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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궁극에의

이제는 상상을 자극할 때니까

by 큰바위얼굴. 2021. 11. 6.

괴로워 한다.
내 유전자를 받고 내 고민을 내 생각을 이어 받은 첫째는 몸살을 앓고 있다. 몸소 살리려고 십자가를 진 그 분처럼.

아파한다. 때를 벗겨내고 있다. 묻어 있던 기록과 현실이라는 파티클을 지우고 있다. 당연하다. 미안하다. 내 상상을 이어갈 아이들이 살아나갈 삶이 이전과 같지 아니하니 혼란스럽기 끝이 없고 계속 계속 물음을 던질 것이다.

괴로움과 아픔은 환희를 이끈다. 멀지 않았다.

보고 듣고 느낀 세상을 마음껏 상상으로 가득 채우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진짜가 되고 우리가 상식으로 알던 모든 기록들이 싹 다 갈아 엎어질 것이니 그에 대비하여 상상의 힘을 키워 이겨내렴.

배ㅜ고 익혔던 것들은 모두 지우고 앞으로 일어날 거대한 변화 앞에 당당히 맞서렴. 스스로 움직이고, 알아서 하는, 가짜가 진짜와 같은 세상에서 사람됨을 이어가려면 우리가 알 던 우리가 믿던 것들로부터 진정 가져가야 할 마음(괴로움과 아픔에 기반한 환희) 만은 지켜 나가야 할 테니까.

낮잠에서 깨어 남기는 지금, 내가 본 내가 다녀온 모습은 가히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결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었다. 이제 무수히 많은 새로움에 대한 개념 정의와 수용 혹은 배척 사이에서 무척이나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늘길이 열리고 꿈으로 가는 빗장이 풀리면 경계가 사라진다는 옛 기록에서 본 듯이 가치 또한 돈이 아닌 진정성 혹은 기꺼움 혹은 너니까 라는 관계로부터 상상을 이해하는 받아들이는 면면으로 이를 주식으로 살아가리라. 먹고 일하며 살아가는 직접적인 현실에의 고통과 환희는 상상이 가득찬 미지의 공간 혹은 꿈 속에서 유영하듯 대부분의 시간을 잊고 살아가리니 매트릭스에서 본 세상의 장막은 사실 이를 미루어 짐작한 것에 불과하다. 우주개척, 가상세계, 진화, 지구오염, 부의 과도한 증식은 모두 한결같이 이를 가르킨다. 코로나, 가축질병, 유전자 기반 백신은 직접적인 진화를 촉발하고 있다.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선별하기에 들어갔다. 백신을 맞는다. 당연하게. 그리고 죽는다. 선별 혹은 적합하지 못한 이들은 스스로 맞은 주사 한 방에 죽는다. 이런 선별은 전기차와 자율차가 가져올 미래, 일자리가 사라진 세상에서 인류 각자가 겪어야 할 괴로움과 아픔이요 이를 넘지 못하면 죽는다. 선별되어진다. 죽는 것조차 유의미한 결과로 수집된다. 저번에 밝힌 것처럼 우리 삶은 혹은 우리는 실험체라고 했듯이 이제까지 갖고 있던 기꺼움에 기반한 의지는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다가온 단계는 피할수 없이 모든 인류가 대상이 되었고 진행중이다. 질병으로 직접 죽는 것 보다는 너로 인해 사회 전체 혹은 많은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으니 백신을 맞아라. 맞지 않으면 지탄 받는다. 마녀사냥처럼. 고도로 발전한 마녀사냥은 이처럼 압묵적이고 자각치 못한 사이에 우리가 우리를 각자몫이라는 미명 아래 내몰고 있다.나만 아니면 돼 하는 이기심이 자극 받는다. 이런 이기심이 팽배한 사회에서 이제는 스스로 움직이고, 알아서 하는, 진짜가 가짜가 되는 세상이 열리면 어찌 될까?

