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집(조직, 구조)을 먼저 지어야 할까? 그 집에 사는 사람(인재)이 먼저 일까?
마치, 닭(어미, 국가, 주는 것)이 먼저냐? 알(본질, 태동, 씨앗, 국민 1인, 줄 것)이 먼저냐? 의 모순에 빠지는 듯 하다. 요즘 고민이 많다. 자금 사정이 넉넉치 못한 상황에서 집을 지으려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돈도 없는데 집을 지으려 하느냐?"는 물음에 직면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는 6년 전에 결심한 바의 실현이자 미래 꿈의 둥지를 트는 시작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의지의 실현이다. 삶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이런 문제를 꺼내볼 수 있다.
집(꿈, 국가, 조직)이 먼저냐? 돈(도전, 실천, 의지)이 먼저냐?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만일, 양자 택일을 해야 한다면 사람마다 제각기 생각이 다를테고, 이를 굳이 실험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도대체 닭이 먼저일까? 알이 먼저일까? 여기에서도 이런 '결심'을 할 수 있다. '닭'이나 '알'(초점, 주제)을 놓고 '선택(의지의 발현, 결심)'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의 경우에는 '알(본질, 태동, 줄 것)' 편이요, '돈(도전, 의지)'의 편이면서 의지의 발현이요, 결심할 수 있는, 도전할 수 있는 '선택'의 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본질을 좇아 보는 것, 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도전, 선택)을 즐기는 것이라고 본다.
제2화. 선택의 문제를 풀어줄 것인가? 집을 지키려 노력할 것인가? 이 또한 선택의 문제일지니.
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크게 나눠보면 살아있는 집과 죽은 집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살아있는 집이라 함은 사람들이 꿈을 꾸고 즐기면서 교류를 나누는 그런 공간을 말하는 것일테고, 죽은 집이라 함은 마치 '폐가'처럼 과거 속 잔재로 남아있는, 그렇다고 의미가 없어진 것은 아닌, 향수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간으로 정의할 수 있다.
집은 '의미'를 가질 때에서야 비로소 존재이유를 찾을 수 있다. 마치,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의미를 지닌 '사람' 처럼. 때론, 단칸 방에서 시작하여 웅장한 빌딩으로 옮겨탈 수 있을 테고, 때론 야심차게 도전했으나 현재 쪽방으로 밀려나 웅심을 품고 있을 수도 있을테고, 초가집 하나 달랑 지어놓고 유지하려 애쓸 수도 있을테고, 빌딩과 빌딩 사이를 걸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하면서 꿈이요 욕망을 품은 채 꿈틀거릴 수도 있을테다.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어야 '의미'를 찾을 수 있듯이, 그렇다면 '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키는 것? 유지하는 것? 필요로 하는 어떤 것에 응하는 것? 다시 지을 수 있는 것? 한 번 짓고 마는 것? 이 또한 선택의 문제다.
집은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동체다. 그 공동체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필요는 열망과 꿈이다.
제3화. 집은 영속할 수 없다. 사람이라는 씨앗을 뿌려 다채로운 집으로 늘릴 수 있을 뿐이다.
집을 지었다고 하자. 이미 지어진 집은 의미를 지녔다. 그리고, 구성원이 모였다. 일사불란, 시행착오, 좌충우돌 꾸려나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짚어볼 만한 것이 있다. 이미 의미를 부여해 지은 집을 '집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지 말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집은 결과물이요 도전과 의지의 산물이요, 꿈의 상징일 뿐이지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니라고 느꼈을테다. 그렇다면, 현재 살고 있는 구성원들은 물어볼 수 있다. 그럼 나는 뭐냐고.
내가 볼 때 이미 지은 '집'이 의미를 갖고 그 본질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이미 지은 집 속에 '방(확장, 확대, 필요에 대한 응답, 변화에 대한 부응)'을 늘려야 한다. 왜냐하면 집이 지어진 필요(의미)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은 집은 지어진 순간부터 언제 끝날 지 한계가 분명한 추락하는 날개를 지니고 있다. 그 기간이 10년인지, 100년인지 다소의 차이가 있겠지만 집은 짓는 순간부터 한계를 지닌다. 우리는 종종 해체되고 묶여 다시 집을 짓는 경우를 접한다. 이것은 집의 본질을 향했다고 하지만 이또한 문제점은 안고 있다고 본다. 집을 꾸려나가야 할 '사람'이 이미 정해져있다는 한계를 말한다. 그렇다면, 집을 고치거나 합치거나 다시 지을 수 없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다만, 한계를 인정한 범위 위에 최대한 다듬어 집이 제모양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집을 해체하거나 묶는 것이 해야할 일라면 집을 짓는 방식은 이미 있는 사람을 배치하는 방식 보다는 원하는 집을 짓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부합하는 사람(인재)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
집은 필요한 이유가 변하면 당연히 변한다. 그것을 구성원들이 알든모르든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당연한 일이다. 필요한 이유가 적어지거나 없어진다면 단칸방 만하게 구색을 유지하거나 '제도' 속에 녹아 사라질 것이다. 집은 꿈을 꿀 수 없다. 존재의미를 지닌 채 그렇게 인정받는 일에만 익숙하다. 꿈은 집에 사는 사람이 꿀 수 있다. 꿈은 선택의 문제다. 집이 지어진 이유를 끊임없이 갈구하고 연구하여 그 시한부인생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이며, 집이 지어진 이유 자체(본질, 필요이유)를 바꿔나갈 수 있다.
지어진 순간부터 한계를 지닌 집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능을 갖추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 속에서 꿈을 꾸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집의 본질을 바꿔줄 수 있는 자, 집을 좀더 세련되게 꾸며줄 수 있는 자, 집을 널리 알려 필요이유를 늘릴 수 있는 자.
제4화. 집은 필요이유를 넓힌 순간부터 그 변화에 맞는 이름으로 개칭하여 인식을 넓혀나가야 한다.
집의 역할이 먼저냐? 집의 이름이 먼저냐? 라고 이 또한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떠할까? 나의 경우 후자에 두고 싶다. 집이 새롭게 역할을 해보았자 그것을 아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는 문제 뿐만아니라 이미 알려져 있는 집의 이름 때문에 새롭게 하는 역할과 부딪히고 불일치 되면서 원하는 바 보다도 오히려 뜻하지 않은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집은 짓는 순간부터 사명을 부여 받는다. 사명은 법이 아니다. 오히려 법 조차 개정된다. 변화는 생각 이상으로 빠르며 한 순간이다. 선택은 주어졌을 때의 일이다. 지나간 버스를 놓고 다음 버스를 타면 되지 하고 미루는 것 또한 선택이겠지만 해당 버스가 오고 안 오고의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집은 큰 울타리 속에 튼튼하게 지어야 한다. 그 바람이 맞다면 튼튼하게 지을 일을 해야 한다.
집의 영속을 꿈 꾸는가?
그럼, 당장 해야할 일들을 쭈욱 나열해 보자. 그리고 중요도에 따라서 그냥 하면 된다. 참 쉽다. 김성호.
'일기 > 우리가족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2월 15일 오전 06:58 (0) | 2014.02.15 |
---|---|
2014년 2월 15일 오전 06:08 (0) | 2014.02.15 |
2014년 주요 관심사 (0) | 2014.02.13 |
2013 농림축산식품부 현장기자단 활동집 (0) | 2014.02.12 |
김성호가 이야기 하는 '축산물 유통' 책자 구입 안내 (0) | 2014.02.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