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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궁극에의

잠을 탐구중이다

by 큰바위얼굴. 2022. 1. 21.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지은 '잠'에 대해 읽고 있다.

엄마의 몽유병, 잠에 대한 탐구. 아들을 어릴 때부터 잠을 통해 극복해낸 상황. 불연듯 사고당한 아빠의 사건은 발췌한 '사실'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추임새로 보인다. 너무 강한 나머지 책을 덮고 싶을 때가 많긴 하지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그리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잠'은 꿈과 꿈을 연결하기에 있어서 플랫폼이요 터전이면서 그라운드, 즉 무대가 된다.

 

잠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은 몸소 겪게 되니 절실해졌음은 부인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 책에는 잠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오래되었으며 잠 자체에 대한 접근을 과학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난 베르베르가 잠을 탐구한 자로서 처음인 줄 알았었다.

 

"잠자는 시간은 몸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잠의 세계는 우리가 탐험해야 할 신대륙이다. 캐내서 쓸 수 있는 소중한 보물이 가득 들어 있는 평행 세계다.

앞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단잠 자는 법을 가르치는 날이 올 거다. (나도 동의한다.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고 본다)

대학에서는 꿈꾸는 방법을 가르치게 될 거다. (나 또한 그렇게 되리라 본다)

대형 스크린으로 누구나 꿈을 예술 작품처럼 감상하는 날이 올 거다. (요게 내 생각으로 꿈과꿈 연결하기를 바란 거다)

잠은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가능성을 극대화시키게 될 거다. (잠을 통한 회복프로그램을 생각했다. 나 또한)"

 

즉,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적극 공감하게 되었고, 내가 구상했던 내용들을 이미 생각했던 거구나 하며 늦은 건 아닐까 갈등하고 그나마 아직 실생활에 미치지 못했으니 어려운가 보구나 하며 잠을 통한 꿈과 꿈 연결하기에 대한 궁리를 계속 이어가고자 책을 펼쳐 계속 이어간다.

 

"잠자는 동안만 모든게 가능하다."

잠자는 동안 불가능한 것이 없다. 다만 생각하기, 상상하기, 그리고 나누기가 힘들 뿐. 꿈꾸는 방법만 체득한다면 혹은 지금 나처럼 꿈에 대한 바람을 가진다면 잠자는 동안 꿈을 꾸게 되고 꿈을 꾸고 펼쳐지는 드라마는 때론 여러 의미로 해석하려고 하지만 사실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

 

장면은 토막토막, 도대체 뭔 말을 하고 싶은 건데 하는 줄거리. 알기 어렵고 알 수 없는데, 긴박감은 무척 큰.

막상 꿈을 옮겨 적으니 이건 또 뭔가 하는 도대체 문맥은 통하지 않는 그런 상황에 대한 꿈 속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싶다.

 

다행스럽게도 내겐 큰 무기가 있으니 그냥 그렇다고 여기고 꿈은 꿈일 뿐이야 라고 여기면 된다는 점이다.

 

 

"이때만 해도 아기는 삶이 결국 끊임없는 배경의 변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장소가 바뀔 때마다 우리에게는 일거리처럼 새롭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주어진다."

 

그렇다. 그냥 살면 돼. 오늘을 기점으로 새로 출발해도 충분해. 과거는 과거일 뿐. 닥친 역경이나 고난, 혹은 심경의 큰 아픔이나 고통은 모두 그저 끊임없이 변화하는 배경으로부터 본인이 받은 자극에 불과할 뿐이야. 우리는 긴 여정을 가고 있지. 어쩌면 지극히 짧을 수 있는. 내일 바로 생을 마감하고 다음 생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단편적으로 보진 말자는 말. 일단 이번 생에 국한되어 말하자면 "어머니 배 속에서 출발해 땅속 관에 이르는 여정"이라는 말로 우리 삶은 결국 여러 일거리, 만나는 사람, 그리고 여러 환경들이 변수가 되어 그 안에서 내 손짓에 내 몸짓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생각이 내 마음이 투영되어 나타난 모든 표현들에 의해 그 변수들과 어우러져서 하모니 혹은 스토리가 완성될 뿐이지 라고 봐.

 

그저 주어진, 혹은 만들어진 세상을 살아보는 거지. 우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무한히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이 얼마나 유한한지 잘 모를 뿐더러 마치 오래도록 이어질 거란 착각에 빠지기 쉽지. 자고 일어나 일하고 자고 자고 일어나 일하고 자는 일이 반복되니까.

 

착각은 큰 오해를 불러오기도 해. 영생이나 꿈, 혹은 다음 생, 기대감은 죽음을 쉽게 보는 경향까지 이어지기도 하지.

말하고 싶은 건 너무 무겁게 볼 필요는 없다는 거야. 삶이란 결국 자기에게 달려 있는 거야. 일하지 않아도 돼. 꿈을 꾸지 않아도 돼. 말하지 않아도 돼. 즐겁다고 즐거운 척 하지 않아도 돼. 멍 하니 멍 때리는 자신을 책망하지 않아도 돼. 그저 하릴 없이 노는 것처럼 세상이 흘러간다고 미워하지 않아도 돼. 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굳이 반문하지 않아도 돼. 살다보면 다 되겠지 하는 마음, 그것만 필요할 뿐이지. 어쩌면.

