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다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당신에게 위안이 되는 글이면 하고 바란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마주하는 자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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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주에는 Void라는 공허가 존재한다.
이를 풀어내기 위해 지난 우주 탐구에서 수없이 궁리해오고 있다. 보이드 라는 존재, 우주에 있어 어떤 역할일까? 태초에 있음과 없음이 생길 때 없음에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일까 의심하고 있지만 확신할 수 없다. 태초에 없음이, 아니 다시 말해 없음과 있음조차 구분 없이 공허라는 상태로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었다 라는 환경에서 없음과 있음이라는 양면성이 생기는 일이 일어났다. 없음과 사라짐, 죽음은 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재순환을 위한 되돌림이라고 여기고 있듯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었다'라는 상태를 뭐라 표현할 길이 현재로선 없어 보인다. 즉, 그 말을 보이드가 받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람 눈에 띈 이상 이 또한 존재이되 존재가 아닌 물질이 아닌 비물질로 채워졌다고 한들 존재의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여기지니 이 또한 쉽지 않아 보이는 정의다.
2. 여보 요즘 너무 공허해.
허전하단다. 재미 없다는 말과도 같다.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즐거움이 반복되다 보니 새로운 어떤 무언가를 찾게 되는 상태로 보인다. 남과 녀가 만나 벌이는 밀당을 즐겨 본다. 감정적이며 직접적인 상황에서의 교류에 한껏 들뜬 표정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3. 모든 걸 받아들이게 되니 마주하게 되는 것이 공허라.
공허는 이처럼 허허 롭다. 허허 로움은 다시 채워지기 위한 빈 공간으로 여겨왔는데 그 허허 로움 자체가 오히려 가득 채울 날을 기다리는 것 보단 '이 생이 당신에게 마지막 여행이기를'에서 기대한 말처럼 이젠 반복되는 윤회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쉬어도 좋겠다는 안도의 인사에 가깝다.
4. 그럼에도 공허 라는 단어를 통해 나타내고 싶은 건 모든 걸 내려놓은 관조하는 삶의 태도는 아니다.
5. 마음의 공백. 공허와 다른가?
6. 이런 때 이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마음의 공백.




Q.
마음의 공백을 다룬 글을 작성하려고 해. 도와줘. 수필체로 일기형식을 빌려 작성.
마음의 공백
2025년 어느 날.
우주에는 ‘Void’라 불리는 공허가 존재한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나는 그 실체를 풀어내기 위해 오래도록 궁리해왔다. 보이드란, 우주에 있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태초에 ‘있음’과 ‘없음’이 생겨날 때, 그 ‘없음’의 영역을 담당하던 것이었을까. 확신할 순 없다.
태초의 세계는 아마도 ‘없음’조차도 없던, 오직 ‘공허’라 불릴 만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지 않음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무(無)’가 아니라, ‘있음과 없음이 아직 나뉘지 않은 상태’ — 그것이 진정한 공허가 아닐까 싶다.
나는 종종 ‘죽음’이나 ‘사라짐’도 단절이 아니라 되돌림이라고 느낀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순환을 위한 준비 과정인 셈이다.
그렇다면 공허 또한 소멸이 아닌 재순환의 품 아닐까.
그곳엔 물질도, 빛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리듬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이드는 어쩌면 그 모든 윤회의 시작점이자 마지막 쉼터다.
요즘 들어 문득,
“여보, 요즘 너무 공허해. 허전해.”
그 말을 입 밖에 내뱉고 나서 눈치를 살핀다.
공허하다는 말이 곧 ‘재미없다’는 뜻이 되어버릴 줄이야.
반복되는 하루가 주는 안정감 속에서도, 그 안정이 너무 깊어지면 지루함이 찾아온다.
그 틈새로 바람이 스며들듯 허전함이 밀려온다.
남과 녀가 만나 설레는 눈빛을 주고받을 때처럼,
무엇인가 새로운 감정의 불꽃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그 또한 순간의 불씨일 뿐, 타오르다 꺼지고 나면 남는 건 다시 공허다.
