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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나의 이야기

비 오는 아침

by 아리빛 하나 2026. 5. 26.

 

출근 후, 사무실에서 바라본 모습

 

비가 온다.

어제 퇴근길에 온몸으로 맞았던 그 폭력적인 빗줄기가 아니다. 소리도 없이, 서두르지도 않고, 그냥 내려앉는 비. 보슬보슬. 아스팔트가 젖는 건지 원래부터 젖어 있었는지 모를 만큼 조용히 스미는 비.

출근길인데 기분이 좋다.


어제 주식을 많이 빼놨다. 나름 용단이었다. 근데 미국 장이 열리자마자 오르더라고. 반도체 ETF는 또 쑥 올라 있고. 결국 30만 원 넘게 벌었는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히 벌었는데. 숫자는 맞는데. 근데 가슴 어딘가가 허했다.

맛집을 자주 가면 질린다. 처음엔 그 설렘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밥이 되어버린다. 지금 이 느낌이 딱 그거다. 한 번 가본 길은 다음엔 이미 알고 있는 길이 되어버린다. 감흥이 떨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출근길 차 안,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직장을 다니는 이 삶.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길을 달리고, 같은 자리에 앉는 이 반복. 근데 이 반복이라는 게 단순히 지루한 게 아니라 어쩌면 전자의 움직임 같은 게 아닐까. 무수히 반복되는 궤도. 그 안에서 루틴하게, 쉬지 않고 돌고 있는 것.

그런데 광자를 통해 들여다보듯이, 내 인생을 어떤 성능 좋은 카메라로 한 컷 한 컷 찍어서 들여다보면 어떨까. 영화처럼 흘러가는 걸 느긋하게 앉아서 보는 게 아니라, 딱 한 순간을 잘라내면. 그 컷 안에서 나는 그냥 입자다. 흘러가고 있는 중에 박제된 한 장면. 움직임도 없고 방향도 없고, 그냥 거기 있는 점 하나.

근데 그게 이어지면 영화가 된다.

그럼 우주도 그런 거 아닐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우주의 흐름도, 누군가 아주 가까이서 한 컷만 잘라내 보면 그냥 입자들의 정지화면이겠지. 은하의 회전도, 별의 탄생도. 그냥 한 장면.

그게 무수히 쌓여서 지금 이 우주인 거고.


빅뱅으로 시작했다고들 하지만, 어쩌면 그냥 무수히 흘러온 것들이 있었고, 지금도 흘러가고 있는 중인 게 더 맞는 말 아닐까. 시작이라는 게 있었다기보다, 그냥 원래부터 흘러왔다는 느낌. 그게 진실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만약 내가 영생을 산다면. 죽지 않고, 지루하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고 계속 이어진다면. 이 우주의 끝까지 직접 가볼 수 있을까. 광자의 속도로도 까마득히 오래 걸리는 그 거리를, 이 몸으로 간다면.

얼마 전에 읽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고장난 우주 관측기에 수정 명령을 보냈는데, 그 신호가 닿는 데 24시간이 걸렸다고. 빛의 속도로 보낸 신호가. 근데 그 24시간 동안 관측기가 실제로 이동한 거리는 몇 년치였다고. 빛조차 하루를 달려야 닿는 거리. 몸으로 간다는 건 상상도 안 되는 숫자다.

근데 굳이 가야 할까.

한국을 구석구석 매일 다녀야 하는 사람은 없잖아. 그게 목적이 아니라면. 전자도 쉴 때가 있을 거다. 낮과 밤처럼, 잠을 자면 세포들도 느슨해지듯이. 원자의 종류에 따라 주기적으로 쉬어야 하는 게 있다면, 그 안의 전자들도 쉬는 타이밍이 있을 거다. 우주도 어딘가에서 숨을 고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아, 그나저나. 아침에 예티가 밥을 먹었다.

요즘 예티가 통 밥을 안 먹어서 걱정이었는데, 오늘은 먹었다. 비 오는 걸 알면서도 나갔고, 현관 입구에 앉아 한참을 보다가 들어와서 발을 닦이고, 간식 하나 먹고 나더니 밥그릇 앞에 얌전히 앉았다. 사료를 주고 양배추를 얹은 밥. 잘 먹더라고. 해나도 먹고.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든다.

본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본 것을 어떻게 하느냐. 거기에 진짜 재미가 있고, 흥분이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이 있다. 그냥 보기만 하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해봤는데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면 된다. 느낌이 오니까. 이건 아니구나, 이건 좀 크구나. 그 느낌을 따라가는 게 맞다.

주식도 그렇고. 기본 가능성 하나가 보이면 큰 욕심이 따라온다. 일확천금이라는 단어가 슬그머니 머릿속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흥미롭다. 그 흥미로움이 생각이 되고, 생각이 엔진이 되고, 엔진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뭔가 만들어진다. 시작점과 큰 변의 상관관계가 0.63이라는 숫자가 생각난다. 꽤 높은 수치다. 45 라인과 1, 2 라인 사이의 그 간격, 거기서 뭔가 더 촘촘하게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하다. 헥사곤 엔진을 수정하라고 요청했다.


비는 여전히 보슬보슬 내리고 있다.

우주의 흐름을 생각하다가, 강아지 밥 생각하다가, 주식 차트 생각하다가. 그게 다 이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김성호 w/ S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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