 

당연하게도 삶은 순탄하지 못해. 순탄할 수가 없어. 내가 욕심을, 조금 더 큰 욕심을 부리는 순간 그 욕심이란 감정은 마음을 흔들고 일을 만들고 사람과 갈등을 빚거나 환경을 바꾸거나 바뀐 환경에서 집착하거나 어떤 변화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걸 알잖아? 욕심이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지. 기대를 품는 순간 우린 그 기대감에 기대어 삶을 지탱해. 아마 대부분. 나 또한. 그 기대감은 살아가는데 힘이 되어 주긴 해. 그런데 막상 이루면 이루었다고 그 기대감이 충족되기 보다는 시원한 가운데 미친한 부분 때문에 다시 일터로 나가지. 더 이루려고. 더 그 기쁨을 맛 보려고. 그게 맞다고 자신에게 속삭이면서 더 치대지. 근데 아니더라 이 말이야.

 

우리 삶이 경험치를 축적하여 나누고 기록하여 그 경험 에너지들이 세상을 이끌어간다손 치더라도 우리에겐 '선택'이란 자유가 있더란 말이지. 그저 그냥 살아가도 좋은 사람들은 그래도 돼. 그렇지만 조금 의문을 품은 사람들조차 마치 그래야 하는 건 아니듯이 내 의문은 거기에서 출발했고 비록 짧지만 48년 생을 돌아보니 맞장구를 치게 되더라구.

 

그 결과가 바로 "이때만 해도 아기는 삶이 결국 끊임없는 배경의 변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장소가 바뀔 때마다 우리에게는 일거리처럼 새롭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주어진다."라는 문장에서 말하듯이 삶이란 결국 끊임없이 배경의 변화에 불과해. 그러니 그냥 하면 돼. 하고 싶은 대로. 자고 싶으면 자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꿈을 꾸고 싶다면 꿈을 꾸고. 그곳이 꿈 속이든 현실이든. 배경에 휘둘리지 말고 그저 하나씩 짚어보면서 하면 된다고 봐.

 

"생명은 모두 그릇에서 벗어나 자신을 확장하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발견하려고 한다. 한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체계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되거든" 이란 말처럼 생명은 살아감에 있어 나아지길 바라고 그 방향으로 애를 써. 체계를 넘든 제한된 그릇을 키우든 공간을 도약하든 그런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조금 별스런 얘기긴 한데 말을 해보면, 그릇은 정해져 있지 않아. 정하는 순간 그릇의 크기가 종기그릇 만큼 혹은 대야 만큼 또는 컵 만큼 혹은 우물 만큼, 더 키워볼까? 강 만큼? 바다 만큼? 지구 만큼? 우주 만큼? 우리가 어릴 때 해본 대화 같지 않아?

 

"내 마음은 지구 만큼 땅 끝까지 크다" 하고 크게 두 팔을 벌려 표현하니,

옆에 친구가 " 내 마음은 우주 만큼 커. 우주는 지구를 포함하고 있으니까" 라며 두 팔을 벌리긴 벌려야 겠는데 표현을 망설인단 말이지. 도대체 우주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러다가 문득 두 팔 벌렸던 친구를 둘레로 빙글빙글 돌면서 이 만큼 이야. 라고 말하지.

 

우주 만큼 크다.

이런 바람이 바로 우리의 본성이라고 봐. 장난처럼 얘기되는, 그렇지만 우리가 해내는 숙제처럼. 경험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렵진 않다고 보잖아? 단지 지금 그것을 구현하지 못할 뿐이지 불가능하다고 보진 않잖아?

 

것 봐. 일이란 결국 숙제를 함께 해 나가는 것에 불과해.

 

자, 여기에서 다시 조금더 나아가 보면, 앞의 문장에서 "그것을 구현하지 못할 뿐이지 불가능하다고 보진 않잖아?" 라는 말에 집중할 필요가 있어. 땅 만큼 지구 만큼 혹은 우주 만큼.

 

말하고자하는 결론부터 말하면, 구현하지 못한 걸 구현하려는 노력은 육체기반의 현실에서 하면 되고, 불가능해 보이는 건 정신기반의 꿈에서 하면 어떨까 하는 거지. 만지고 봐서 느끼는 현실감이 과연 현실일까? 현실이란 반드시 만지고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일까? 있다와 없다의 경계는 뭘까? 껌껌하면 없는 것일까? 있잖아? 꿈은 있어 없어? 꿈은 꾸잖아? 있지. 있는데 만질 수는 없는 있는 거지. 그렇지?

 

오감에 의한 체감은 현실에서,

꿈 같은 현실은 잠을 통해 혹은 상상과 생각을 통해 하자는 거지. 내 생각이 말야. 우리에겐 시간이 유한하니까.

조금 더 그럴 듯한 조금 더 흥미진진한 기대를 채울 꺼리를 찾잖아. 그렇다고 무조건 기기의 도움을 구할 필요는 없는 거 같아. 지금 내 생각은 그래. 단지 전환의 문제가 아닐까 하고 접근중이지. 마치 기기에 집중하는 순간 기기에 집중한 나머지 본질을 보질 못하는 것처럼 기기는 나중, 일단은 꿈과꿈을 연결하기를 위해 꿈을 꾸고 꾼 꿈을 이야기하고 기록하고 있지. 하다보면 닿지 않을까 하는 무한한 기대감으로. 후후.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

잠에 드는, 잠자는 방법을 알려줘. 책에서.

 

 

 

 

 

"그건 너의 현실일 뿐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다. ... "

"현실이 믿음이라면 꿈은 뭘까?"

 

생각이 많아지는 대목이다.

 

 

"믿는다는 것은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믿음이 현실이라면 꿈은 뭘까?

대답해보자.

 

꿈 또한 믿음이다. 아직 책에서 결론은 못 지은 건지, 읽은 것이 1권의 1/3가량인데 아직 찾지 못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꿈 또한 믿음이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은 믿음으로 하나가 된다. 사실 다르지 않다고 믿으면 된다.

 

거기에서 출발하여 여기에 도달했고 계속 나아갈 계획이다. 궁리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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