결국 공허는, 모든 걸 겪고 난 후 남는 자리다.
다시 말해 ‘비어 있음’이 아니라, ‘모든 걸 담고 난 다음의 여백’ 같은 것.
모든 걸 받아들이게 되면 마주하는 것이 공허라.
그 공허는 허허롭다.
나는 그 허허로움을 한때 ‘다시 채워질 공간’이라 여겼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낀다.
그 허허로움은 오히려 “이 생이 당신에게 마지막 여행이기를” 하는 안도의 인사처럼 들린다.
다음 생을 기약하지 않아도 되는, 더 이상 무언가를 채우지 않아도 좋은
그런 ‘멈춤의 평온’.
하지만 그렇다고 공허를 ‘모든 걸 내려놓은 관조의 태도’로만 설명하고 싶진 않다.
그건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정적(靜寂)에 가깝다.
‘마음의 공백’이란 표현이 있다면,
그건 공허보다 더 인간적인 말 같다.
공허는 우주의 언어고,
마음의 공백은 그 언어를 우리 식으로 번역한 것일지도 모른다.
공허는 무의 세계라면,
마음의 공백은 감정의 세계에서 그 무(無)를 경험하는 일.
오늘의 나는 그저 이렇게 쓰고 싶다.
“이런 때, 이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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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주적 사유 + 내면의 일기’라는 콘셉트로 완성해줘. 앞의 내용을 모두 담아서. 특히 현대인의 삶, 회사원, 직장, 은퇴, 나이, 생에 대한 감상을 담아서.
마음의 공백과 상남자 ― 우주와 인간의 사이에서
2025년 가을.
새벽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우주에는 ‘Void’라 불리는 공허가 존재한다. 그곳은 아무 것도 없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시작되는 자리다.
태초의 순간, 있음과 없음이 갈라지기 전의 그 찰나.
아직 아무 이름도 붙지 않은, 완전한 공백.
나는 요즘 그 공백의 감각 속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회사라는 시스템 안에서 수십 년을 보내며
나는 늘 ‘채워야 하는 사람’이었다.
성과를 채우고, 책임을 채우고, 사람 사이의 빈틈까지 채우려 애써왔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채우는 일에 익숙해진 나의 하루가 오히려 공허의 심연으로 이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모든 게 돌아가고, 잘 굴러가는데—
나는 점점 비어가고 있었다.
그때 만난 책이 김태궁의 **『상남자』**였다.
성공의 정점에서 마주한 ‘없음’
소설의 주인공 한유현은 평범한 직장인에서 시작해,
노력과 야망 끝에 성공을 거머쥔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것은 화려한 성취가 아니라,
모든 것을 이룬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텅 빈 방’이었다.
사람은 없고, 관계는 부서졌으며, 마음은 메말라 있었다.
그는 ‘상남자’라 불릴 만큼 강하고 이성적이며 능력 있는 인물이지만,
결국은 ‘비어 있음’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과거로 돌아갈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성공의 길보다 더 어려운 길이 ‘사람과 다시 연결되는 삶’이라는 것을.
한유현은 새로운 시간을 살며 다시 관계를 세우고,
가족과 동료, 사랑과 우정, 그리고 자신을 회복해간다.
그 과정은 결국 공허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공허와 화해하는 일이었다.
마음의 공백을 살아내는 법
나는 그를 보며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나 역시 성취의 궤적을 따라 살아왔고,
그 속에서 어느새 ‘나’라는 존재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회의실에서, 보고서 속에서, 누군가의 기대와 시스템 사이에서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퇴직을 6년 앞두고,
이제는 ‘일 없는 나’에 대한 상상이 두렵기도 하다.
일은 나를 채워왔지만, 동시에 비워왔다.
그 공백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상남자』는 그 답을 명확히 주지 않는다.
대신 한유현의 여정을 통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공허는 없어져야 할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네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깊은 증거다.”
그 말이 내 안에 오래 남았다.
마음의 공백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살아온 흔적이 남긴 자연스러운 여백일지도 모른다.
