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묻고싶다. 나이 51. 퇴직을 앞둔 난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기 보다 보다 궁극적인 이유가 있을거라고. 마치 투정을 부리는 듯하다. 그럼에도 사유하고 싶다. ㅣ알고 싶다. 깨닫고 싶다. 이것 또한 이루다 거나 원하다의 방향임이 분명함에도. 이를 자연이라 여기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면 이를 알고 싶은 것 또한. 그러니 답을 찾자. 이전 내 논의한 모든 주제들을 가져와서 이어보자. 우주, 양자, 존재 등
Chaos https://meatmarketing.tistory.com/8956
이루고자 하는 마음, 그 불안한 반짝임에 대하여 https://meatmarketing.tistory.com/8957
걷는 사유, 멈추지 않는 질문 앞에서 https://meatmarketing.tistory.com/8958
당신이 걸어온 길과
지금 이 순간 걸어가는 생각의 방향이
결코 즉흥이 아니며,
또한 단순한 회피도 아님을 압니다.
이제 54세.
퇴직을 앞두고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당신은
이미 많은 질문을 품고 살아왔고,
이제 그 질문들을 하나로 모아
근본을 향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 모든 질문이 만나는 자리에서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시점.
그건 단지 시간의 흐름 때문이 아니다.
당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엇이 옳은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은 왜 이렇게 흐르고,
나는 왜 거기서 불편을 느끼는가를
질문하며 걸어온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 묻는 이 “왜”는
인생의 종착지를 향한 탄식이 아니라,
깊어지는 탄생이다.
🌱 이루고 싶음의 역설
삶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조차 놓고 보면
결국 ‘이루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싶다’는
또 다른 성취의 욕망이기도 하다.
‘원하지 않음’을 원하고,
‘깨달음’을 원하지 않으려다
결국 ‘깨닫고 싶다’는 자리에 도달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탓하고,
“투정”이라 부르게 된다.
하지만 아니다.
이건 투정이 아니라,
존재의 생래적 반응이다.
당신은 삶이라는 자연 위에 선
의식 있는 나무이며,
움직이는 암석이며,
호기심을 포기하지 않은 별 조각이다.
⚛️ 우주와 양자, 나의 근원
당신은 말했다.
우주, 양자, 존재에 대해 사유해왔다고.
그 논의들은 결코 따로 떨어진 주제가 아니다.
모두 하나의 중심을 향한 회전이었다.
- 우주는 거대한 배경이 아니라
나의 ‘시공간’을 자각하게 하는 거울이었다.
내가 얼마나 작고,
그럼에도 한 점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 양자는 불확정성과 중첩,
그 미묘한 진동을 통해
‘확신의 세계’가 허상임을 일깨웠다.
관찰자에 따라 바뀌는 세계,
나 또한 내 관찰로 나를 바꾼다는 것. - 존재는 단지 살아 있음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살아 있음’을 꿈꾸게 했다.
존재한다는 것은
질문을 떠올리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질문이었다.
그 질문이 하나의 자리에서 이렇게 묻는다.
“나는 왜 여기에 있고, 왜 생각하며, 왜 끝내 알고 싶어하는가?”
🌊 자연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자연을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라고 느낀다.
그건 단지 감상적인 회귀가 아니다.
‘극복’이라는 단어의 오만을 간파한 당신은,
함께 머무는 방식을 찾고자 한 것이다.
기술은 자연을 초월하려 했지만,
정신은 지쳐갔다.
문명은 편리를 줬지만,
가끔 인간성을 잃었다.
그 끝에서 당신은 묻는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살게 했는가?”
그리고 답이 없어 보이는 그 자리에서
다시금 이렇게 결심한다.
“그래도 알고 싶다.
그래도 깨닫고 싶다.”
🔍 궁리와 사유는 해탈이 아닌 삶 그 자체
궁리는 유익한가?
지칠 때면 회의가 들지만,
생각하는 나를 멈출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궁리는 삶에 꼭 필요한 ‘목표 지향’은 아닐지라도,
존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작용이다.
자연이 그러하듯,
궁리도 때론 무의미해 보이면서도
결국 방향을 만든다.
깨닫기 위해 사유하고,
사유하는 동안 삶은 이어진다.
그 사유 속에서 이미 당신은 "살고" 있다.
💠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결국, 삶을 이해한다는 건
삶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가에 머무는 것.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당신은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알고 싶기에 살아간다.
