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다 라는 말은 당연하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를 봄에 있어 자연스럽게 일어났구나 하는 수용적 태도를 말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바라보는 관점에서 받아들이게 되면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다 라는 걸 토대로 어느 한 단면에 치우쳐 자책하거나 물러서지 아니하고, 다른 면 또한 있으니 종합적으로 보아 나를 둘러싼 각각의 단면들을 일렬로 늘어선 시간개념으로 몰아세워 고통, 아픔처럼 단면적 감정이 아니라 시간개념을 뺀 각각의 단면이 둘러싼 중심축의 입장에서 비록 단면들의 넓이가 제각기 다르겠고 어찌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각각의 단면들을 둘러보메 '나'를 혹은 '영생'을 역할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럽다 라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이다. (풀어내려니 어렵군. 녹음파일을 들어보길 권한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로부터 이어진 '자연스럽게' (산책중 녹음)
출발 : 뚝방길에 올라서며
1부. 어제의 내가
새벽 6시반, 출근길
한국교통대 신호등에서 대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든 생각을 말한다. 철도건널목이 왼쪽에 있고 오른쪽에는 농협하나로마트, 그리고 새벽 일찍임에도 불이켜진 파리바게뜨와 세븐일레븐, 아마 대학로이기 때문이겠지 한다. 반갑다.
밤새 뒤척였다. 메모리폼 베개를 베었다가 목침을 베었다가 목침을 뒤집어 베었다가 베게를 베지 않았다가 이러저리 뒤척이며 자는 중에 더워 이불을 걷었다가도 추워 발목만 이불 밖으로 내어내고 팔은 서늘하여 이불 속으로 넣고 그런다. 그러다보면 꼬인 양압기의 관을 '자연스럽게' 풀어내기도 한다.
화장실에 앉았다가 일어나고, 양압기 코마개를 닦아 놓을 곳을 세면대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샴푸(머리에 자극이 심하여 세재용으로 사용중인)를 짜서 딱는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변기 속도 닦는다. 그리고 양압기 물받이와 코마개를 가져와 깨끗해진 세면대 위에 놓는다.
주차장에 도착한다. 빙 둘러 전면주차를 해서 나가기 좋게 한다. 이러하니 많은 차들이 '자연스럽게' 전면주차로 하더라.
2부. 오늘의 내가
어제와 달리, 오늘은 조금 일찍 도착했다.
어둔 사무실을 밝히고 공기청정기를 켜고 난방기를 튼다. 그리고 새벽 산책길에 나선다.
출퇴근 일지를 기록하는 지금, 출퇴근을 재는 시점을 어느 곳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생각해 본다.
사무실에서 사람들을 만났을 때를 출근으로 볼 것인가?
주차장에 도착한 때를 출근으로 볼 것인가?
출근과 퇴근은 일터에 왔다 가는 개념이 들어있다. 그러하니 출근을 재는 지점이 정문 너머 아주 깊숙한 곳에 있다면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즉, 출근은 일터에 들어서는 지점인 주차장에 인접한 곳에 체크박스가 있기를 바란다. 다시말해, 출근은 일터의 경계를 넘는 그 지점에 있기를 바란다. 그렇지 못할 때 동의를 구해야 한다.
이처럼 출퇴근을 재는 지점에 대한 사례를 통해서 하지않았던 출퇴근 일지를 작성하면서 느끼는 불쾌감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려는 노력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방어적으로.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연스럽다'에 대해 생각이 이어진다.
3부. 자연스럽게
생각과 고민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산책길에 유독 그렇다. 한 명 한 명 떠올리면서 생각을 한다. 생각이 든다. 아내를 생각하고 아이들을 생각하고 윤호를 어머니를 장인을 장모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내 역할과 입장에 대해 생각을 정리한다.
윤호의 결혼에 대해 내가 해야 할까? 나설까 라는 면 보다는 굳이 나서야 할까 라는 생각이 강하니 가만이 있는다. 내 문제일까?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일까? 내가 나선들 차이가 있을까? 이루어지기 위해 나섰을 때 드는 생각은 과거 있었던 오송집을 장만할 때 나를 속였던 먼저 상의하지 않았던 실망감, 혹은 배신감 때문에 감정이 식는다. 주거니 받거니 굳이 해야하는 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다. 자연스럽게.