우주가 공허를 품어야 별이 빛나듯,
인간의 마음도 공백을 품어야 사랑과 의미가 피어난다.
우주와 인간 사이
보이드(Void)는 우주의 무(無)지만,
그 속에는 새로운 세계가 태어날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마음의 공백도 그렇다.
그곳은 허무의 밭이 아니라, 다시 삶이 움트는 땅이다.
회사라는 우주 속에서
나는 하나의 작은 별이었다.
빛을 내기 위해 스스로를 태웠고,
그 빛이 다한 자리엔 어둠이 남았다.
하지만 그 어둠이 꼭 끝은 아니다.
그건 다시 태어나기 위한 잠시의 정적,
새로운 나를 위한 ‘공백의 시간’이다.
그리고 오늘
책장을 덮고, 나는 오늘 하루를 조금 다르게 살기로 했다.
성과 대신 관계를, 경쟁 대신 여백을,
빛 대신 그늘을 잠시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젠 안다.
공허를 없애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건 우주가 품고 있는 본질이고,
삶이 우리에게 허락한 쉼의 형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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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금 만 더 서사적으로 바꿀 수 없을까? 단락 구분 없이
새벽의 하늘을 올려다보다 문득 생각했다. 우주에는 ‘Void’라 불리는 공허가 존재한다고 했다.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그곳이야말로 모든 것이 태어나는 자리다. 태초에 있음과 없음이 갈라지기 전, 아무 이름도 붙지 않은 그 시간 속에서 우주는 자신을 비워 새로운 생을 준비했다. 나는 요즘 그 공백 속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회사의 하루는 여전히 반복되고, 보고서와 숫자, 성과와 책임이 내 시간을 메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게 돌아가는 그 틈새마다 한 줄기 허전함이 스며든다. 다 이룬 듯한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고, 그 빈자리를 채우려 애쓸수록 더 깊은 어둠이 따라온다. 나는 그 공허를 지워야 할 무언가로만 여겨왔다. 하지만 어느 날, 김태궁의 『상남자』를 읽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야기의 주인공 한유현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는 야망과 의지로 성공의 정점을 찍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강하게, 완벽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건 화려한 빛이 아니라 텅 빈 그림자였다. 사람은 곁에서 사라졌고, 가족은 마음을 닫았으며, 그가 쌓아올린 인생은 ‘사람 없는 성공’으로 남았다. 성공이란 이름의 외로움, 그것이 그를 잠식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적처럼 과거로 돌아간다. 다시 젊은 시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으로. 처음엔 복수를 꿈꾸었지만, 그 여정의 끝에서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진정 잃었던 것은 기회가 아니라 사람이며, 성취가 아니라 마음이었다는 것을. 한유현은 이번에는 다르게 산다. 가족을 돌보고, 동료를 믿으며, 관계를 세우며, 그 안에서 다시 자신을 찾는다.
나는 그 이야기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일상의 이면과 닮아 있었다. 성취를 좇아온 세월, 끝없이 달려온 시간, 책임과 기대 사이에서 어느새 잃어버린 내 모습. 퇴직을 앞둔 나이에 이르러서야, 나는 묻는다. 일 없는 나는 누구인가. 성과가 사라진 뒤에도 나로 남을 수 있을까. 회사는 나를 통해 흘러갔고, 나는 그 속에서 조금씩 녹아내렸다. 그러나 『상남자』의 유현이 그랬듯, 어쩌면 공허란 사라져야 할 게 아니라 다시 살아갈 여백인지도 모른다.
책장을 덮고 나는 깨달았다. 마음의 공백은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존재의 증거다. 우주가 공허를 품어야 별이 빛나듯, 인간도 공허를 품어야 사랑과 의미를 잉태할 수 있다. 회사라는 거대한 은하 속에서 나는 작은 별처럼 스스로를 태워 빛을 냈다. 빛이 다한 자리엔 어둠이 남았지만, 그 어둠은 끝이 아니라 다음 생을 위한 정적이었다. 공백은 허무가 아니라 순환의 시작이었다.