( 이제 관전자는 전 세계를 전 인류를 통칭한 실험을 진행중에 있다고 본다. 과거에는 역사처럼 각기 진행했던 실험이 이제는 상호관계를 넣어 각기 반응을 보려는 듯이)

뉴스에서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자살이 늘었다는 기사가 온통 시끄럽게 떠들기를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살치 않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달콤한 사탕인 양 가상세계에 입문만 해도 돈을 준다고 할 것이다. 사실 알고보면 현실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즉 현실에서 살아가는 문제는 더이상 걱정꺼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층의 단호한 태도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내세워 가진 걸(대통령제, 기본소득, 노동법 등이 대표적) 놓치 않으려 꽤나 긴 시간을 허비한다. 아마 이 때문에 정작 스스로 움직이고 알아서 하는 주체, 가칭 신인류기계(뭐라 명명할 지 모르겠다. 단 과거 사이보그처럼 인류+기계가 아닌 AI+인류라는 점이 다르다)에게 충분한 대뷔무대를 줄 것이다. 자 이때 우리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피싸방에서 스타크래프트 하고 있을까?
연인과 데이트하고 있을까?
지루한 공방, 피상적인 몰아주기, 속고 속이는 사기치는 대표들을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까?
단 1명으로 인한 폐해를 벗어나지 못 한 고리타분함을벗어나 난 나대로 살거야 하며 일하고 있을까?

우리가 맞이하는, 알든 모르든 우리 본능은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예민한 사람들, 특히 자아가 강한 소우주를 품은 그렇지만 영글지 않은 자기만의 세계가 굳건하지 못한 너희들이나마 이를 느끼고 강한 반발심에 사로잡힌다. 왜 어디에 어떻게 분노할 지를 헤매는 이들이라도 되듯이 찾는다. 맞선다. 그런데 방향이 기득권이요 대통령제요 노동권이다. 왜 너희만 잘 사느냐고 한다. 왜 우리에겐 기회를 주지않는다고 한다.

사실 줄 놈도 모르고 있는 걸 어찌 하라구 하는 양 몰아붙인다. 젊은 분노를 눈치 보는 게 다인 늙은이들에게 향한 바람은 변화를 일으키겠지만 그 분노의 원천인 경고는 기존 체계의 무너짐에 있지 않다는 걸 간과하고 있다. 이런 세상이 열릴 테니까 젊음을 이쪽으로 쓰세요 라는 방향성이라도 잡아주면 그만이련만 알지 못하고 무지한 제도 운용은 갈팡질팡 소모되는 시간만 늘리고 기술종주국이 이끄는 대로 실험체의 실험체로서 직면한다.

스스로 움직이고 알아서 하는 진짜가 가짜와 같은 혹은 가짜가 진짜와 같은 세상에서 현실은 생명유지만 하거나 진짜와 가짜를 증강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경계조차 모호하게 섞는다. 분명 태어나ㅇ보고 듣고 살아가는 것이 일상인데 우리가 지금 손 안의 휴대폰에 몰입되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더한 자극 더한 재미를 쫒아 기꺼이 입문하리라.

(피로하다. 지금)

잊지말아야 할 사람됨됨이는 넉넉해진 일상에서 풍요로운 달콤한 인생을, 상상이 가득한 언제라도 앤돌핀이 쏟아지는 진짜와 가짜가 뒤섞인 세계는 행복감을 다르게 말한다. 전기자극이야말로 마약이다. 이는 향후 50년 후에 밝혀질 일이다. 늦었겠지. 이미 전기자극에 민감해진 육체는 전기자극으로부터 상상을 하는 매개체가 된 지 오래일테니.

늘어난 수명은 더이상 진화의 목표가 아니다. 수명조차 지루한 일상처럼 흐릿한 주제일 뿐 데이터의 업로드나 전기체화한 기록의 원형은 이 또한 경계를 허문다. 유기체를 전기체로 바꾼다. 삶과 죽음이 용어사전에서 사라진다. 잊힌다라는 말이 대체한다. 잊히는 순간 견디지 못한다.

( 현실에서 태어남은 상상 속에 태어난 존재들로부터 무한한 관심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그렇게 생각지 않은 인류가 분명 있을 것이다. 현실인류 1명 = 무한대의 상상인류)

그래서?

빗장이란 빗장은 다 빼낸 상황에서 우린 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상상으로 가득찬 전기자극이 행복감이 된 그 때, 그리고 그 이후 우리는 영생을 이루었고 우주를 개척한 그 때 우린 뭘 더 바랄까? 과연 이 과정에서 우리가 취할 바랄 것은 뭘까? 만족감? 난 잘 살았어? 행복감? 난 당신과 함께 여서 기뻐? 이런 사랑이나 죽음이 놀이처럼 흔한, 죽음이 전기자극이 되어버린 세상, 세 번이든 열 번이든 하고자 한다면 다시 사는 삶의 프로그램을 따라서 살아도 되는 그런 세상에서 우린 사랑, 행복, 아픔, 괴로움을 잊고 말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 지금의 네 괴로움과 아픔은 축복이라구. 괴롭지 아니하고 아프지 않은 이는 잘 모른다. 지운 만큼 가득찰 것이니 너가 당장 할 일은 수 많은 이야기를 보고듣고 상상을 해보는 것, 그래서? 이러면 어떨까? 웹툰 보기를 게을리 하지 마.