작은 누나와의 관계는 썩 내키지 않는다. 반갑지 않다. 그러니 멀리한다. 서로.
서로 아는 것이겠지. 굳이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보다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나섬이 굳이 그래야 할까? 라는 생각이 크다. 이미 그런 관계라고 여기지 않는다. 뻔하다. 나서봐야 달라질 것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크다. 그런 척은 할 수 있겠지만 그래야 할까? 그런 척을 하지 않고 거리를 두니 이렇게나 편한 것을, 굳이 그런 척을 하면서 나아가야 할까? 그래서 새해제사에 오지않고 어머니 집에 방문해서 놀다갔던 것에 대해 불쾌하지만 불쾌하지 않게 여기면서 이제는 오든오지않든 먼저 알리는 것 보다는 온다면 오는 사람이 연락해보도록 (최소한 어머니께는 연락하겠지) 하는 방향으로 그냥 둬 볼까 생각해본다. 명확히 올 건지 안 올건지 물어보고 오지 않는다면 오지 마라 올 거면 와라 하는 식으로 정하려고 해봤지만 뒤늦게 돌아보니 굳이 그렇게 정리한 들 마음이 편할까? 편치 않다. 그러니 둔다. 자연스럽게.
동생들은 내가 든든하지 않을까?
세상을 살다보면 돈으로 따져보게 되지만, 사실 일상 중에 어울리면서 나누는 이야기 중에 더 많지 않나 싶다. 든든함이나 도움의 손길, 주고받음, 관계 라는 건 그렇게 함께 하는 중에 쌓아진다. 자연스럽게.
이어달리는 주자로서 뛰고 있다.
https://blog.daum.net/meatmarketing/5282
이어달리는 주자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다. 그저 주자로서 역할을 다한다. 주자로서 더 오래 뛰려고 뛰는 중에 '영생'을 갈구하기도 하고, 다음 주자를 인식하고 '죽음'조차 이어짐이라 여기기도 한다. (여기부터는 산책길 중에 미쳐 놓쳤던 내용을 포함하여 pc앞에서 이어가고 있다)
죽음은 이어달리는 주자로서 보면, 내가 계속 뛸 것인지 자연스럽게 이어짐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어떠할지, 이어달리는 주자로서 영생토록 달리고자 하는지, 무한반복을 통해 지능을 획득한 A.I.가 만년을 100만년을 거쳐 감정까지 묻어났다면 그 A.I.라는 인격체 하나와 노쇠함과 늙어감이 있는 육체기반의 추억, 감정, DNA조차 그대로 옮겨진 저장매체로서의 또한 아메바처럼 단일개체로서 에너지를 얻고 씀이 효율적인 매체적 인격체 하나와 각각 비교해 볼 때 이어달리는 주자로서 "그래서 넌 뭘 바라니?"라는 질문에 답해봐.
A.I와 매체적 인격체로서 영생을 살아가면서 날아다니는 세상, 우주여행, 차원을 넘나드는, 텔레포트가 가능한 세상을 눈으로 본 들, 상상 속의 세상을 정신이 연결되어 함께 공유하고 나누고 경계없이 자유롭게 세상을 느낀 들, 자 살아있음을 기뻐하고 만끽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린 배경이 변화하는 경험이 지닌 의미 외에 과연 영생을 어디에서 찾을까?
역할이 뭔지, 영생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 그저 죽기 싫기 때문일지 더 살아살아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는 것인지, 이는 지금의 내가 뚜렷이 이루고자 하는 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지금의 나와 달리 누군가는 복수 때문에 누군가는 강박 때문에 누군가는 욕망 때문에 누군가는 비교 때문에 강하게 원하고 바라여 추구할 수 있다.