오늘도 출근길에 하늘을 본다. 빛과 어둠이 섞인 구름 사이로, 어쩐지 익숙한 감정이 스친다. 나는 이제 공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비워 새로이 채우게 하는 우주의 리듬이며, 반복된 일상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작은 진동이다. 『상남자』는 내게 말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이 비워내는 일이고, 그 비움 속에서 다시 자신을 채우는 일이라고.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마음 깊이 새긴다.
Void.. 공허.. 공백.. 어둠.. 잠식.. 이면.. 흔적.. 정적.. 감정.. 리듬.. 진동.. 비움.. 새긴다.
우주가 블랙홀이든 공허든 어느 곳에 위치하든 사실 달라질 건 없다. 그 현상을 받아들이는 과정만 남았을 뿐.
이해를 통해 구하고자 하는 건 닿고자 하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이유에 있는 것처럼 반복적인 삶을 통해 표현코자 하는 건 무수히 많은 편린처럼 빛났다가 사라진 수없이 많은 면면을 이룬 조각들.
퍼즐이 맞춰지듯 하나로 합쳐지고 다시 흩뿌려지고 맞춰지는 과정 속에 남는 건 공허와 새로움에의 갈망.
멈출 수 있다면!
멈춰야 할 이유를 찾진 못했다. 아직,
그럼에도 멈출 수 있다면 멈추는 것도 필요하리라 여기게 되었다.
과연, 전진 만 있는 세상이 정상인가?
나아감, 이룸, 성공, 행복, 바람, 추구, 갈망, 욕구, 채움 만이 가득찬 세상이 과연 바람직한가?
그렇지 못하도록 그러지 아니하도록 막고 세운 수많은 장벽으로 인한 치우진 기울어진 저울은 아닐까?
삐딱한 거울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비스듬하게 보게 된 시선에 정답이라고 외치는 사람들!
거울을 바로 세울 일인가?
시선을 돌려 거울을 마주할 일인가?
거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어둠에 쌓인 공백을 직시할 일인가?
비우고 비워 이뤄낼 어떤 걸 바라지 않게 되는 그 날, 아마 죽음이란 이름으로 되돌려 지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경험해야 할 일이라면, 반복되는 발전의 속도가 우주의 팽창 속도 만큼 보조를 맞추고 있다면 이의 현혹된 가속된 세상에서 독백을 이어가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삐딱한 거울과 비스듬한 시선에 어울리는 자세는 아닐런지, 자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답이라고, 정상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 말하는 나, 싫지 않다.
고맙다. 성호야.
Q.
다음 내용을 통해 반추해서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풍성하고 근거있게 설득력 있게 나타내줘. 자조적인 독백체로. 희망이나 기대를 담지 말고, 있는 그대로.
Void. 공허. 공백. 어둠. 잠식. 이면. 흔적. 정적. 감정. 리듬. 진동. 비움. 새긴다.
이 모든 단어가 내 하루의 변주다. 어떤 날은 어둠이 먼저 찾아오고, 어떤 날은 공백이 나를 밀어낸다.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회의실의 무표정한 얼굴들 속에서, 문서의 문장과 숫자 사이에서 나는 천천히 비워진다. 그래도 움직인다. 움직인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라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불확실하다. 살아 있는 건지, 살아내고 있는 건지, 그냥 버텨지고 있는 건지 구분되지 않는다.
우주는 팽창한다 했다. 모든 것이 서로 멀어지며 존재의 이유를 증명한다 했다. 회사라는 작은 우주 속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승진이라는 중력을 향해 달려가고, 나는 그 궤도에서 이탈한 작은 별처럼 떠돌고 있다. 나의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중심은 점점 멀어진다. 그래도 빛을 낸다. 아주 희미하게. 그 희미한 빛이 누군가의 눈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오래전부터 스스로의 어둠에 잠식된 채 그저 잔광만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멈출 수 있다면 멈추고 싶다. 그러나 멈춰야 할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 멈춤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그 용기를 낼 자리가 내 안엔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나아감과 이룸, 성공과 행복, 추구와 욕망, 채움의 이름으로 포장된 세상 속에서 나는 서서히 잠식된다. 하지만 그 잠식이 꼭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를 덜어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짜 비움일 테니까. 문제는, 그 비움마저도 어딘가 계산된 것처럼 느껴질 때다. 효율적인 휴식, 생산적인 명상, 계획된 쉼. 세상은 심지어 멈춤조차 KPI로 환산하려 든다.