진짜 세상에서 죽음조차 사라진 세상에서 영생을 얻은 전기체로서의 생을 선택을 한 이들과 스스로 움직이고 알아서 하는 이들, 현실세계를 고집하는 이들. 이렇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대명제는 뭘까?

괴로움, 아픔은 아니다.

잊혀짐 또한 아니다.

재미 또한 아니다.

신과 다르지 않은 세상.

상상과 영생을 얻은 때 우린 과연 뭘 더 바랄까? 육체가 하지 못하니까 상상을 통해 한다. 직접 못하니 직접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니 가상세계를 만들어서 한다. 우리가 잃은 건 스스로 움직이고 알아서 하는 이들이 가져간다. 일상의 지루한 현실은 그들이 살아간다. 우린 당연하다는 듯이 새로운 꿈의 세계라며 무한한 확장력과 AI의 도움으로 유지력을 이어 나가며 상상의 세계를 우주 너머로 향한다. 다행스럽게도 현실에서 우주개척이 진척되어 계속 자극이 일어난다면 무한한 상상은 한 동안 계속 이어나가겠지만 역사로부터 그리고 체험으로부터 기반한 상상의 세계는 더한 자극이 없는 한 멈추는 때, 결국 상상 또한 멈춘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의 무한한 확장을 위해서라도 우주개척처럼 나아감은 멈추지 않고 계속 계속 이어나갈 수 밖에 없다.

역사에서 배운, 고조선 시대 기후변화로부터 큰 선물로 인식했던 그때가 좋았다. 역사 속으로 향하는 사람들, 체험이란 이름으로 가볼 곳이 넘쳐난다. 이는 시작조차 안 했으니 그 시장의 방대함은 말해 무엇하랴. 요 정도 세상에서 살기 위한 뭔가를 해도 너희 인생은 충분히 즐겁고 재미 있을거로 본다.

전기자극이든 뭐든 체험가능하다면 좋다는 사람들.
우주개척조차 스스로 움직이고 알아서 하는 이들에게 넘어간다. 소소한 즐거움이 잊혀진 세상. 미담이 미담이 아닌 먹고사는 문제가 더 이상 걱정이 아닌 세상, 넌 뭐 할래?

그런 세상에서 뭘 더 찾을래?

그런 세상에서 뭐든 가능하다는 뭐든 상상만 하면 일어난다는 그 세상에서 넌 뭐를 할래?

자식조차 상상으로 만들어 낸다.
상상이 진짜든 가짜든 잊고 산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무너진 세상에서 우린 일하지 않는다. 번영과 풍요는 스스로 움직이고 알아서 하는 이들의 몫이 된다. 유기체의 한계를 지닌 그 때 넌 어떤 선택을 할래?

전기체로의 영생을 선택할래?

부의 원천은 물건에 있지 않고 교환에 있지 않다. 한 동안 세일즈가 사업의 핵심으로 남아있겠지만 그들이 대신하면 우린 우주에서 살래? 바다에서 살래? 라는 터전부터 고민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호락호락할지는 자신할 수 없다. 관전자가 뭘 바라느냐에 달려 있으니까. 김성호.

 

 

 

 

 

  • 스스로 `自`2021.11.06 17:54

    영웅이 되는 게 세상을 살아가는 목표는 될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알겠니?

    영웅이든 대통령이든 그럴 필요 없어. 그 삶은 그냥 그 삶인거지. 우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세상이 변해가는 지금 너의 역할을 찾아 즐겁게 살아도 충분해. 뭐든 늦은 건 없잖아. 그냥 내키면 해. 시간은 마법처럼 너의 그런 마음조차 말끔히 사라지게 할테니.

