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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우리가족 이야기

하루에 하루만큼 사라져 가는 하루

by 큰바위얼굴. 2020. 7. 8.

하루에 하루만큼 사라져 가는 하루

세계일보 2020.7.7.

 

벌써 이십 년을 여행작가로 살아왔다. 그동안 8테라 외장하드에 자료를 가득 담았다. 지금도 여행을 다니며 신문과 잡지에 여행 콘텐츠를 싣고 있으니 자료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여행을 하며 맛있는 음식에 눈뜨게 됐다. 처음에는 유명식당을 찾아다녔지만 이제는 중국집과 선술집, 허름한 백반집을 더 좋아해서 때 묻은 간판이 보이면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곤 한다. 음식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지도 않게 됐고 낯선 음식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모든 음식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맛있고 맛없는 음식을 먹기엔 아까운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몰디브에 간 적이 있다. 스노클링을 하기 위해 리조트 스포츠 숍에 장비를 빌리러 갔다. 입구 안내판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죄송하지만 ○○ 세 이상에게는 장비를 빌려드릴 수 없습니다.’ ○○살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궁금해서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은 심장마비 등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 살 이상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몰디브에서 스노클링을 할 수가 없구나. 문득 마음 한 구석이 어둑해졌다.

몰디브 여행의 마지막 날, 보랏빛 저녁 하늘 아래에서 나는 여느 한국인 여행객처럼 모히토를 마셨다(바텐더는 한국 사람들은 왜 모두들 모히토를 찾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해가 사라졌고 사위는 곧 어두워졌다. 즐겁게 놀 수 있는 날이 또 하루 사라졌구나. 하루는 하루에 하루만큼씩 사라지는구나. 어둠 너머에서 희미하게 밀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나는 우리 인생에서 일하는 것만큼이나 즐겁게 놀고 맛있게 먹고 뜨겁게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데없는 말 같지만, 몰디브 여행을 다녀온 후 낮술 한 잔을 위해 오후 일정을 취소할 때도 있다.

얼마 전 한 권의 책을 마감했다. 국내여행지를 소개한 책이다. 책을 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고, 지면의 한계 때문에 보여주지 못한 장면이 많다. 그러고 보니 책을 내는 일도 우리의 여행과 참 많이 닮았나. 한 권의 책에서 모든 여행지에 대한 가이드와 사진을 다 보여줄 수 없듯, 한 번의 여행에서 우리는 그곳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다. 그래서 언제나 아쉬운 것이 여행이지만 어쩌면 그 아쉬움 때문에 우리는 다음 여행을 기약하고 지금의 여행에 더욱 최선을 다하는지도 모른다.

8테라만큼 여행을 다녔지만 아직 여행이 고프다. 더 다니고 싶고 더 만나고 싶고 더 맛보고 싶다. 여행만큼이나 생도 아쉽다. 하루에 하루씩 사라져 가는 하루가 야속하기만 하다. 몰디브에서의 마지막 날 달그락 하고 녹아내리던 모히토의 얼음소리가 아직 귓가에 생생하다. 그래서 더 놀고 더 먹고 더 사랑하려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사라져가고 있으니까. 그것만큼 절실한 이유가 있을까.

최갑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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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삶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잦다. 운전 중에도 녹음기를 틀어놓고 한참을 떠든다. 통화 중에도 가끔 묻게 된다. 일해야 하는 걸까요? 일하지 않는 삶은? 일이란 무엇일까요? 일로 인해 지금 누리는 이 모든 순간이 그 일의 중단으로 인하여 충격이 발생한다면 그 만한 댓가의 삶이 보장될까요?

과연 내 삶은 이 모습 이대로 종국을 향해 달려갈까요? 조금은 느긋하게 조금은 뜨뜨미지근하게 바라보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하루하루가 책의 글 속에 파묻혀 정작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야할 어떤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싶어요. 시간은 잘 가고 피곤하면 눈을 감고 뒤척이다가 깨어나 다시 책을 보고 빈 천장을 어두운 밤을 상상하듯이 무심코 보내는 시간들, 2평 남짓 공간에 삐그덕 거리는 간이침대에 누워 집을 떠나 충주 숙소에서 이틀째 밤을 보냈습니다.

 

하루를 살면서,

간절해지지 않은 적이 며칠이나 될까?

