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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나의 이야기

이루고자 하는 마음, 그 불안한 반짝임에 대하여

by 큰바위얼굴. 2025. 6. 19.

🌀 이루고자 하는 마음, 그 불안한 반짝임에 대하여

책을 읽다 보면, 문득 현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수많은 책들이 열정과 도전, 모험과 성공을 이야기한다. 국가에 충성하고, 기업의 번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지금 읽고 있는 책, 『나는 이렇게 재벌이 되었다』도 그러하다. 시대적 배경은 지나간 과거인데, 그 서사는 지금 이 순간 내 삶을 자극한다. 빠르게 전개되는 성공의 장면들. 성취가 당연한 듯 한 장면 장면이 쌓여간다.

그러니 가슴이 동동거린다. 지금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이제는 무언가를 쌓고 싶어졌다. 결과를 남기고 싶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정말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씩, 다시 꺼내 보고, 또 배제하고 정리한다.

그 모습은 마치 도로 옆 오페라하우스의 바비큐 파티처럼 한 건물 안에 펼쳐진 삶의 이야기 같다. 박물관 속 버라이어티 쇼처럼. 가게들, 주유소, 작은 일상들이 수없이 이어지는 그런 풍경. 어쩌면 지금 내가 뭔가를 이루고 싶다는 감정은, 무엇인가를 잃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라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오는 감정들. 추리, 번뜩임, 아이디어, 협력,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작은 흥분들. 마치 예상하지 못한 아이스크림 맛처럼 당황스러우면서도 꽤 괜찮은 조합. 여행자의 삶처럼, 집을 두고 어딘가를 떠도는 삶. 지금의 나도 그런 면에서 보면 ‘여행자’일지 모른다.

그런데, 만약 인생이라는 여정에 ‘함께’라는 이름이 있다면? 부부가 함께 떠나는 삶이라면? 나 역시 더 큰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무협 소설의 주인공처럼 시한부이지만 능력 있는 인물처럼, 어떤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싶다.

『시한부 천재가 살아남는 법』이라는 책처럼, 나도 세상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고 싶다. 그 방식은 수없이 많겠지만, 그 중 하나는 ‘사회’ 속에서 역할을 갖고 감정을 주고받는 것 아닐까.

하지만 여기서도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인가? 자동차를 만드는 것인가? 그 자동차를 함께 만드는 일인가? 혼자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으로 인정받고 싶은가? 결국 돈을 벌고 싶은가? 이 모든 욕망은 반복될 것이다.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 목적일까, 살아남는 것이 목적일까. 살아 있음의 행복이 진실임을 알면서도, 그 감사를 실감하는 방법은 여전히 어렵다. 어쩌면 이룰 수 없는 사랑처럼, 회귀를 통한 재도전처럼, 실현되지 않는 바람처럼. 상상으로 충분했던 것들이 구체화되는 순간, 그 간극만큼 불안도 커진다.

밖에서 찾으려다 안에서 찾으려 하고, 결국은 바깥을 전제로 한 내부일지도. 안과 밖이 그렇게 단순히 나뉠 수 없다면, 우리는 결국 거울 속의 나를 통해 세상과 나를 동시에 바라보게 된다. 나를 인식하는 순간, 깨달음이 찾아올 수도 있다. 단지 거울은 비추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나이며, 세상의 바탕이며, 환경이며, 내가 그 위에 색칠한 도화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도화지를 배제했을까? 본래 하나였던 존재를 중심을 기준으로 나누기 시작하면서, 중심적 사고에서 오는 부조리도 함께 태어났다. 그래서 세상은 웃기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정의를 말하는 일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세상이 정의롭지 않으니 우리는 정의를 바라고 외친다. 완벽한 세상이었다면 추구할 것도 없었겠지. 그러나 이상과 현실 사이, 바람과 실행 사이, 목표와 의미 사이에는 빈틈이 있다. 그 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아간다. 너무 조화롭기만 한 세상에서는 노력할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너무 깨진 세상에서는 피로만 쌓여간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류는 과연 행복해졌는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극복하려 하고, 그로 인해 정신은 피폐해지고 있다. 무지를 알게 되면서 태어난 의식. 똑똑하다는 말은 동시에 멍청함을 만들었고, 인식이라는 선물은 때론 무거운 짐이다.

그래서 묻게 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순간, 나의 삶이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충분하다'는 말, 그 한마디가 나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왜 지금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할까?

그냥 살아도 된다. 뭘 더 바라는가. 이 인생, 고작 백 년, 길어야 이백 년. 우주의 시간에서 우리는 티끌만도 못한 존재다. 그 안에서 자꾸만 없는 것을 찾지 말자. 이미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우리는 자꾸만 더 바라기만 한다.

그러다 결국, 세계수를 쓰러뜨린다. 이미 아름다운 나무였는데.  김성호 E/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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