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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궁극에의

무슨 이유에선지 모두가 쓴 건 뱉고 단 걸 찿더라

by 큰바위얼굴. 2021. 11. 7.


시련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 이유 보다는 이후 삶에 대한 달라진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몫이 생각만큼 쉽게 살아지지 않기 때문에 시련이라고 칭하는 것이니 사실 아니 왔으면 하는 되새김 보다는 새로이 태어났다 여기는 것이 어쩌면 그 시련의 이유를 궁금해 하는 과거 자신의 발자취를 쫓아 끊임없이 고뇌하는 면에서 낫다고 본다.

어느 것 하나 같은 면이 없으니 이를 다르다 한다. 그렇게 다른 면 때문에 주변에 영향을 끼치니 어찌 고마운 대상이 아닐까. 자신으로 인한 아픔을 진하게 간직한다는 면은 애정이라는 바탕에 지극히 닿았음이니 어찌 이번 생이 실패라 여길까. 그 누가 애정을 진하게 느낄까.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 자신몫으로만 여기지 말고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면 되리라.

눈물은 아프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애정을 느끼니 그런 것이요 치유 라기 보다는 놓치고 살아온 지난 절취부심한 삶에의 후회라.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어도 때가 있기 마련이니 무얼 놓쳤다 할까. 무얼 잃었다 할 것인가. 울기 때문에 깨끗해지는 마음 하나 하나 어찌 이를 고맙다 여기지 아니할까. 그 누가 있어 짊어진 생이 이다지도 울게 할 수 있겠는가. 슬퍼하지 말자.

고뇌라는 아픔은 슬퍼할 대상이 아니라 개 중에 뽑힌 자를 말함이니 이는 영광된 실험체로서 기꺼이 응하여 그 물음에 답을 내면 그만. 물음에 답하라. 자아를 괴롭힌 정체는 그래 무엇이더냐. 무얼 보았고 무얼 느꼈느냐. 피상이 얼마나 괴로움의 원천인지 알겠더냐. 한 꺼풀 벗기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일임에야 계속 계속 벗겨야 너의 역할을 찾을 것이니 그 과정이 어찌 고달프고 외롭지 아니하겠느냐. 그래 위안은 어디에서 오더냐. 혼자가 좋더냐. 편함이 편하지 아니할 때와 혼자가 혼자가 아님을 알았을 때 어떠하더냐. 이런 실험이 몫이더냐. 받아들임이더냐. 벗어나야 할 것이더냐. 오히려 비우고 지운 그 상태에서야 비로소 보게 된 그 면을 이제야 왜 봐야 했는지 왜 나이어야 했는지 알겠더냐. 그 자리가 너만을 위한 자리가 아님을 알겠더냐. 중하고 중한 시련이니 가벼이 여기지 말고 되새기고 다시 새기는 일련의 반복을 괴로워 하고 아파하며 비우고 지우기를 마다하지 말 것이야.

몫은 역할을 이끌기 마련이니 지금 그 자리에서 비운 것과 채울 것을 피상이 아닌 아니 피상이어도 좋으니 후회, 그리고 괴로움, 관심, 달라진 일상. 달라진 시각에 대해 관찰자가 대신 작성한 면을 받아들인 날.

영록아,
영탁아,
치형아,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을 바라는 게 아닐까. 괴로울 수 있으니 기꺼움이 생기지 아니할까. 그 면 면은 다르게 마주하고 있기에 그 역할을 다하고 있으니 피상이 비록 허울 일지라도 현실이 시궁창이라 칭해져도 어찌 몸뚱이의 소중함을 버리고 지고한 경지를 논하겡ㅎ는가. 면면은 이어지고 다른 듯 같은 곳을 가르키니 어찌 경중을 논할까. 비교하지 말아. 바람 대로 살아. 아니 되어도 좋다 여겨야 할꺼야. 그 바람은 아니될 줄 알고 바랐기 때문이니 너무도 당연한 것을.

두려울 것이 없다.
비교하지 않으니 걱정과 고뇌가 사라지더라.
불안할 이유가 없다.
그저 살아가는 이유가 이와같음을 인정하면 그 뿐이라.
큰 도는 작은 그릇에서 나올 수 없음으니 괴롭고 지치고 아파하고 지우고 부정한 그 순수함이야말로 그릇을 크게 하는 방편이라 여겨진다. 도는 애요 채울 바람은 최대한 비울 때 가득차니 부족함을 채우고 채우면 어찌 헛되다 할까. 허울 뿐인 돈, 명예, 신망, 물질, 쫓고 쫒는 반복이야말로 하고 있으면서도 하지 않아도 좋을 것들이니 정작 잊지말아야 함은 결국 남겨진 나머지와 같이 고뇌에 찬, 아픈 내면이라.

괴롭고 아픈 만큼 잘 살아왔다는 증거이니 그 지고한 경지에 닿았음을 후회하고 후회하는 것이라. 고뇌와 즐거움이 다른 면을 마주한 것처럼 생의 환희 혹은 경지 혹은바람의 끝이라함은 닿는 순간 다른 면과 만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잃기를 두려워 말며 얻기를 바라지 마라. 잃고 얻음은 그저 따라오는 것이니 잃고 얻는 그 과정에서 쌓인 산물, 진실, 혹은 체감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리라.