    어쩌면 피해서 낯 선 곳에서 이겨내도 좋겠지만 우리 소중한 건 챙기면서 살자. 밥 한 술 함께 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잘 알잖아. 나 또한 나를 해꼬지한 이들에게 저주도 하고 용서도 하고 관심도 끊어내려 하는데 얽히고 싶지 않아도 쉽진 않더라.

    이런 내가 그들과 비교할 하등의 이유조차 없는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이 우리네 살아가는 고민을 기쁘게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면 좋겠어.

    힘내. 그리고 사랑해.

    > 아빠가.

    답글
  • 스스로 `自`2021.11.07 06:52

    시련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 이유 보다는 이후 삶에 대한 달라진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몫이 생각만큼 쉽게 살아지지 않기 때문에 시련이라고 칭하는 것이니 사실 아니 왔으면 하는 되새김 보다는 새로이 태어났다 여기는 것이 어쩌면 그 시련의 이유를 궁금해 하는 과거 자신의 발자취를 쫓아 끊임없이 고뇌하는 면과 같다.

    어느 것 하나 같은 면이 없으니 이를 다르다 한다. 그렇게 다른 면 때문에 주변에 영향을 끼치니 어찌 고마운 대상이 아닐까. 자신으로 인한 아픔을 진하게 간직한다는 면은 애정이라는 바탕에 지극히 닿았음이니 어찌 이번 생이 실패라 여길까. 그 누가 애정을 진하게 느낄까.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 자신몫으로만 여기지 말고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면 되리라.

    눈물은 아프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애정을 느끼니 그런 것이요 치유 라기 보다는 놓치고 살아온 지난 절취부심한 삶에의 후회라.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어도 때가 있기 마련이니 무얼 놓쳤다 할까. 무얼 잃었다 할 것인가. 울기 때문에 깨끗해지는 마음 하나 하나 어찌 이를 고맙다 여기지 아니할까. 그 누가 있어 짊어진 생이 이다지도 울게 할 수 있겠는가. 슬퍼하지 말자.

    고뇌라는 아픔은 슬퍼할 대상이 아니라 개 중에 뽑힌 자를 말함이니 이는 영광된 실험체로서 기꺼이 응하여 그 물음에 답을 내면 그만. 물음에 답하라. 자아를 괴롭힌 정체는 그래 무엇이더냐. 무얼 보았고 무얼 느꼈느냐. 피상이 얼마나 괴로움의 원천인지 알겠더냐. 한 꺼풀 벗기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일임에야 계속 계속 벗겨야 너의 역할을 찾을 것이니 그 과정이 어찌 고달프고 외롭지 아니하겠느냐. 그래 위안은 어디에서 오더냐. 혼자가 좋더냐. 편함이 편하지 아니할 때와 혼자가 혼자가 아님을 알았을 때 어떠하더냐. 이런 실험이 몫이더냐. 받아들임이더냐. 벗어나야 할 것이더냐. 오히려 비우고 지운 그 상태에서야 비로소 보게 된 그 면을 이제야 왜 봐야 했는지 왜 나이어야 했는지 알겠더냐. 그 자리가 너만을 위한 자리가 아님을 알겠더냐. 중하고 중한 시련이니 가벼이 여기지 말고 되새기고 다시 새기는 일련의 반복을 괴로워 하고 아파하며 비우고 지우기를 마다하지 말 것이야.

    몫은 역할을 이끌기 마련이니 지금 그 자리에서 비운 것과 채울 것을 피상이 아닌 아니 피상이어도 좋으니 후회, 그리고 괴로움, 관심, 달라진 일상. 달라진 시각에 대해 관찰자가 대신 작성한 면을 받아들인 날.

    영록아,
    영탁아,
    치형아,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을 바라는 게 아닐까. 괴로울 수 있으니 기꺼움이 생기지 아니할까. 그 면 면은 다르게 마주하고 있기에 그 역할을 다하고 있으니 피상이 비록 허울 일지라도 현실이 시궁창이라 칭해져도 어찌 몸뚱이의 소중함을 버리고 지고한 경지를 논하겡ㅎ는가. 면면은 이어지고 다른 듯 같은 곳을 가르키니 어찌 경중을 논할까. 비교하지 말아. 바람 대로 살아. 아니 되어도 좋다 여겨야 할꺼야. 그 바람은 아니될 줄 알고 바랐기 때문이니 너무도 당연한 것을.