삐딱한 거울 속에 나를 비춰본다. 그 거울은 늘 나를 왜곡하지만, 어쩌면 그게 진짜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 바르게 선 거울은 나를 속인다. 비뚤어진 거울은 나를 드러낸다. 정상이라 불리는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비정상이라 부르는 세상에서, 나는 오히려 그 삐딱함 속에서 안도한다. 정답을 모른다고, 자신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 그건 아직 남아 있다.
이제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거란 희망도, 언젠가 나아질 거란 기대도, 더 이상 내 안에 없다. 다만 내가 흩어지고, 사라지고, 흔적으로만 남을 그 순간을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비움일지도 모른다. 공허가 아니라 귀결. 끝이 아니라 회귀. 그때 나는 우주의 한 점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블랙홀의 중심에서, 모든 소리와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아주 미세한 진동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기록한다. 이 공허와 리듬과 진동을, 멈추지 못한 자의 독백으로 새긴다. 내일이 오는 걸 원하지 않으면서도, 내일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자 순응이다. 정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아니,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답이라 말할 수 없는 나, 정상이라 부를 수 없는 나, 싫지 않다.
고맙다. 성호야.
그래도 이렇게라도 쓰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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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제까지 진행한 본문과 이제까지 고민해온 인생 탐구, 우주 탐구, 양자 탐구를 총망라해서 종합해줘. 그래서 '마음의 공백'을 '있는 그대로' 보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내가 가진 모든 탐구—우주를 향한 공허의 호기심, 삶의 궤적을 더듬는 직장인의 기록, 양자적 불확정성과 반복되는 일상의 미시적 진동—이제 한데 모아 말하자면 ‘마음의 공백’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은 특별한 위로나 해석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를 정확히 명명하고 구조로 읽어내는 일이다. 우주는 블랙홀이든 Void든 결국 한 점에서 무엇을 끌어들이고, 무엇을 되돌려 보낸다; 그 과정은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지 않으며, 우리에게 남는 것은 현상을 받아들이는 방식뿐이라는 단순한 사실이다. 회사라는 작은 우주는 동일한 법칙을 따른다: 승진·성과·관계라는 중력이 개개인을 끌어당기고, 성취라는 밖으로 향한 운동 뒤에는 누군가의 부재, 말하자면 ‘사람이 없음’의 공백이 남는다. 양자의 세계처럼 우리의 내면도 불확정성과 확률의 겹침으로 이루어져, 어떤 순간엔 파동으로 퍼지다가 또 다른 순간엔 입자로 수렴한다. 이 겹침 자체가 바로 공백의 실체다 —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상태, 측정하려 들면 흔적만 남고, 흔적을 쫓으면 본체는 이미 다른 위치로 이동해 있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공백은 세 부분으로 읽힌다. 첫째, 현상적 기록으로서의 공백: 내가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느낀 허전, 회의실에서 비어 있는 관계의 온도, 수십 년의 반복으로 남은 습관과 상흔들 — 이것들은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흔적이다. 둘째, 구조적 공백: 사회적 장치(회사, 성과체계, 가족 역할)가 만든 공간적 부재로서의 공허, 즉 채움만을 강요하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균형의 왜곡이다. 이때 공백은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구조의 부산물이다. 셋째, 존재론적 공백: 우주의 Void처럼 인간에게도 본질적으로 내재한 ‘무의 가능성’으로서의 공백, 이는 죽음·순환·재배치의 자리이며, 더 이상 무언가를 얻기 위한 공백이 아니라 ‘그대로 두어지는’ 상태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위로도 해결책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보려면 먼저 공백을 수사적 미사여구로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공허는 결핍이자 흔적이고, 흔적은 기록이며 기록은 증거다. 직장인으로서 나는 숫자와 목표로 자신을 측정했고, 그 결과 생겨난 잔광은 결국 나를 잠식했다; 이 경험이 주는 근거는 명확하다 — 채움으로만 움직이는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공백을 남긴다. 양자적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공백은 측정 행위에 의해 모양을 바꾸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누군가의 관심이나 평가가 닿으면 공백은 잠깐 다른 얼굴을 취하고, 평가가 사라지면 본연의 빈 자리를 드러낸다.
