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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궁극에의

착각 속에 찾은 실마리 : 망망대해 한 척의 배

by 큰바위얼굴. 2021. 6. 9.

 

https://youtu.be/W1a-INs1wGQ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난 커다란 착각 속에 빠져있었다.

 

망망대해, 1척의 배.

먹고 입고 싸고 하는 일련의 일들은 당연한 것이다.

배를 유지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당연한 것이다.

배를 업그레이드 하고 태풍과 풍랑을 헤쳐나가기 유리하도록 하는 노력 또한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의식주 처럼 당연히 하는 본능 혹은 습관과 같다.

 

1척의 배가 건조되어 바다에서 나와 출발했다.

이는 1명의 아이가 태어난 것과 같다.

이미 아이가 태어나 살아가는 것처럼 배는 출발했고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망망대해를 맞이한 1척의 배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다만, 멀리 갈 수록 멀리 가고자 할 수록 준비가 필요하다.

때론 마주치는 배와 연합을 하기도 하고 선단을 꾸릴 수도 있다.

때론 음식을 싣고 기름을 넣기 위해 대륙에 닿을 수도 있다.

 

신대륙을 발견한다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있을까?

과연, 목적은 무엇인가?

목표는?

 

1척의 배를 운용하기에 필요한, 요구된 수많은 일들은 당연히 해야 한다.

이의 해결 없이 다른 것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때론 우연히 때론 필연적으로 내게 이로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이를 기대하기란 요원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목적이 아니다. 또한, 목표가 될 수 없다.

다시말해, 의식주는 목적이 아니요 목표 또한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할 몫이다.

그렇다면, 목적은 무엇이며 목표는 무엇일까?

 

1척의 배는 망망대해를 나아간다. 이는 필연이다. 이유없다.

나아가면서 발생하는 희노애락은 행복과 불행의 척도가 된다.

다툼과 협의는 일련의 과정이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와 규칙은 최소한의 장치다.

법과 질서는 배를 운용하기 위해 생긴 규칙에 불과하며 이는 목적이 될 수 없다.

목적은 배를 배제할 수 없다.

 

배는 망망대해를 나아간다.

이유를 찾든 찾지 못하든 수 많은 배들이 망망대해를 떠다닌다.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들은 당연히 해야 할 몫이고,

나아가는 방향에 목표를 세우면 이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이 생긴다.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은,

달리 말해 우주개척을 통해 지구멸망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인류의 생존을 고려한 목표가 될 수 있다.

다만, 와닿기에는 멀고 멀다. 일생 또한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긴 긴 역사를 지녔다. 내 생에 하지 못하면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 

내가 하지 못하면 자식이 한다. 자식이 하지 못하면 남의 자식이 한다. 이처럼 기록은 전승되어 이어진다.

 

인류애,

왜 인류애를 떠올릴 수 밖에 없을까?

이는 고민이 다다른 끝에 '무엇을 할 것인가'의 답이 된다.

 

가족애,

왜 치형이는 망설이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 답했을까?

가족애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답이 된다.

 

이에 대해 궁금하다면,

이에 대한 추론과정을 알고자 한다면 귀을 기울여 들어보라.

 

지금처럼 5분조차 길다 여겨지는 세상에서 짧다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산물이니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

 

망망대해,

1척의 배.

 

선단을 꾸리고

배를 업그레이드 하고

태풍에 맞설 무장(기술)을 갖추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는 의식주를 해결한 것과 같다.

의식주는 목적이나 목표가 될 수 없다.

물론, 의식주를 목적이나 목표로 삼는 이가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망망대해, 1척의 배가 출항했다라는 전제에서 시작됨을 간과하지 말자.

이를 돌려말해 망망대해, 1척의 배가 의식주로 여겨져도 무방하며, 혹은 대륙에서 집을 짓고 살아가는 전제로 보아도 무방하다. 다만, 조심해야 할 점은 망망대해, 1척의 배는 이해를 돕기 가장 편하기 때문에 도입했다는 것이고

의식주나 대륙이나 우주나 어떤 다른 용어를 삶의 목적이나 목표로 밝힌다 할 지라도 망망대해, 1척의 배가 지닌 의미를 유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시말해,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니 의식주든 망망대해든 배든 거기에 집착하지는 말자는 의미다.

 

망망대해,

1척의 배.

 

대륙을 오고가는 것이 일생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역할을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1척의 배는 망망대해를 나아가고 있음을 볼 때 지평선 너머 그 목표라고 할 수는 없다.

대륙을 오고가는 무역은 의식주의 범주와 같다.

필요에 의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말.

 

1척의 배는 망망대해를 나아간다.

어디로?

 

그 어디가 지향하는 바가 목적이요 이를 뚜렷히 하면 목표로 세울 만 하다.

 

'나는' 어디로 지향하는 가?

어렵다. 나 라는 주체를 넣으면 이처럼 나는 무엇을 하거나 어떻게 하거나 라는 말이 뒤따라오기 쉽상이다.

나는 나를 버리기 어렵고 나라는 말에서 이미 집착이 시작되어 본질이 흐려질 우려가 있다.

 

1척의 배,

전지적으로 봐도 좋다.

 

1척의 배는 나아간다. 어디로?

지평선 너머 어디로 갈 것인가?

 

때론 만나고 때론 헤어지고 만남과 헤어짐이 탄생과 죽음까지 포함한다손 치면

만남과 헤어짐은 1척의 배가 나아가는데서 일어나는 일상이다.

