 여전히 나아가려는 의지가 있다.
세상을 단칼에 자르는 기준을 바꾸어본다면, 사람조차 단면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 단면 속에서, 나는 우주를 마주한다. 찰나의 순간, 그 단면이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한지를 본다.

우주의 사멸과 생성, 그 속의 원자와 행성, 그 모든 것이 한 점에 응축되어 있다.
그 공간은 꽉 채울 수 없을 만큼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잘라보아도, 계속 비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빈 공간들 속에도 시선이, 관념이, 의식이 스며 있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우주의 모습이 지구의 모습과 닮고, 지구가 인간의 몸, 세포, 원자와 닮아 있다. 원자 속 세계가 또 하나의 우주처럼 반복된다.

지구가 우주의 한 점이라면,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작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가 개미의 일상에 무심하듯이.

자연스러움은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현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자연스러움 속에서도 내 말과 행위, 사상은 자유로워야 한다.

산에서 내려오며 시선을 빼앗긴다. 소나무, 감나무, 고추, 논의 초록빛—그 익숙함 속의 신선함이 경이롭다.
그렇게 묻는다.
“왜 사는가? 존재는 무엇인가? 왜 태어났는가? 우주의 시작과 끝은 있는가?”

꿈과 상상 속의 이야기들이 실제인가? 허상인가? 어쩌면 둘 다일 것이다.
단면으로 잘린 우주의 한 조각에서, 우리는 경이로움을 마주한다. 그 찰나의 감동 속에서 시선을 빼앗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듯한 그 순간조차, 점 하나가 찍히면 다시 우주가 된다. 무수한 점들이 이어져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든다.

의식이 불멸이라면, 짧은 육체의 삶 속에서도 기꺼이 즐거움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의식은 과거와 미래, 찰나와 찰나를 연결하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무엇이 될지, 어떤 면이 만들어질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돈을 벌고 싶고, 명예롭고 싶고, 걷고 싶고, 살아 있고 싶다.

결국 우리는 찰나의 점들이다. 그러나 그 점들이 모여 긴 여정을 이루고, 그 끝에서 눈을 감으며 만족을 느낀다.
어쩌면 궁극의 순간은 술 한 잔을 앞에 두고, 떠날 채비를 할지 마무리할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당신이 좋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짜여진 이야기라면, 그 안에서도 충분히 느끼고 살아보겠다.
그 감정의 저편에는 깊은 슬픔을 넘어선, 아주 지독한 사랑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기에—
오늘도 나는 이 세상을 마주한다. 김성호 E/ ChatGPT.


* Source of Voice : https://youtu.be/MggJiiCi8us?si=BRmKe2-K8ceYX7s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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