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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세상보기

by 큰바위얼굴. 2022. 10. 27.

새벽 산책길, '길'에 대하여 말한다. https://youtu.be/n-kpnHU438I

세종시 도담동 하천변 길

(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길을 가면서 지금의 화단, 숲풀, 시냇물, 징검다리를 건넌다. 지금,

길을 간다라. 미래나 높은 곳이 아니라 그저 나아가는 부분을 얘기한다. 그렇다면 시간. 시간은 가기 마련. 지금을 느끼면 더디게 가는 것 또한 인지상정. 그냥 시간이 흘렀다.

무엇이 어떤 것이 있었느냐에 의미를 두고, 의미를 만들고 그렇게 여기는 것. 참 잘 살았다 하는 것. 지금 느끼는, 무료함 지루함 따분함 즐겁지 아니한 것 또한 그런 분위기. 과연 뭐가 있겠느냐 마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응애 응애 울면서 봐달라고 보채기라도 하는 듯이 지금에 이르러서 마치 아기와 같이 보채는 것과 같지 아니한가. 시간은 흘러가고 간다. 다른 것을 보든 다른 길을 찾든 다른 길을 선택해서 가든 잠시 주변을 살피든 시간은 가기 마련. 길을 나섰고 길을 간다. 되돌아 가고 있는 지금, 기분이 참 묘하다.

나아가는 것 또한 맞는데, 목표 목적 되돌아간다 라는 그 안도감이랄까. 귀환에 대한 뿌듯함이랄까. 징검다리는 그저 하나의 해프닝. 해나와 예티 또한 어쩌면 어쩌면, 일종의 사치. 생명의 무게는 물론 화려할 수 있게 꽁꽁 감싼 사치품에 비할바는 아닐 것이다. 다만, 나홀로 있는 나무, 덩그러니 놓여있는 의자, 잠시 쉴까 망설이다가, 잠시 그런 생각에 머물다가 해나가 엉덩이에 힘을 주어 멈춰선다. 작은 해프닝, 일상. 그리고 다시 떠나보낸 의자를 뒤로 하고 예티가 힘을 주고 주저앉는다. 세 번째였던가 두 번째였던 건가. 각기 시작을 했으니 아마도 세 번,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듯. 점점 똥이 물러지고 질어져서 주워들 때는 신중해야 한다. 여전히 길을 가고 있고 걷고 있다.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생각을 이어간다. 언젠가 만났던 그, 그리고 나는 언덕길로 오른다. 오늘은 해나와 예티 목줄을 잡은 시간이 많다. 나설 때 주저앉아서 내버려 두고 따라오라며 저만치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쯤까지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더라. 보통은 따라올 텐데, 횡단보도를 들어서서 다시 여기까진 따라오겠지 하는 생각을 할 때, 한번 가보자 되돌아갔다 그랬지. 그랬더니, 목줄이 물 흐르는 도랑을 덮은 철망 사이에 끼어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더라 이 말이야.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길 위에선 지금의 나, 이런 저런 상념에 생각에 빠져드는 나, 예티는 가는 길을 멈추고 뭔가 핧는 듯이 지체하더니 집어내 보니 지푸라기를 빼어낸다. 아마 따가웠겠지. 아이들은 본능에 가깝다. 걸어갈 때 확인하는 모습, 그림자에 멈칫하는 모습, 어두운 길에 들어설 때 잠시 멈추는 모습, 누군가가 내 눈엔 보이지 않지만 기척이 느껴질 때 잠시 멈춰서서 그쪽을 바라보는 모습, 목줄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는 길에 코를 킁킁 대기 바쁜 모습, 저기 시냇물에 떠 있는 오리들의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모습, 지렁이를 찾아냈고 차 소리에 멈추고, 오늘 나는 길 위해서 내 목소리에 힘을 찾았다. 들릴 듯 말듯 쫄리거나 부끄럽다라고 할, 정작 내가 신경 쓸 건 혼잣말 하는 내 모습에 불편함이나 이상타 하는 시선이 아니라 내가 그걸 왜 부끄러워 했고 이상타 여겼던가. 마치 그게 예의인 양 그렇게 여겼던 내 자신을 책망한다. 듣든 듣지 않든 바람에 스며 스쳐 지나가는 내 소리는 살아있다. 이 위에 서 있는 지금의 내 모습, 그리고 걷고 있고 한참 전에 달리기를 멈췄다. 오늘은 오른쪽 무릎에 아픔이 느껴졌다. 저번 주였던가 이번 주였던가 며칠을 왼쪽 허벅지에 당김 때문에 달릴 때마다 아픔 때문에 쩔뚝거리면서 뛰려고 노력했던 내 모습이 시간이 지나 다시 오른쪽 무릎에 통증이 느껴지는 지금, 어쩌면 차 소리가 시끄러워 상가 건물 뒤편으로 향하는 나를 곁눈질로 어찌할 지 몰라하는 해나, 때는 이때다 하고 수북히 쌓인 낙엽 사이사이 숨겨진 보물을 찾는 냥 코를 킁쿵대며 뭔가를 뽑아 먹는 예티. 길이 일(ㅡ)자로 나 있는 것만이 길은 아니고 길은 교차로, 바둑판 모양, 원반 모양, 길은 만들기 나름. 머물기를 바란다면 아무 곳에 남기 위해 그 위에서 상념을 이어갈테고 추억을 쌓을 것이며, 길에 나서면 새롭다 느끼는 어제의 길이 오늘과 다르다는 걸 체감하면서 다시 하나하나 챙기면서 나아가려고 노력하듯이, 정감이 물씬 풍기다가도 때론 낯선 그 모습에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이 인사를 건넸고, 그 모습에 다시 반발심이 일어 거리를 두고 내리막길의 계단으로 돌아서 길을 나섰던 오늘. 결국 다시 돌아오면서 그 길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자리에 있었고, 반갑게 다가가는 줄 알았던 예티는 가까이 가기 무섭게 짖어댄다. 놀란 그에게 난, 준비되어 있던 "안녕하세요.' 라고 말을 건네며 위로와 격려가 아닌 마치 그래야만 했던 공식처럼 인사를 건넨다. 살포시 다른 인사. 미안함을 담은 뒷얘기. 짖던 예티를 나무랬고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오늘은 예디가 길을 건널 때,