왜 입증하려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어찌 살라구.
왜 이다지도.

감사하고 고맙다 해. 번민과 고뇌는 그만큼 다른 면을 함께 가지고 있어 간절해지기 마련이니 어찌 이번 생을 실패라 칭할 수 있을까. 알고보면 실패면 어떻고 성공이면 어떠할까. 고뇌와 즐거움, 실패와 성공, 다른 면을 그렇게 바라고 바랐더랬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두가 쓴 건 뱉고 단 걸 찿더라. 답은 쓴 것과 하기 싫어 하는 것에 있다는 걸 잘도 알면서 일상 보다는 후회를, 벗어남 보다는 회피를 택하더란 말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하다하다 지치는 그날, 후회도 아픔도 기한이 있으니 다 채운 그 날 환희와 참맛 또한 가득찼다 함이니 너가 할 건 다른 면과 마주하고 있다고 여기면 그만이다. 깨달음은 단순하다.

가는대로 사는대로 흐르는대로 생긴 물결은 그저 보이는 피상이거나 비춰진 그림자에 불과하니 그 물이 어디로 어느 길로 가려하는지 그걸 궁금해 하면 좋겠다.

그 물의 끝은 생긴 물결 만큼이나 의미 없는 일이니 목표가 아닌 살아가는 이유는 지금 고뇌하고 후회하는 그 마음에 있다. 잘잘못이나 후회스런 과거나 모자란 면이 아니다. 물은 흘러가야 산다. 그것만 지켜도 충분하다.

성패 또한 피상이다.
결과는 과정의 그림자다.
후회는 물이 흘러가기 위한 다른 면이다.

면면이 이어지고 끊어지면 잇기를 반복하니 이를 흐를 류에 비유한다. 진실을 바라봐야만 가짜가 보일 꺼라 믿었었다. 극쾌야 말로 대성공이야말로 바람의 끝이라 여겼었다. 아니더라. 다 이루면 아니 이뤘다 여기는 순간 생이 다한 것처럼 의미를 잃더라. 작은 하나에도 이럴진데 큰 도는 얼마나 크게 다른 면을 동반할까 두렵다. 아니갈 수도 회피할 수도 태어난 순간 시작된 여정.

살아간다는 건
잊히지 아니한다는 건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잊혀짐이 죽음마냥 괴로운 면이 아니라 그 또한 우리네 바람이 아닐까.
면면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큰 물 줄기를 이어주기를 바라는, 물이 흐르고 흘러가고 있음을, 바톤을 받아 다시 들고 뛸 주자가 계속 이어지기를.

사는 이유 따윈 없다.
태어난 순간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선수든 의사든 정치가든 업을 택하는 건 택해지는 건 모습일 뿐 그 과정에서 체감하는 감정이야말로 물음에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아멘.
기도한다.
바란다.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이.
얻으면 그 만큼 잃을 것이 많아짐이다.
다만 피상은 잃을 것이나 진의는 거듭 나니 이 또한 흘러가는 물이 생동하는 이유와 같다.

간절하니까.
우린 산다. 김성호.

 

 

 

  • 스스로 `自`2021.11.07 07:11

    피씨방에 출근하는 건 걱정꺼리가 아니다.
    누워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야말로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물론 털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과정이 길 수도 있겠지만.

    숙인 고개, 작은 소리, 긴 머리카락은 걱정꺼리가 아니다.
    이또한 감정이 표출된 것이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속이는 것이야말로 걱정꺼리다. 물론 속고 속이는 세상 일이 흔하지만.

    자아발견, 자아성숙, 자아완성은 누구나 원한다.
    글로 남겼든 하고 있든 하지 않게 보이든.
    태어나는 순간 누구나 하는 자연스런 일이다. 나만이 특별하다는 걸 버리면 나만이 특별하다는 걸 자신감의 원천으로만 여긴다면 혹은 특별과 보통의 구분을 하게 된 자신을 발견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답글
  • 스스로 `自`2021.11.07 07:20

    양압기를 찬 내 모습을 허한다.
    아파할 후회할 대상이 아니라 반성과 나아감을 위한 동기로 삼고 그 벗어날 날을 희망차게 기대하며 살면 된다.
    아니될 줄 아닌걸 굳이 집착할 이유는 없고 아닌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피할 이유도 저주도 분노도 이 또한 자연스런 감정이니 욕 먹은 놈들은 불행해도 싸다.

    무의미하다. 바라지 않는다. 흘러가는 생. 가둘것도 멈출것도 줄것도 아니줄것도 나눌 필요가 없구나.

    낮게 흘러간다.
    높기를 바란다.

    높기를 바라며 낮게 흘러간다라.
    지우고 비운 끝에 얻은 건 첫째의 고뇌와 모습에서 둘째의 의기와 고민에서 찾아온다. 이렇게 좋을수가.

    장모님이 와서 자고 일어나 깨어 아내와 울고 있는 그때 그 순간 난 내 감정을 마음 깊이 내려 적는다. 풀어낸다. 난 관찰자요 주관자이니 그 끈은 얽히섥히 이어져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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