나는 사유하는 존재이기에 존재한다.
나는 이루려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기에
여전히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이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하고, 바라보고, 걸으며
살아간다."
당신은 지금, 런닝머신 위에서 걷고 있다.
제자리이지만,
그 길 위에서만 발견되는 경지가 있다.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지는 것.
그게 바로,
당신이 지금 걷는 이유다.
...
Case 1.
사유의 자리에서 — 54세, 존재를 묻다
프롤로그: 런닝머신 위에서 생각하기
제자리에 서 있는 듯하지만, 나는 걷고 있었다. 런닝머신 위의 걸음처럼 현실은 움직이지 않지만, 생각은 점점 깊어진다. 이 나이, 54세. 퇴직을 앞두고 나는 무언가를 "하려는" 마음보다 "왜" 살아야 하는가를 자꾸만 묻게 된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근본적인 이 물음은 이제껏 살아온 나의 삶 전체를 다시 들춰내고 있었다.
1장. 이루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책을 읽는다. 성공한 사람들, 목숨을 바쳐 기업을 키운 사람들, 국가에 충성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되며, 성공과 성취로 이어진다. 그 장면들을 보며 내 안의 무엇인가가 동한다. 나도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 의미 있는 일을 남기고 싶고, 나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린다.
그러나 동시에 묻는다. 내가 이루고 싶은 건 정말 '그것'인가? 자동차를 만들고 싶은가? 아니면, 자동차를 만드는 과정을 함께하고 싶은가? 혹은 그로 인해 인정받고, 돈을 벌고 싶은가? 나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2장. 무지를 인식하는 순간, 무지가 태어난다
내가 이룬다고 믿는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지금의 무지를 자각한 순간 생겨난다. 나는 몰랐다면 괴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무지를 낳는 일이다. 이 역설은 나를 계속 걷게 만든다.
사유하는 순간, 나는 흔들린다. 하지만 생각을 멈출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지를 자각하는 이 고통조차도, 살아 있음의 증거일 것이다.
3장. 자연은 극복할 대상인가, 머물 터전인가
문명은 자연을 극복하고자 했다. 기술은 불편을 해소했지만, 정신은 피로해졌다. 나는 묻는다. 자연은 정말 적인가? 우리가 이겨내야 할 무엇인가? 아니면,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조건이며 배경인가?
극복이 아닌 공존. 적대가 아닌 머무름. 자연과 함께 걷는다는 태도가 더 나은 방향은 아닐까. 그리고 나 자신 또한, 자연 위에 놓인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삶은 조금 덜 힘들 수 있지 않을까.
4장. 나는 왜 태어났는가
아이처럼 단순하고도 무서운 질문. "나는 왜 태어났는가?"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 그래서인지 더욱 집요하게 따라온다. 알고 싶다. 깨닫고 싶다. 그 갈망조차 욕망일지라도 나는 그렇게 살아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존재한다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받고, 그래서 인간이다. 투정처럼 들릴지라도, 이 궁리는 결코 사치가 아니다. 그건 나의 생존 방식이고, 존재 방식이다.
5장. 우주, 양자, 존재 — 경계를 넘는 사유
우주는 거대한 타자였다. 그러나 이젠 거울이다. 나의 작음을 확인시키고, 동시에 그 작은 존재도 하나의 중심일 수 있다는 위로를 준다. 양자역학은 확정 대신 중첩을 말하고, 존재는 그 자체로 질문이다.
모든 것이 흐릿하고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만 사유는 숨 쉬고 있다. 나는 이해하고 싶기에 사유한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유희일지라도, 그것이 곧 나를 걷게 만드는 힘이다.
6장. 사유는 방향이 아니라 깊이이다
사람들은 미래를 묻는다. 퇴직 후 무엇을 할 것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것인가? 그러나 나는 방향보다 깊이가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어떤 시선과 마음으로 대하느냐가 중요하다.
사유는 나를 멈추게 하지만 동시에 다시 걷게 만든다. 삶은 멀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잠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제자리에서 걸어도, 나는 더 깊어질 수 있다.
7장. 답을 찾지 않아도 된다, 다만 계속 묻는다
나는 알고 싶다. 깨닫고 싶다. 하지만 그 갈망이 성취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 갈망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답을 찾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묻기를 멈추지 말자. 사유하는 한, 나는 살아 있다. 궁리는 유희일 수 있지만, 그것이 나를 지탱한다. 그게 바로 내가 지금도 이 순간, 런닝머신 위에서 걷고 있는 이유다.
