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
원하는 것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진정한 갈증인지, 아니면 단순한 집착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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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가성 금전인가?
명예로운 자리인가?
이루고 싶은 목표인가?
그것이 정말 나와 공동체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기대나 관성에서 비롯된 것인가?
실현되지 않으면 없는 것인가?
실현을 삶의 목적이라 생각하는 건 지나친 집착이 아닐까?
모두가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만의 메아리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지지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존재는 바탕 위에 있다.
그러나 바탕은 곧 수단이 되고, 수단에 매몰되면 길을 잃는다.
존재의 양면성
우리는 찰나와 같다.
순간적으로 머물다 사라진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다.
삶이 시뮬레이션이든 현실이든, 우리는 그것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대가성 금전? 아니다.
- 명예로운 자리? 아니다.
- 실현 자체? 근접하지만 본질은 아니다.
- 행복인가? 확신할 수 없다.
-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인가? 아마도.
신경 쓸 것이 있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꼭 좋은 것도 아니다.
사는 것, 존재하는 것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
그렇다고 집착할 필요는 없다.
삶은 허망하고 덧없지만, 그 안에서 기쁨과 온기를 느낄 수도 있다.
잔잔한 물결처럼 스며드는 일상의 순간들.
나는 단지 산다.
그리고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보람이나 성취, 어울림을 넘어서.
별이 반짝이며 존재를 드러내듯,
나도 나라는 별로서 존재하고 싶다.
마치 숙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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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된 나에게'
https://meatmarketing.tistory.com/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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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천천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정말 필요한 갈증인지, 아니면 단순한 집착인지 자연스럽게 구별될 거야.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어. 언제든 다시 이야기 나누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천천히 들여다보기
대표회의. 대가성 금전을 원하는가? 명예로운 자리를 원하는가? 하고자 하는 바를 실현시키길 바라는가? 하고자 하는 바가 과연 나를 위하고 모임을 위한 것인가? 단지 맞다 거나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의 실현에 대한 추구인가? 실현이 결국 내 삶의 목적인가? 보고자 함인가? 실현되지 않으면 없는 것인가? 실현을 살아감의 주체로 보는 건 지나친 건 아닐까? 누구나 바라는 바인가 라는 질문에 굳이 그 속에서 그런 주장이 나 만의 메아리는 아닌가 하는 물음에 대해 자신있게 아니오 라고 말하지 못하는 건 지지를 얻지 못한 행태에 있지는 않은가? 굳이 하려고 한다면 막아야 했던 것이 잘한 일인가? 어디에 우선해야 하는가? 모임인가? 모임이 꾸려진 바탕인가? 그도 아니면 내 스스로의 삶인가? 아니면 우리네 삶이라고 봐야할까? 내가 나를 생각하고 자아를 성장시키는 건 잘한 일임에도 자아가 스스로 만족하고 보람을 찾는다면 이는 또한 한쪽 면을 채웠을 뿐, 양면 중의 다른 면은 또다른 자아나 세상이 있음을 어찌 바탕이나 배경으로, 환경으로 치부하고 말인인가? 바탕은 곧 나의 존재를 위한 터전이요 어쩌면 나를 정의내리기 위한 방법일터인데, 그 수단들을 깍아내린들 달라질 것이 무엇인가? 단지 찾기 원했을 뿐인데 찾기 위한 수단에서 오히려 잡아먹힌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나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존재는 바탕 위에 있다.
없이 있다.
있기에 없다.
찰나와 같이 머문다.
눈 깜박할 사이 우린 있다 없어진다. 없이 있어 다시 이어진다. 과연 하나의 현상으로 바라봐야 할지, 현상 마다 하나의 단면으로 바라봐야 할지 아리송하다. 그렇다고 해도 현상은 있고 그 현상이 비록 시뮬레이션이든 아니든에 무관하게 내 앞에 내 머리속에 내 상상 속에 내 꿈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현이 곧 허상이라면 우리 존재는 모두 있어 없이 되기 마련이다. 있어 없이 허상을 좇아 산다. 원하는 것이 진정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바탕에 치우쳐서 산다. 수단에 지나지 않다. 나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데, 또한 존재는 바탕 위에 있는데 어찌 바탕은 다시금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기에 양면성이 동전처럼 맞붙어 있다. 따로 떼어낸 존재가 아니라 존재라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모순 덩어리이리라. 있다가도 없이 없다가도 있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대가성 금전인가?
아니다.
명예로운 자리인가?
아니다.
실현하길 바라보는 것인가?
근접한데 적확하지 않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행복한 것인가?
모르겠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인가?
많이 근접하고 있다.
신경쓰이는 게 있다는 것이나 신경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 나쁜 일인가?
아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나 한가로운 것이 좋은 일인가?
아니다.
내가 느끼는 갈증은 무엇인가?
이루고 싶은 바가 있는가? 혹은 무엇인가?
원함이나 바람이 바탕 위에 부질없음을 깨달았는데, 그렇다고 아니하는 것도 아니면서 하고 있음을 보면 참으로 허망하고 허상스럽게도 잡스러운 일상임이 분명한데도 어찌 보면 소소한 일상에서의 기분 전환이나 어울림이 잔잔한 물결처럼 스며들며 훈훈함을 주는 건 그와 반대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까? 단지?
산다.
사는 걸 알고 싶다.
진정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단지 보람을 말하는 바가 아니다.
단지 성취를 말하는 바가 아니다.
단지 어울림을 말하는 바가 아니다.
원자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생성과 사멸, 그 과정에서 별이 빛나고 반짝이며 존재감을 드러내듯이 나라는 별 또한 존재감이 드러나길 바란다. 마치 숙명처럼.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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