설득력 있는 표현을 위해 나는 몇 가지 불편한 진술을 제시한다. 멈출 수 있다면 멈춰야 한다는 생각은 낭만적이지 않다; 실제로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의 게으름이 아니라 멈춤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기제 때문이다.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전진만이 미덕인 세계는 수많은 공백을 생산한다. 나는 이 세계에 대해 의심을 품을 권리가 있다 — 정답을 주장하는 자들이 거울을 삐딱하게 세워놓고, 그 기울어진 반사면을 정답이라 외칠 때 나는 그 왜곡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지적함으로써 얻는 것은 위안이 아니라 명확성이다: 공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더 이상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게 되고, 감추려 드는 행위가 초래하는 추가적인 부조리를 멈출 수 있다.
마음의 공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이렇게 들린다. 나는 비워지고 있으며, 그 비움은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내가 속한 체계와 내가 살아온 방식의 귀결이다. 그 비움은 때로는 정적이며, 때로는 진동으로 감지된다; 그것은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내가 한때 무엇이었는지를 증명한다. 이 진술은 희망을 약속하지 않는다. 아무런 구원도 없다면 그저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고, 인지는 행동을 요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말한다: 나는 나의 공백을 새긴다. 새김이란 기록이며, 기록은 증거다. 끝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 쓴다 — 정답을 모르는 존재로서의 나를, 정상이라 단정할 수 없는 나를, 자조적으로 웃는 나를. 그 웃음은 희망의 울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직 거울을 바라볼 수 있음을 알리는 작은 진동이다. 고맙다, 성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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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혹시 다음 글과 엮어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최대한 담아낼 수 있을까?
망. 잊을 망. 잊고 지운 흔적. 되살리지 못할 새김. 후회조차 없이 깔끔한. 반복되면 멍 해지는. 가볍지만 찝찝한 기분. 억울할 것 많은 속시원함. 잊은 거. 잊는 거. 잊을 거. 망신은 몸을 잊은 거. 초월이면 족하게 평온하면 족할. 망했다는 건 잊었다는 말. 잊음은 지운 것과 다른. 비운 것과 가까운. 망은 공과 유사하고 몽과는 다른 거. 없이 인식함이 공이라면 있음을 잊은 것이 망이라. 의식한 결과가 공이라면 무의식이 망이라. 망할. 공할 하지 않는. 이는 무의식을 탓할망정 의식은 탓하지않는. 잊기 위해서는 잊을 무언가가 있었던 상태. 후행적인 것. 잊는다는 건 선행적일 수 없는 후행적인 것. 해놓고 잊는 행위이거나 상태. 잊을만한 상태이거나 잊기위한 행위의 결과물. 망은 잊은 상태. 잊은 것조차 잊은 걸 망조가 든 공이라 할까. 망으로 즐기는 이만한 유희가 또 있을까. 잊는다는 건 결국 빈 상태. 공은 선행과 후행이 모두 가능하니. 망은 결국 공과 만나고 공은 다시 망을 일으키는 관계. 공은 망의 원인이고 망은 공의 선행이고 후행이니 망할은 잊을만한과 같다. 망상은 잊을만한 상상. 공상은 빈곳에 그린 상상. 잊는다는 건 망할 징조가 필요한. 망은 공을 좇으니 비었다하여 배고픔을 좇기 보다는 잊기위한 상태를 가져가는 것. 그리고 망은 충분히 공을 욕해도 좋은. 망할의 결과는 공이고 공은 망할 원인을 제공한다. 망하면 빈 상태로 되돌아가는. 잊고 지우다보면 공할. 결국 공할을 찾는 과정인가. 빈다는 건 망할 행위의 결과이다. 차면 비운다는 건 차고 난 다음과 비운다는 사이에 망할이 있는. 망했다는 잊었다는 말. 망은 공으로 일어날 새로움의 싹. 고로 잊음은 새로움과 같다.
