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도한다.
바란다. 아니, 기록한다.
기록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이 모습이 과연 아닌 척할 수 있을까.
간절함을 담아 무언가를 남기는 이 행위를,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단지 너의 일상을 써내려간 것일 뿐이라고,
일기라고, 혹은 편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누군가는 기도문이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묶었다.
‘바람’이라는 말에 더해,
기도와 과연 무엇이 다른지 알고 싶었다.
> 일상 중 기도
“여보,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https://meatmarketing.tistory.com/8693
2.
기도한다.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늘 하루를 속삭이듯 건넨다.
지구에게, 우주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그렇게 나는 살아 있음을,
이 삶이 어딘가와, 누군가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영생을 약속받은들 무엇이 달라질까.
살아갈 모양새조차 이미 정해진 채,
주어진 미션과 환경 속에서
우리는 애써 ‘선택’이라 믿으며 살아간다.
그것을 멋지다 여긴다.
숙제를 끝낸 듯한 성취감에 안도하며
결국엔 스스로를 위로한다.
어느 재력가는 가진 것을 내려놓는다.
환원이라는 이름 아래,
사랑도 계획처럼 나누어졌을까.
이혼조차, 어쩌면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가 무엇을 믿었든,
세상은 빈틈 없이 그 스케줄을 집행하고,
우리는 거기에서 역할을 분배받는다.
환원하는 자,
지키려는 자,
가지려는 자,
그리고…
그저 살아내는 자.
우리는 그 모두를 ‘인류’라 부른다.
희극인지, 비극인지조차 모른 채,
하나의 무대 위에서 각자의 대사를 읊는다.
나는 살고 싶었을 뿐이라는 사람,
사랑이 떠난 자리에 주저앉은 사람,
세상을 이끌고 있다는 착각 속에 달리는 사람.
그들 모두, 정해진 스토리의 일부이자
또 다른 누군가의 변수일 뿐이다.
"어떻게 살래?"라고 묻지만,
이미 조건은 주어져 있다.
이미 누군가는 움직였고,
나는 그 결과의 그림자 안에 있다.
왜 움직이지 못하느냐고?
배가 고프니까.
굶주림은 가장 원초적인 멈춤이다.
나는 더 이상
맑은 시냇물을 두 손 가득 담아
아이의 입에 부어주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려 했다.
적어도 굶주림만은 물려주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그 약속은 지켰다.
하지만…
생명의 소중함이
어느새 사회현상의 방치로 사라지는 걸 보며
나는 또다시 망연자실 서 있다.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 아픔 앞에,
말도, 눈물도, 외면도 소용없을 때가 있다.
그저 가만히,
한낮의 볕 아래,
한 낱 그림자처럼
잠시 머물러 있는다.
그것마저도 작은 기도처럼. 김성호 E/ ChatGPT.
* 원문) 기도한다.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마치 속삭이듯이 알려준다. 지구에게 우주에게 님에게. 그리하여 내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만물과. 영생을 약속한 들 달라질까? 선택된 순간 살아갈 모습조차 이미 정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마치 그렇게 살아 라고 주어진 미션과 환경에서 해내고자 하는 의지를 우린 멋지다고 평한다. 주어진 숙제가 마치 거대한 파고를 넘어선 것처럼 여긴다. 그리고 성취감에 기꺼이 넘어간다. 아니, 빌게이츠는 99%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그 방식은 잘 모르겠지만, 과연 남겨진 아니 남긴 재산이 지닌 의미는 무엇일까? 혹시 이혼조차 사회 환원을 앞둔 계획의 일환이었지 아니할까? 사랑하는 이를 위한, 물론 아닐 것이지만. 그렇다 해도 짜여진 스케줄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속행한다. 환원하는 자, 지키려는 자, 가지려는 자, 그리고 지켜보는 자. 그리고 사는 자. 우리는 이를 묶어 인류라 칭하고 인생이라 논하며 한 평생 삶이라 말한다. 죽음조차 갈아놓을 수 없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그대의 모습이 변한 들 달라지지 않으리라. 감정의 편린이 살아있는 한 영원히 살아가리니 어찌 이다지도 배경에 녹아든 인물들이 한 바탕 연극을 무대에 꾸미는 존재마냥 비추어진다. 한 판의 시나리오, 한 편의 희극. 바라고 원하고 지키고 버티고 살아가는 군중들, 난 나는 살고 싶었을 뿐이라는 사람부터 사랑이 내 사랑이 떠난 자리에 애잔함에 빠져버린 사람들,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착각 속에 열심인 일꾼들이 그들 나름의 길을 찾아나서는 것조차 변수에 들지 못한다. 마치 정해진 스토리를 따라 살래? 아니면 어떻게 살래? 라고 묻긴 하지만, 과연 다른 질문일까? 여건을 주고, 조건과 환경이 이미 마련되어 있다. 알든 모르든 이미 주변의 변화는 일어나고 사람들은 움직이고 뭔가를 한다. 그 행위는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치고 움직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배고파서 이다. 굶주림이 싫다. 배고파 죽는 사람들을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다. 배곯아 아픈 이들을, 시냇물을 두 손 가득 담아 배를 채우는 모습을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진 않아 변해버린 세상을 우린 놓지 못하고 있다. 후배에는 넘겨주지 않으리라 한 맹세는 지켰다. 다만, 생명이 소중함을 사회 현상에 방치하는 모습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굶지 않겠다는 지켜냈는데 소중함을 잃은 듯한 모습에 망연자실 넋을 놓는다. 이 또한 수순이리라. 거대한 흐름을 엿보고 아는 채 하지 않길 잘했다. 한 낯 한 낫 볕에 가려 가만히 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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