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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엄마 이야기

굽어가는 등 뒤로 흐르는 빛 (2026년 새해 성지 순례)

by 아리빛 하나 2026. 1. 1.

새해를 맞아 성지 순례를 떠난 것이 올해로 두 번째인가 보다. 갈매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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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이 걸어간 숭고한 행적을 좇으며,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삶의 자리를 눈에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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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평범한 공기와 행복이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누군가의 헌신이 거름이 되어 우리라는 꽃을 피워냈음을 다시금 되새긴다. 나 또한 그 빛을 이어받아 아이들에게 건네줘야 할 하나의 연결고리임을 느낀다. 한 걸음 한 걸음, 성지의 유례를 찾아 소성당 안을 돈다. 마지막, 그의 잘린 목을 보게 된 순간, 먹먹함에 울컥 가슴이 메어져 온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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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공사 중인 대성당의 웅장함을 보고 싶어 했다. 소성당에 머물던 우리를 불렀을 때, 선뜻 응답해 따라나선 건 나뿐이었다. 바닷가 성지의 찬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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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경자 씨는 자꾸만 우리 눈치를 살핀다. "바다 구경도 하고 좋잖니." 당신이 가보고 싶었던 곳을 가자고 청해도, 어머니는 한사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 이미 여러 번 가보아 익숙한 곳으로 발길을 돌리자 하신다. 당신의 취향보다는 자식과 손주들의 즐거움이 곧 당신의 행선지가 되어버린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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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수북이 내려앉은 어머니의 흰 머리와 완만하게 굽어버린 등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풍경이 되었다. 그 휘어진 곡선 속에 얼마나 많은 인내가 담겼을까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뭘 자꾸 찍고 그러니?"

쑥스러운 듯 손사래를 치는 어머니 곁에서 아들 성호가 셔터를 누르며 대답한다. "남겨야 기억하죠. 후 하고 불면 날아가는 인생인데, 허망하지 않게 붙잡아둬야 하잖아요." 그 말에 어머니는 못 이기는 척 얼굴을 맡기신다.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영원이 되기를 바라는 아들의 마음을 어머니도 아마 알고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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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소에서 성사를 마치고 나오신 어머니의 표정이 한결 맑다. "속이 다 시원하다. 이제 본당에도 열심히 나가야지."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시는 그 모습에 내 마음의 짐도 조금은 덜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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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이라 예물을 받지 않는다는 말에도 굳이 정성을 올리며 기도를 보태시는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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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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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가 끝나고 소성당에서 주차장으로 향하는 짧은 길. 어머니는 몇 걸음 못 가 길목에 멈춰 앉으신다. 예전엔 거뜬히 넘으셨을 그 고갯길이 이제는 숨이 턱에 차는 높은 산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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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곁을 막내 치형이가 묵묵히 지키고 선다.

멀지 않은 훗날, 나 또한 저렇게 숨을 고르며 앉아 있을 것이다. 그때 내 아이들도 지금의 나처럼 서글픈 애틋함으로 나를 바라봐 줄까. 늙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자식들에게 '기다림'이라는 사랑을 가르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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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가 1만 개나 된다는 유명한 식당을 찾아 40분을 달려 대천해수욕장 근처로 향했다. 육해공을 다 맛볼 수 있다지만 정작 젓가락을 들기엔 어딘지 모르게 멋쩍은 상차림. '그냥 성당에서 나눠주는 따뜻한 떡국이나 한 그릇 먹고 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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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진수성찬보다 간절했던 건, 어머니의 지친 다리를 조금이라도 일찍 쉬게 해드리고 싶었던 마음이었음을. 돌아오는 길, 창밖의 바다는 말이 없고 아이들의 고개는 어느덧 꾸벅꾸벅 졸음에 겨워 계신다. 어머니는 운전자 보조석에 앉아 열심히 말을 건네신다. 아들이 졸까봐.   김성호 E/ Gem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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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성지 순례, 벌써 두 번째다. 순교자의 삶을 좇아 걷는 길이라지만, 내 시선은 자꾸만 앞서 걷는 한 사람의 등굽이에 머문다.

경자 씨. 나의 어머니. 어느덧 수북해진 흰 머리는 겨울 서리 같고, 굽어버린 허리는 평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지면과 가까워져 있다.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을 묻자, 어머니는 한사코 아이들이 좋아할 바다만 고집하신다. 당신의 욕망은 이미 오래전 자식들의 기쁨 뒤편으로 유배 보내진 모양이다.

"뭘 자꾸 찍어, 예쁘지도 않은데."

카메라를 든 아들 성호의 손길을 어머니는 수줍게 밀어내신다. 성호는 무심히 답한다. "남겨야죠. 안 그러면 후 하고 불면 날아가는 연기처럼 허망하잖아요." 그 말에 어머니는 짐짓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돌리신다. 붙잡지 않으면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아들의 애착을, 당신의 쇠락을 기록하려는 그 애틋한 욕심을 어머니도 알고 계신 듯했다.

고백소에서 나온 어머니의 얼굴은 갓 씻은 사과처럼 맑았다. "속이 다 시원하다." 그 한마디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조금 녹아내렸을까. 대축일이라 예물을 받지 않는다는 성당 측의 사양에도, 어머니는 굳이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리신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간절한지, 그 기도의 끝자락에 분명 우리들의 이름이 매달려 있을 것만 같아 코끝이 시큰해졌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짧은 오르막. 어머니는 결국 길목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신다. 예전엔 한달음에 달려가던 그 짧은 거리가, 이제는 중간에 몇 번을 쉬어 가야 하는 망망대해 같은 길이 되어버렸다. 막내 치형이가 그 곁을 묵묵히 지키고 섰다.

멈춰 선 어머니의 등을 보며 생각한다. 저 등이 휘어지는 동안 나는 얼마나 꼿꼿하게 자랐던가. 그리고 머지않아 나 또한 저렇게 길가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게 되겠지. 아이들아, 늙어간다는 건 이토록 서글픈 육체의 고백이란다. 거동이 불편해진다는 건 마음보다 몸이 먼저 작별을 준비하는 과정이란다.

유명하다는 식당을 찾아 40분을 달려 대천으로 향했다. 화려한 상차림과 왁자지껄한 사람들. 하지만 정작 젓가락을 든 손은 갈 곳을 잃는다. '그냥 성당에서 주는 따뜻한 떡국 한 그릇이었으면 충분했을 텐데.'

지친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돌아오는 길, 창밖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나는 어머니의 들뜬 무릎 위에 조용히 외투를 덮어드린다. 이 시간이 조금만 더 천천히 흘러가기를, 나의 아이들도 훗날 나의 굽은 등을 볼 때 지금의 나처럼 적당히 아프고 충분히 사랑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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