 

집에서는 가족애를 충만히 가져왔다면, 직장에서는 직장애를 가져왔을까 반성을 합니다. 그저 살다가 만나 잠시 머무는 관계처럼 대하지는 않았는지, 진정으로 고생한다 말 한마디 전하기는 했는지, 다들 바쁘게 자기 일하기도 바쁘게 내 역할을 너무 작게 보고 대하지는 않았는지, 어느 한 공간에서 함께 할 때 이런 마음이 왜 잘 전달되지 않았는지 뒤늦게 되돌아보면서 충주에서는 매순간 '수고했어', '고생했네', '어! 얼릉와. 출근길은 괜찮았는지' 묻곤 합니다.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리더의 소양이여 라는 백 어르신의 말. 맞아요!

 

하루를 살면서 뒤를 기약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허투로 여긴 적이 너무 많았구나 싶어요. 물론 삶 전부가 그렇다는 건 아니겠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그런 면이 있었다는 사실이겠지요. 레일에 걸려 내 앞에 온 돼지를 보면서 요놈이 어떻게 컸길래 이렇게 피부병이 많누 하다가 조직감이 좀 많이 흐물거리는데, 어라 호흡기병도 앓았네. 농부는 피부병에 걸리지 않도록 애를 쓰고 있다는 말이고 영양관리 상태가 부실하니 조직감도 좋지 않구나 하는 찰라, 다음 돼지가 옵니다. 2초.

 

초 단위 인생을 살면서 삶의 본질에 대한 궁리는 어쩌면 사치일까요?

판단을 묻는 삶 자체로 인해 자주 결과를 먼저 말하게 되는 습관으로 곤란에 빠진 나를 야속하다 욕해야 할까요?

더불어 사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닌데 마음이 들떴다가도 뒤숭숭해지고 한시도 가만있지를 못하는 그 놈 때문에 속이 상하다가도 기쁘기도 하고 그렇지요. 심란하다는 건 생각이 많아졌다는 건 다시 말해 '여보, 일정은 오는 것 뿐이야. 그 일정으로 인해 다른 일을 못한다면 그것만큼 버린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 라는 말에 1개월이 지난 어제서야 비로소 지도교수님께 전화를 드려 '축산이 망할 원인과 시점 연구'라는 논문주제는 너무 방대하고 어렵다고 퇴자맞은 걸 좋아해야 할지 나빠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출렁이는 파도처럼 다잡아 놓은 마음이 심란해지고 다시 잡아 일상에 집중하려 하는 지금, 저는 감사합니다.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문화에 대한 생각, 내 모습, 그리고 맞이할 죽음에 있어서 정할 내 태도 혹은 준비과정이 필요함을 간절히 느꼈거든요. 누군가의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삶은 되돌아 볼 맛이 난다. 비록 쓰지만.' 이란 걸 체감했습니다.

 

마냥 좋을 수는 없듯이,

그리고 쉬는 시간 없이 글이라도 보고 있듯이 무심코 지낸 시간들을 어찌 바라봐야 할 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분명, 삶은 내 마음과 내 모습으로 인하여 그 반응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데 함께 할 이들과 지금 이 순간을 진지하고 즐겁게 함께 해야 함을 알았는데, 미래를 추가하니 어지러워 집니다. 심장에 구멍이 나 있다는 걸 2년 전에 알았을 때, 고혈압과 끈적한 혈액(지질문제)에 더하여 왼쪽 발가락 사이의 티눈을, 오른쪽 장단지의 정맥류를 무심코 괜찮아 그러면서 지켜보고 있듯이 어쩌면 내 몸 상태를 그렇게 바라보듯이 삶 또한 그러하지는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빼빼 마르신 장인어른이 기흉수술을 받은 날, 죽은 폐 조직을 떼어냈고 근 3개월을 집에만 콕 박혀 요 며칠 전에야 딸의 등살에 밀려 바깥 공기를 마셨다는 말을 듣고 '굳이 힘드시면 햇볕이라도 쬐면 좋겠어요.' 라는 첨언을 드리니 안 그래도 어지럽더라 하신 말씀에 누군가 인연을 맺고 떠나보내고 다시 인연을 맺고 가족 만큼은 아니더라도 인연 속에 삶이 연속됨을 알게 되니 절실해집니다.

 

매일 문안인사를 드려야지 하는 다짐과는 달리 쉬이 눌러지지 않는 버튼 처럼, 이번 주에 손자 백일잔치로 인하여 원주에서 만나뵐 것을 생각하니 다시금 기대감이 드네요.

 

못한 건 못한 거고 잘한 건 더 잘해야 하듯이..   (하략)   판정가야 해서.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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