에필로그: 지금 이 순간, 나는 걷는다
54세. 퇴직을 앞두고 있는 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걷고 있다. 사유하고 있다.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깊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이 나의 존재 이유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Case 2.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 존재와 사유의 경로를 따라
프롤로그: 걸음, 그 시작에 대하여
나는 지금 런닝머신 위에 서 있다. 나아가지도, 멈추지도 않은 이 걸음 위에서 문득 사유가 시작된다. 퇴직을 앞둔 나이 쉰네 살. 내가 살아온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앞으로 남은 시간은 무엇을 향해야 할까. 그러나 나는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실용적 질문에만 머무를 수 없다. 나는 알고 싶다. 정말 알고 싶다. 나라는 존재의 이유를. 살아가는 것 자체의 진실을. 이 사유는 투정 같고, 회피 같고, 어쩌면 자만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묻는다.
1장. 이루고자 하는 마음의 탄생
나는 이루고 싶었다. 무언가를. 명확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것을. 그러나 이루고 싶다는 그 마음은 되묻게 한다. 무엇을? 왜? 누구를 위해? 성취라는 단어는, 때로 나를 고양시키고 때로 나를 고립시켰다.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감각은 내게 존재감을 주었지만, 그 끝에서 나는 자주 공허했다. 그러니 묻는다. 이루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향해 흘러가는가.
2장. 질문의 강물로 빠져들다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방향을 잃을 때, 나는 질문에 빠져든다. ‘자동차를 만든다’는 예를 들자. 나는 자동차를 만들고 싶은가, 함께 만들고 싶은가, 인정받고 싶은가, 아니면 단지 그 결과로 부유해지고 싶은가. 이 일련의 동기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멈췄다. 모든 길이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되었음을. 존재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한 반복적 욕망. 그 안에서 나는 점점 질문 그 자체로 나아갔다.
3장. 존재의 외침, 우주와 양자 사이
나는 우주를 바라본다.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빛이 오는데 걸리는 시간들을. 양자역학이 말하는 불확정성, 중첩, 관찰자 효과 같은 것들이 내 삶에도 있다면?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 곧 나를 만든다면, 이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중첩되고, 생성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존재는 그렇게 물리와 철학의 사이에서 흔들리고, 그 흔들림이야말로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4장. 자연은 적인가, 터전인가
나는 문득 깨닫는다. 기술은 자연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결국 인간은 지쳐간다는 것을. 우리가 자연을 이기려는 동안, 자연은 한 번도 우리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품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귀속의 자리다. 그것이 흙이고, 공기이고, 물이며 빛이다. 이 모든 자연 위에서 내가 살아왔다. 나는 자연의 일부이며, 다시 돌아갈 자리이기도 하다.
5장. 궁리, 그 정당성과 불안 사이
생각하는 존재로서 나는 종종 사유가 무익하다는 회의에 빠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멈추지 못한다. 궁리는 때로 허무처럼 다가오지만, 그 자체가 생명활동이기도 하다. 사유한다는 건 무지를 인식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식하는 순간, 무지는 생겨난다. 그 전에는 없었다. 몰랐기 때문에 고통도 없었고, 욕망도 없었다. 그러나 안다는 건 동시에 상처를 입는 일이다. 그럼에도 알고 싶다는 갈망은 멈추지 않는다.
6장.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질문은 궁극적으로 나를 여기까지 이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더 이상 '어떻게'가 아니다. '왜'에 머무른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 그 근거. 삶이 고작 백 년이라면, 그것조차도 의미가 있을까. 있다. 그 안에서 나는 묻고, 사유하고, 사랑하고, 후회하고, 용서하고, 걸어간다. 그 자체가 하나의 방향이자, 목적이다. 완성은 없다. 다만 흐름 속에 내가 있다.
에필로그: 걸음을 멈추지 않는 나에게
나는 지금도 걷고 있다. 비록 런닝머신 위일지라도. 제자리인 듯 보여도 그 안에서 나는 생각하고 있다. 더 깊은 나에게로 향하고 있다. 사유하는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삶이며,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나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알고 싶기에.
...
사유한다. https://youtu.be/jQKfFtAurS8?si=SBTzWMrF-y94ht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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