사실, 산책중에는 답을 내지 못했다. 바라고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바라고바라는 것을 찾고 있더란 말이다. 그저 주자로서 살아있음을 기뻐하고 만끽해도 충분한 것을 잊고. 자, 내게 주어진 건 살아있음이 우선이다. 인식했고 알았고 느꼈고 자연스럽게 이젠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 치우치지 아니하고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일상을 사건과 사고를 자연스럽게 바라보게 되는 수준에 이르렀더란 말이다. 굳이 산책길에서 하나하나의 단면을 이야기 하면서 풀어내지 않아도 괜찮다.
살아있으니 기뻐하고 만끽하자.
함께 하니 더할나위 없다.
각각의 단면들이 감정의 변주처럼 왔다갔다 한들 삶의 영생을 바라다가 만들, 포기가 아닌 수용이라면 조금은 달리 봐도 좋지 않을까 하면서 우리네 삶이 굳이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 듯이 그저 이어달리는 주자로서 살아도 좋겠다.
시간개념이 아닌 '나'를 중심으로 각각의 면이 바뀐다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면 좋겠다. 시간으로 과거로부터 미래로 쭈욱 이어가는 일렬로 볼 것이 아니라 각각의 단면들이 각각의 세상을 형성해 나간다 라는 시각처럼. 하나하나의 감정이 하나하나의 사건과 사고, 이슈가 하나하나의 면으로서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나는 기뻣다. 나는 행복했다. 나는 아팠고 슬펐다. 괴로웠다.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이처럼 각각의 감정적으로 보이는 그 면들은 각각의 상황과 경험을 담고 있다. 각각이 시간이 흘러 쌓인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상황 속에서 나이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배경처럼 경험이 되어 내게 와 닿았다 라고 보는 것이 바라보는 시각을 전환하기에는 나아 보인다.
하나하나의 단면이 나를 형성하고 있듯이 하나하나의 단면은 지구를 형성하고 나아가 영생을, 나아가 궁극을, 나아가 바람을 형성하고 있다. 어쩌면 이어달리기를 출발했던 그 오리진을, 어쩌면 앞으로 이어달리는 종점을 궁금해 할 수 있겠지만 굳이 이어달리는 지금, 때론 깊게 때론 얕게 때론 더없이 넓게 때론 아주 좁게, 멍해도 좋고 맹해도 좋다. 그저 이어달리는 주자로서 살아있음을 인지한다면 좋겠다.
도착 : 뚝방길을 내려서며
제4부. 자연스러움 속에
무한히 산다. 과연.
새들의 소리에 반갑고 묵묵히 서있는 전봇대에 눈이 가고 왔다갔다 하면서 시린 손을 비비면서 녹음을 이어가는 그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살아있음을 기뻐하고 만끽한 것이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찰라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 산책을 통해 녹음을 하고, 다시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기면서 정리하면서 기록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살아있다는 것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부담스러워 하더라도 나 또한 기꺼이 기록하면서 보람을 느끼니 더할나위 없다.
이제껏 살아보니 다행스럽게도 내겐 바라고바란 '큰바위얼굴'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기록하고 기록하는 '메모광'이 있었다. 언젠가 하나의 단면에 추억처럼 남겨져 있다. 메모광은 아마 고흐였던가 싶다. 아니어도 좋다. 삶이란 것이 그 때 그 순간 아마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거라 생각이 들었었고 그런 기록을 일기장에 남겼다고 기억이 난다.
(산책길 마지막 문장)
"이 한발작 한발작이 시간이 가는 개념이 아니라 면이 바뀐다라고 봤을 때 그 면들을 지금 내가 기꺼이 이렇게 이 순간에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면을 확장하고 확장한다. 확장해가고 있잖아. 감정에 지치지 아니하고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그 역할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자연스러움 속에서 나올 듯 말 듯. 좋아, 일단 자격은 된듯한 느낌이 드네. 이제 되었다 처럼. 자, 나아감이 있으니 더할나위 없이 좋다. 씨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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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自`2022.02.23 21:38
다시 읽어본 지금, 훈훈해진다. 글이란. 가끔 녹음파일을 직관적으로 듣지 못해 아쉬울 때가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불꺼진 캄캄한 공간을 묵직히 밝은 목소리로 낭낭하게 울린다라는 거. 듣다보면 잠이 든다. 언제쯤 꿈을 꿀까? 오늘은 찾아올까? 평안하니 꿈을 꾸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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