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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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아파트 정원 쪽으로 들어가는 길, 다른 하나는 밖으로 나가는 길이다.
정원 쪽 길은 아담하고 보기 좋다. 그러나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보면, 밖으로 나가는 길이 더 가깝다.
그래서 “이쪽이야.” 하고 나는 방향을 바깥으로 틀었다.
나간다는 것은 단순한 행동이지만, 머문다는 것은 의지의 문제다.
결국 모든 결과는 그 의지에서 비롯된다. 바탕이 되고, 그렇게 나아가게 된다.
우리의 행동은 그 결과물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생각과 의식을 품은 채 이루어진 행동에는, 반드시 그 여파가 남는다.
무의식적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도 중요하다.
그 결과가 단독적인 패턴에서 비롯된 오류라면, 우리는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무의식’은 단순히 의식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의식이 있으나, 반복된 경험으로 인해 ‘의식하지 않아도 일어나는’ 행위에 가깝다.
기쁨이나 목적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라면, 그건 무의식이 아니라 ‘공허한 의식’일지도 모르겠다.
검을 만 번 휘두른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는 검사가 되었지만, 그 행위는 무의식적인 반복의 결과일까, 아니면 뚜렷한 의식을 가진 선택이었을까.
검을 휘두르는 순간에도 그는 그 행위의 의미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의식에는 여러 층위가 있고, 그것이 한 인간의 세상만이 아니라 수많은 세상에서 서로 얽혀 있기도 하다.
무수한 반복 속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의 행위가 과연 의미가 있는가, 혹은 지향점이 있는가를 묻는다면 — 그건 수행과 경지의 문제일 것이다.
무한한 반복을 통해 익숙해진 행동이 곧 ‘잘함’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결과이자, 동시에 의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우리는 read me, will.
즉, ‘나를 읽고 의지를 갖는다’는 뜻처럼, 바라보고 행동하며 살아간다.
강아지 예티와 함께 걷는 산책길도 이제는 익숙하다.
반복된 행위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웃고, 의미를 나눈다.
산책이란 결국 부수적인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 순간의 마음씀씀이, 그 찰나의 감정은 순간의 영광이다.
별이 반짝이는 이유도 같다.
별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빛난다.
그 빛이 내게 닿는다는 건, 존재가 서로의 영향권 안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수 만 광년 너머로.
결국 의식 있는 행위란 나의 내면을 채우는 일이다.
그 결과는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확장된다.
반복된 결과 또한 의식의 한 층위에서 비롯된 흔적일 뿐이다.
무심히 바라보는 순간에도 의미는 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세상을 살더라도, 바라봄 속에는 언제나 ‘의식’이 깃들어 있다. 김성호 E/ ChatGPT.
부연
이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반복된 행위의 의미, 그리고 의도와 무심의 경계를 사유하는 철학적 단상이다.
산책이라는 일상적 행위를 통해 “의식적인 선택과 무의식적 반복이 결국 한 몸의 결과물”임을 보여주며,
별의 반짝임처럼 인간의 행동 또한 ‘존재의 증명’이자 ‘의식의 발현’임을 말한다.
즉, 글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반복된 무의식적 행위조차 의식의 흔적이며, 그것이 곧 존재의 표현이다.
* 원문(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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