일상은 의식주와 밀접하고 의식주는 1척의 배를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딱 그 만큼.

의식주는 1척의 배가 나아가기 위한 준비와 같다. 

먹고 입고 싸는 건 본능과 같다. 딱 그 만큼.

 

1척의 배는 나아간다. 어디로?

가다보면 마주한 신문물이나 새로움은 인생이 그렇듯 여행중에 얻는 경험에 가깝다.

신문물이나 새로움은 목적이 될 수 없다. 이는 동력은 될 수 있을 지언정 그 자체는 의식주처럼 배가 지향하는 바는 아니다. 

 

1척의 배를 업그레이드 하는데 일생을 쏟아부을 수도 있다.

1척의 배를 운용하기 위한 의식주 해결을 위해 일생을 쏟아부을 수도 있다.

1척의 배가 지향하는 바를 찾기 위해 일생을 쏟아부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1척의 배, 망망대해를 나아가는 이 순간, 지금 느끼는 삶을, 관계를 제1 덕목으로 봐야 한다.

의식주를 당연히 제1 선상에 두듯이 1척의 배를 운용하는 것은 인생의 제1 목표로 두어도 무방하다.

궁극적으로 배가 튼튼해야 지평선 너머를 내다볼 수 있듯이 배가 튼튼하지 못하면 저 먼 곳은 공염불에 가깝다.

 

자, 

그렇다면 착각했을 망정 배를 운용할 만한 의식주를 해결했다고 보자.

더구나, 배를 업그레이드 했고 튼튼하다고 보자.

이제 풍랑이나 태풍은 겁내지 않아도 좋을 극복할 대상으로 본다고 하자.

 

망망대해,

1척의 배는 바다 위에 떠 있고,

의식주는 해결 되었으며 배는 업그레이드 되었다.

물론 의식주는 계속 해결할 수 있는 여지를 두었고, 배 또한 기술개발과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배 자체에는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는 말이다.

자, 그러면 어디로 갈까?

 

배는 바다 위에 떠있고

대륙 간 이동은 무역으로 의식주를 풍부하게 할 수는 있지만 이는 배의 지향점, 즉 목표는 될 수 없다고 했다.

지평선 너머, 혹은 우주 공간 너머 어디로 갈 것인가?

 

배는 바다 위에 떠 있고,

행복은 바다 위의 선상에 있다.

나아감은 행복으로 가득하고, 나아가는 곳곳마다 여행에서 오는 감정과 느낌이 충만하다.

이루어 낸 것의 소소한 기쁨을 얻고 새로움에 반가움이 물씬 풍긴다.

 

배가 나아갈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배는 떠나온, 앞으로 다시 떠날 배들을 위한 도움을 줄 수 있다. 혹은, 더 넓게 보아 그 근원을 생각케 한다.

물론 이 또한 아집, 자기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쩌랴. 내 수준이 그 만큼인 것을.

 

인류애는 그렇게 의미를 갖는다.

망망대해, 1척의 배. 의식주를 해결한 배는 더불어 모두를 생각한다. 한계는 분명하다. 망망대해를 대신 해줄 수는 없다.

이는 배가 나아가는 지향점 이라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목표를 돌려 뒤를 돌아본 것과 같다.

앞을 볼 수 없으니 뒤를 본다.

 

망망대해,

어쩌면 답은 정해져 있을 수 있다. 망망대해.

 

망망대해,

1척의 배는 이렇게 의미를 찾는다.

 

"우리 함께 해" 라는 말에 행복해 하고,

"나아갈 곳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순간 가장 소중한 것을 아는 것이니" 아이들을 참 잘 키웠다 싶다.

 

가족애를 듬뿍 심었듯이,

이젠 인류애를 돌아보도록 해야 할까?

내가 찾지 못한 앞을 보도록 해야 할까?

혹은, 의식주는 배를 운용하는데 필요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구분짓도록 해야 할까?

과연 해야 할까?

할까?

사실, 이 또한 답은 정해져 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스스로 결정한다. 난 단지 제시할 뿐.

 

망망대해,

1척의 배는 서희를 만나 2척과 같은 1척이 되었고,

그 커다란 1척의 배는 다시 영록, 영탁, 치형이로 이어지는 3척의 조그만 배를 만들어 냈으니

1척의 배는 선단을 꾸렸다.

다시, 하나의 선단은 각각의 짝을 찾아 또다른 선단을 꾸릴 것이고 그 하나 하나의 선단은 지금 맺은 순임, 병호, 재일, 경자와 같은 거대한 선단과 같다. 어느 범주에 넣을 것이냐? 내 품에 안고 함께 나아간다면 내 선단과 같다.

 

이를 알고 실천하니 당연히 아이들 또한 그러할 것이라 믿는다.

 

이제, 가족애로 품을 선단을 더 넓게 꾸려야 하겠고,

한층 커진 규모로 소소한 일상을 살아도 좋겠고,

나아감에 망설임이 없다.

 

지평선 너머,

반드시 봐야 할 것은 아니다. 내가 보질 못해도 좋다.

면면히 이어짐이 결국 삶의 종국과 같을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 보고야 말지 않을까?

 

하나를 함에 유혹이 있고 

나아감에 고민이 드는 것처럼

망망대해, 낚아 올릴 풍작에 기뻐하자. 김성호.

 

 

...

 

2021.6.15. 추가설명

https://youtu.be/DxM8lw2ma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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