"문을 열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소리)

횡단보도를 건너할 때, 길 한 가운데에서 힘을 주고 앉길래 얼릉 번쩍 들어 길을 건넜고, 빠른 걸음으로 건너편으로 향했으며 내려 놓으니 힘을 줘서 나오던 똥이 들어간 마냥 예티의 엉덩이에 붙어 있었다.

"22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 소리)

떼어낼 때의 기분이란 찝찝, 더러움..... "좋단다."

See U.



출근길 운전하며 '길'에 대한 생각을 회고하듯 이어 말한다. https://youtu.be/2vjKlW0Lrsg

(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2.

이런 저런 상념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림자 진 길 위를 바라보고 난 어디에 있는 걸까?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뭘 바라고 있는 걸까? 무료하다 지루하다 따분하다 재미없다 하는 얘기들이 갖는 공통점은 뭘까? 이런저런 상념들이 계속 이어졌지. 그러다 문득 그림자가 진 길 위를 바라보니 다르더란 말이야. 우리가 흔히 얘기할 때 길은 뻗어 있고 나아가고 길이란 건 만들어지는 거지. 사람들이 오래도록 반복해서 다닌 오솔길, 옛날의 길이라는 건 보통 그렇지. 중장비를 동원해서 길을 닦고 콘크리트를 씌우는 개념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안에 필요한 가장 먼저 길을 내는 것처럼, 지금은 길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위를 다니면서 사람들이 차곡차곡 경험을 혹은 어떤 가교 역할을 소통의 창구로 여기고 누군가 만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길. 그 길의 의미가 내게 다가온, 길이 내게 말하길 사뭇 다르더란 말이지. 길은 가는 거, 나아가는 거, 방금 얘기했듯이 가교 역할, 소통, 누군가 누구와 잇는 것, 길의 의미에 대하여 그 자체를 들여다보기 보다는 그 길 위에서 선 내 모습 비친 그림자로 본 내 모습을 바라보니 뭐라고 할까? 길이라, 길 위에 머물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길을 단지 뛰어가는 혹은 걷는 어딘가를 갈 때에 거치게 되는 이런 어떤 과정으로 보았다면, 오늘 길은 길 위에 서서 길을 바라보니까 어처구니 없다고 할까, 한숨이 나왔다고 할까, 엉뚱하다고 할까. 길. 길은 그 흔적들을 남기고 있고 간직하고 있지.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차들, 수많은 동물들, 누군가의 사연을 간직한 체 떠나보내고 힌트를 주기도 하며, 묵묵히 묵묵부답으로도 있기도 하지.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지금 던져보면,그냥 이 말이 당신은 도를 아십니까?

길을 아십니까?

