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램마을 10단지 주차장에는 나만의 역사가 있다.
초창기엔 순수했다. 빈 자리에 대면 됐다. 어디든. 줄이 없어도, 조금 비뚤어도, 환경미화원 창고 앞 아슬아슬한 자리도 괜찮았다. 댔다는 것 자체가 안도였다. 그날의 나는 주차 성공자였다.
그런데 차가 문제였다. 혼다 오디세이. 패밀리카의 왕이자, 주차장의 고래. 앞에 차가 가로로 버티고 있으면 꼼짝없다. 코너를 틀 반경이 나오질 않는다. 일찍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이중주차에 갇히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준이 생겼다. 앞이 막힐 수 없는 자리. 이중주차 사각지대가 아닌 자리. 혼자 유유히 빠져나올 수 있는 자리.
후보는 몇 군데 안 됐다. 엘리베이터 바로 앞 두세 군데. 거기에 대면 다음 날 아침이 평화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측에서 세대당 차량 등록 제한과 시간 총량 관리를 시작했다. 외부 차량이 줄었다. 주차 사정이 나아졌다. 개구리 주차의 시대가 저물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차를 빼다가 한 번에 못 나왔다. 후진, 전진, 다시 후진.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더 편한 자리가 없는 거지?
그 자리에 이미 대 있는 차들을 보며 살짝 원망했다. 그러다 멈췄다. 잠깐. 창고 앞에 가까스로 대던 시절의 나는 댔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한 번에 나오지 못한 것에 불만이 생겼다.
주차 사정이 나아진 게 아니었다. 기대치가 올라간 것이었다.
주차장에서 나오며 생각했다. 이게 주차 얘기만은 아니겠구나. 없을 때는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조금 나아지면 더 나아지길 바란다. 더 나아지면 완벽을 원한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게 하는 타인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고래는 오늘도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아주 조금 더 겸손해졌다. 김성호 w/ Sonnet.
'일기 >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커피 중단 (0) | 2026.04.17 |
|---|---|
| 으르렁 (0) | 2026.04.17 |
| 가보고 싶은 곳 : 시칠리아 (0) | 2026.04.15 |
| 아무 (0) | 2026.04.15 |
| 오늘의 여정, 꾸준한 점검 (0) | 2026.04.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