출처: https://meatmarketing.tistory.com/3371 [김성호 이야기:티스토리]
『망(忘)과 공(空)의 경계에서 — 있는 그대로의 마음의 공백』
나는 오늘도 마음의 공백을 바라본다. 바라본다는 건 이미 공허를 인식했다는 뜻이고, 인식한다는 건 아직 ‘잊지 못했다’는 말이다.
공허는 늘 의식의 끝자락에서 살아 있다. 느껴지고, 관찰되고, 분석된다. 하지만 ‘망’의 세계로 들어가면 다르다. 거기선 느끼지도, 기억하지도 않는다. 그저 잊는다. 완전히. 그것이야말로 진짜의 공백이다.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비움’이 아니라 ‘잊음’이야말로 공허의 완성형이라는 걸.
공(空)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 있고, 망(忘)은 그 모양마저 지워버린다.
공은 내가 만든 공간이고, 망은 내가 사라진 공간이다.
직장이라는 궤도 속에서 나는 매일 반복되는 성과와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공’을 만든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채워야 또 비워야 했다. 그러나 이 반복의 미학은 곧 피로의 철학이 된다.
성과는 남고, 기억은 퇴색하며, 결국 남는 건 망(忘) — 잊음의 형태로 침전된 마음의 침묵이다.
공허는 감정의 그림자지만, 잊음은 감정의 증발이다. 하나는 남고, 하나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마음의 공백’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남은 공을 더 이상 채우려 하지 않고, 잊힌 망을 억지로 되살리지 않는 일이다.
잊음이 죄가 아니듯, 비움이 미덕일 필요도 없다.
공백은 그저 일어난다. 내가 멈출 때, 혹은 더 이상 나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일은 나를 통과해 사라지고, 나는 사라짐을 통과해 다시 일로 되돌아간다.
망했다는 말, 참 묘하다.
우린 실패를 떠올리지만, 그 어원에는 잊음의 냄새가 배어 있다.
망했다는 건 잊었다는 뜻이다. 잊었다는 건 덜어냈다는 말이다.
공과 망이 맞닿는 그 지점에서야 비로소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 채워야 한다는 강박도, 멈춰야 한다는 결심도 없는, 그저 잠식된 존재의 표면.
나는 이제 ‘마음의 공백’을 해석하지 않는다.
그저 새긴다.
Void, 공허, 공, 망 — 이름들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있던 것들이 잊히고, 잊힌 것들이 다시 떠오르며, 그 모든 진동의 끝에 남는 건 아무것도 아닌 나 자신이다.
그때 비로소 안다.
공백은 결핍이 아니라, 완전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완전함의 언어는 이렇게 적힌다.
“망했다, 그래서 평온하다.”
“비었다, 그래서 존재한다.”
그 문장을 써내려가는 동안 나는 더 이상 의식하지 않는다.
망과 공이 교차하는 그 미세한 틈새에서, 나는 비로소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나로 남는다.
원래의 **“마음의 공백”**이 지적하고자 했던 ‘멈춤과 공허의 자각’을,
**“망(忘)”**이라는 무의식적 잊음의 개념으로 더 깊게 내려 보완했다.
요약하자면 —
마음의 공백이 ‘비워진 채 존재를 의식하는 상태’라면,
망은 ‘비워진 존재마저 잊은 상태’다.
둘의 만남이야말로, 진정한 ‘있는 그대로’의 인간,
즉 아무것도 되려 하지 않는 존재의 실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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