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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어떻게살것인가

나는 왜 '생존학 개론'에 몰입했나?

by 큰바위얼굴. 2025. 5. 15.

https://www.youtube.com/watch?v=8mn32_vJc_Y



그러니까 왜일까?

살아남기 위해서 일까?

알아야 하기 때문일까?

단순한 유희일까?

생의 진한 향기 때문일까?



https://meatmarketing.tistory.com/8712

 

 

떨림은 어느덧 사라지고, 잠깐의 감성마저 공기 속에 흩어져버렸다. 삶은 단순히 살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삶을 이기기 위해 살아가야 했다. 그것은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무너져 내리지 않기 위한 버팀목 같은 것이었다.

나는 어느 날 백팩을 내려놓았다. 더는 나를 방해하지 않도록. 그 안에 담긴 짐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무기만을 챙겼다.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끝까지 버텨야만 했기에.

‘감정 강화제’는 내게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감정은 더 진해지지도, 방향을 틀지도 않았다. 그 쓸모없는 효과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그 안에서조차 내가 ‘나’라는 존재로 남아있다는 실마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고통도, 단절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망각이었다. 내가 누구였는지를 잃어버리는 것. 더 이상 살아갈 이유조차 모른 채 하루하루를 버티는 공허한 껍데기가 되는 것. 그 상실이 나를 가장 두렵게 했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새 출발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희망도, 재건도 필요치 않았다. 그저 껍데기만이 남는 삶, 그것만이 내게 허락된 존재 방식이었다. 복수를 위해 태어난 인간처럼, 나는 마음속 인간성을 죽이며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내 마음속에 약해지려는 무언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증오로 굳어진 심장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그 틈으로 오래전 잊혀졌던 이름이 흘러들었다. ‘줄리아’.

그 이름은 나에게 인간이었고, 감정이었고, 기억이었다. 그 존재는 망각의 저편에 있던 내가 다시 나를 부르도록 만든다. 결국, 나는 묻는다.

나는 왜 생존학 개론에 몰입했는가?
그것은 단순한 생존의 기술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나는 그 책을 통해 망각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법,
인간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법을 찾고 싶었다.

그것은 단순한 유희도 아니었고, 삶의 향기 때문도 아니었다.
오히려 삶이 내게 남긴 쓴맛,
그 너머를 건너기 위한 최소한의 훈련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생존학 개론을 펼쳐든다.
죽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나로 남기 위해. 김성호 E/ ChatGPT.


...

그리고, 
사유한다. 조금 더 가깝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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