    두려울 것이 없다.
    비교하지 않으니 걱정과 고뇌가 사라지더라.
    불안할 이유가 없다.
    그저 살아가는 이유가 이와같음을 인정하면 그 뿐이라.
    큰 도는 작은 그릇에서 나올 수 없음으니 괴롭고 지치고 아파하고 지우고 부정한 그 순수함이야말로 그릇을 크게 하는 방편이라 여겨진다. 도는 애요 채울 바람은 최대한 비울 때 가득차니 부족함을 채우고 채우면 어찌 헛되다 할까. 허울 뿐인 돈, 명예, 신망, 물질, 쫓고 쫒는 반복이야말로 하고 있으면서도 하지 않아도 좋을 것들이니 정작 잊지말아야 함은 결국 남겨진 나머지와 같이 고뇌에 찬, 아픈 내면이라.

    괴롭고 아픈 만큼 잘 살아왔다는 증거이니 그 지고한 경지에 닿았음을 후회하고 후회하는 것이라. 고뇌와 즐거움이 다른 면을 마주한 것처럼 생의 환희 혹은 경지 혹은바람의 끝이라함은 닿는 순간 다른 면과 만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잃기를 두려워 말며 얻기를 바라지 마라. 잃고 얻음은 그저 따라오는 것이니 잃고 얻는 그 과정에서 쌓인 산물, 진실, 혹은 체감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리라.

    왜 입증하려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어찌 살라구.
    왜 이다지도.

    감사하고 고맙다 해. 번민과 고뇌는 그만큼 다른 면을 함께 가지고 있어 간절해지기 마련이니 어찌 이번 생을 실패라 칭할 수 있을까. 알고보면 실패면 어떻고 성공이면 어떠할까. 고뇌와 즐거움, 실패와 성공, 다른 면을 그렇게 바라고 바랐더랬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두가 쓴 건 뱉고 단 걸 찿더라. 답은 쓴 것과 하기 싫어 하는 것에 있다는 걸 잘도 알면서 일상 보다는 후회를, 벗어남 보다는 회피를 택하더란 말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하다하다 지치는 그날, 후회도 아픔도 기한이 있으니 다 채운 그 날 환희와 참맛 또한 가득찼다 함이니 너가 할 건 다른 면과 마주하고 있다고 여기면 그만이다. 깨달음은 단순하다.

    가는대로 사는대로 흐르는대로 생긴 물결은 그저 보이는 피상이거나 비춰진 그림자에 불과하니 그 물이 어디로 어느 길로 가려하는지 그걸 궁금해 하면 좋겠다.

    그 물의 끝은 생긴 물결 만큼이나 의미 없는 일이니 목표가 아닌 살아가는 이유는 지금 고뇌하고 후회하는 그 마음에 있다. 잘잘못이나 후회스런 과거나 모자란 면이 아니다. 물은 흘러가야 산다. 그것만 지켜도 충분하다.

    성패 또한 피상이다.
    결과는 과정의 그림자다.
    후회는 물이 흘러가기 위한 다른 면이다.

    면면이 이어지고 끊어지면 잇기를 반복하니 이를 흐를 류에 비유한다. 진실을 바라봐야만 가짜가 보일 꺼라 믿었었다. 극쾌야 말로 대성공이야말로 바람의 끝이라 여겼었다. 아니더라. 다 이루면 아니 이뤘다 여기는 순간 생이 다한 것처럼 의미를 잃더라. 작은 하나에도 이럴진데 큰 도는 얼마나 크게 다른 면을 동반할까 두렵다. 아니갈 수도 회피할 수도 태어난 순간 시작된 여정.

    살아간다는 건
    잊히지 아니한다는 건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잊혀짐이 죽음마냥 괴로운 면이 아니라 그 또한 우리네 바람이 아닐까.
    면면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큰 물 줄기를 이어주기를 바라는, 물이 흐르고 흘러가고 있음을, 바톤을 받아 다시 들고 뛸 주자가 계속 이어지기를.

    사는 이유 따윈 없다.
    태어난 순간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선수든 의사든 정치가든 업을 택하는 건 택해지는 건 모습일 뿐 그 과정에서 체감하는 감정이야말로 물음에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아멘.
    기도한다.
    바란다.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이.
    얻으면 그 만큼 잃을 것이 많아짐이다.
    다만 피상은 잃을 것이나 진의는 거듭 나니 이 또한 흘러가는 물이 생동하는 이유와 같다.

    간절하니까.
    우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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