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기억이 별로 없어."
그 말을 듣고 한참 있었다. 없다는 게 아니라, 찾고 싶지 않다는 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찾기 싫은 걸 억지로 꺼내는 느낌이야. 억압되는 것 같고."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엔 조금이었을 것이다. 서로 좋아서 함께한 시간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경험은 쌓인다.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쌓일수록 방향이 생기고, 방향이 생기면 되돌리기가 어려워진다. 25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방향을 만들었다.
"뭔가를 해야 해. 그냥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바뀌지 않아."
내가 말했다. 꽃은 바라봐 줘야 핀다고. 방치해 두면 스스로 알아서 잘 살 거라고 생각하는 건 다시 봐야 한다고. 애정이라는 것도 그냥 두면 쓰러지고 없어지는 쪽이라고.
"심리적인 문제인 것 같아. 그러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줘. 기간도 정하지 말고."
기간을 정했다. 한 달, 두 달. 끝이 있으면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한정이라는 것 자체가 싫어. 어쩌면 한 달도 되기 전에 내가 먼저 할 수도 있어. 근데 그냥 언제까지든 기다리고 있을게, 라는 확신이 생기면 훨씬 빨라질 것 같아."
"오늘도 안 되냐는 말 한마디에 다시 제로가 돼. 25년 세월 중에 한 달이 기냐고 할 거지. 근데 여기는 해결이 없어."
그때 알았다.
우리는 같은 것을 원하면서 완전히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다. 나는 불꽃처럼 타오르며 그 온기를 전하려 했고, 상대는 그 불꽃 앞에서 뜨겁다고 느끼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표현이 부담이 되고, 노력한다는 행위가 압박이 되는 구조. 그 구조가 25년 동안 쌓인 것이다.
"안전하다는 생각을 못 하는 것 같아."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따뜻하게 건넨 말이 위협으로 읽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언어도 안전하게 닿지 않는다. 먼저 필요한 건 말이 아니었다. 안전하다는 느낌이었다.
"기다릴게. 최대한."
끝을 정하지 않고. 확인하지 않고. 그냥.
"방금 기다려 주는 거야?"
"응. 최대한."
짧은 침묵이 있었다. 그 침묵이 오늘 우리가 나눈 말 중에 가장 솔직한 것이었다.
우주를 담고 싶어 하는 사람이 가장 오래 멈추는 곳은 결국 가장 가까이 있는 한 사람 앞이다. 가장 먼 것을 탐구하던 사람이, 가장 가까운 거리를 가장 천천히 걷기로 했다. 텅 빈 채로. 끝을 정하지 않고.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다.
- KSH(김성호와 곽서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