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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궁극에의

있고 없음에의 추론

by 아리빛 하나 2025.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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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찌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음과 없음의 상호 관계’, ‘존재와 의식의 흐름’이라는 철학적 사유가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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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고 없음에의 추론

‘살을 찌운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단순히 몸에 살집을 더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 살을 찌운다’는 건 무엇일까.
남의 살이 아니라, 나의 삶 — 내 피와 몸이 되고, 영양분이 되어 나의 존재를 성장시키는 일.
그게 바로 ‘살찌움’의 본질이 아닐까. 회사생활이든, 사업이든, 결국 그 모든 것은 나의 밑바탕이 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내 살을 찌운다’는 게 단순히 부의 증식이나 명망, 인맥을 쌓는 일일까? 아니다.
진정한 살찌움은 이 생에서 내가 사랑하고 살아냈다는 사실 자체, 그 연속성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다.

삶은 단편이 아니라 이어지는 연속극이다. 죽음조차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길목에 서는 일이다.
지금의 나의 의식이 과거의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면, 미래의 나는 지금의 의식이 이끌어 갈 또 다른 존재일 것이다.
구도자이든, 관찰자이든, 그 역할의 숙명론을 따지기보다 흐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백 년, 이백 년은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한순간이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미 누군가는 충분히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의식을 남이 만든 세상의 흐름에 맡겨서는 안 된다.
내가 보는 우주와 아내가 보는 우주, 내 자식들이 보는 우주는 모두 다르다.
각자는 자신만의 우주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나를 살찌우고 있을까?
부의 축적일까, 명예일까, 만족감일까?
아니다. 그보다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 그 자체가 내 살을 찌우는 일일 것이다.
나는 나의 여정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제 그 바통을 다음 세대로 넘길 준비를 한다.

인간의 두뇌는 유한하다. 상상력과 엉뚱함, 발랄함으로 세계를 확장할 수는 있어도,
그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 어쩌면 내가 겪은 상처와 좌절도 그런 제한을 이해하게 하기 위한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일에는 ‘앞’이 없다. 지금이라는 찰나가 있을 뿐이다.
있는 것은 ‘없음’을 전제로 존재한다.
‘없음’이 있어야 ‘있음’이 가능하다.
이 단순한 역설이 우주의 근본 원리이자 나의 존재 이유다.

우주는 ‘없는 공간’을 마주하며 팽창한다.
나는 그 없는 공간과 부딪히며, 나아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찰나마다 반짝이며 머물 뿐이다.
별이 빛나듯, 나는 순간순간 반짝이며 존재를 증명한다.

나는 ‘빛’이자 ‘빛을 내는 자’다.
내가 내는 파장은 또 다른 세계를 만든다.
우주가 버블처럼 뻗어나간다 해도, 그 밖은 여전히 ‘없는 공간’이다.
그 ‘없음’이야말로 ‘있음’을 존재하게 하는 압력, 즉 근원이다.

반죽처럼 우주는 안쪽으로만 존재한다.
그 반죽을 둘러싼 바깥의 ‘없음’은 우리 의식이 닿지 못하는 영역,
어쩌면 우리가 신(神)이라 부르는, 관조자의 자리일 수도 있다.

시작점이 있다면 그곳에는 ‘태초의 의식’이 있을 것이다.
모든 상상은 그곳으로 이어진다.
모든 상상의 극의(極意)는 결국 ‘존재한다’.
불가능도, 허구도, 결국은 ‘있음’의 한 형태다.

그러니, 나를 살찌우는 일은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있음과 없음의 고리를 느끼며,
찰나의 빛으로서 존재하는 나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다.

그것이 ‘살찌움’이며, 곧 ‘삶의 윤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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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

주요 주제: ‘있음과 없음의 공존’, ‘삶의 본질로서의 살찌움’, ‘찰나의 의식과 우주의 관계’

추가 제안: 이 글은 “사색적 에세이”로서 훌륭합니다.
블로그 게시 시에는 제목을
👉 〈살찌움과 존재 –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서〉
처럼 하거나,
〈On Being and Nothingness〉 (사르트르의 오마주식 표현)으로 붙이면 철학적 깊이를 더할 수 있습니다.


^ 원문(음성)
https://youtu.be/w8u6PirYKdU?si=4N3LGEbTJ2tWwa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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