사뭇 당혹스럽게 다가온 길이란 의미에 대해서 길 위에 서 있는 지금 내 모습. 그 모습을 지긋이 다시 한번 바라보니 자존심이 좀 상했어. 뭘 그렇게 얽매였을까? 왜 안 된다고 했을까? 뭘 지키려고 하는 걸까? 왜 이렇게 틀에 박혀 있지? 원칙, 나름대로 유연하다 생각했던 어떤 것들이 난 뭘 부끄러워하고 뭘 두려워하는 걸까. 그래 맞아. 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했던 거 같아. 굳이, 그래서 녹음 어플을 켰을 때쯤에는 뭐 상관하랴 뭘 부끄러워하랴 사실은 누구도 나의 삶에 대해서 내가 길을 가는 중에 독백을 한다손 치더래도 "흠, 쟤 뭐야?"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용에 대해서 혹은 그 내용의 줄거리를 다 듣고 있더라도 "헐 호 흐 엥?" 할 수 있는 어떤 반응일 뿐이지. 가타부타 혹은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조용히 좀 해주시죠" 할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뭘 부끄러워하고 뭘 두려워했는지. 천칭에 이를 올렸을 때 각기 무게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달리 보이더라. 다르다. 길이라는 거, 나라는 거, 때마침 달리던 중 오른쪽 무릎이 통증을 호소했고 어떻게든 달려보려 했지만, 좀 더 뭐라고 할까 더 아파올 거 같아서 걷는 걸 택했고, 그 순간 어떻게든 이어지더란 말이야. 당연히 녹음 어플을 켜고 걷게 되는데 그림자가 앞으로 지고 해나와 예티의 그림자와 내 그림자가 얽혀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순간 그렇지 그랬어. 가물가물한 그 감정.

길 위에 서서 바라보니,

그러니까 아련한 감정이 되었네. 그때의 그 감정, 그 순간을 떠올리려 하는데 잘 되지 않고 세상에 지금 "좋아." 감정을 토로하고 마음을 내비친다. 다소의 장난과 반응을 보게 되지. "아니 여보 나한테 한숨 쉬지 마." (화장실에 들어설 때를 회고하며)

"헐," 속으로 그랬다. 지는 자주 그러면서. 누군가의 한숨이 누군가에게 넉다운 혹은 뭐라 할까 침울함. 가라앉게 되지. 사실은 아이구, 그러면 힘이 안 나. 맥아리가 빠지고 그러니까 한숨을 푹폭, 습관적으로 쉬는 건 뭔가가 벅차거나 뜻대로 되지 않거나 풀리지 않거나 혹은 그렇지, 뭔가 걸린 게 있는 거지. 근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 쉬는 한숨이 잔소리가 되겠고, 여러 선택지가 있어. 지금 작업장으로 향하는 길도 금사리라고 했던가? 그리 돌아가는 길이 4차선으로 굉장히 잘 뚫려 있대. 오늘 지금 가는 이 길은 대형차만 없다면 60km/h 정도는 기본적으로 가고 있어. 그러면 돌아가는 3킬로미터에 더한 거리를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어. 근데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듯이 지게차라도 앞에 있다면 굉장히 느림보처럼 걷겠지? 30km/h가 뭐야? 그리고 차량이 기본적으로 있기 때문에 물고 물리고 물린 길에서 앞지르기는 사실상 힘들고, 근데 뭐 돌아가는 3키로가 질러가는 3키로의 차이를 마찬가지로 본다면 시간으로 볼 땐, 사실은 밟고 밟으려고 할 거고 맞추려고 할 거 같애. 굳이 돌아가는 데 시간을 단축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단축되지 않았다 라는 결과를 받아들이기 싫으니까 밟을 거라고. 그럼 밟으면 밟을수록 그 부분에 있어서 그렇겠지? 느긋한 마음보다는 조급한 마음이 앞설 것이고.

"국사리? 응. 국사리네." (도로표시판을 지나쳐 가며)

치아 또한 문제가 많다. 하나를 신경치료 하니 다시 위에 신경치료를 하게 되고 오른쪽에 예전에 때웠던 금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가고, 그러니까 점점 이런 어떤 몸에 이상들, 소소히 신경 쓰는 것들, 그런 중에도 사실은 우리 테니스를 통해서 배우는 재미, 그리고 낯선 사람을 만나는 재미를 해보면 어떨까? 라는 권유에 망설이고 있는 건, 늦추고자 하는 마음일까?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하진 않다고 보는 걸까? 근데 나라는 범주에 함께하고 싶어 하는 서희의 마음을 얹는다면 "맞아, 맞아." 서희의 말처럼 "그래 한번 가보자. 알아볼까?" 선뜻 나서고 반가워하고 흥겨워하면 너무 좋았을걸. 몰아붙인다는 어떤 밀린 감정으로 이리 빼고 저리 빼는 모습이 가히 좋아 뵈이진 않을 듯하다. 아무튼 만두 열두 개는 좀 버겁네. 한 봉지가 열두 개라고 했고 양이 좀 버거운 거 같네. 8개 정도가 미련도 남고 배부르질 않은, 그렇다고 안 먹은 것도 아닌, 딱 좋은 개수가 8개 . 그래 이렇게 정해서 해보는 거지 뭐. 그리고 오늘 또한 뭔가 정한 어떤 약속들이 있고 그 약속들을 해가며 하면서 하나하나 그럼 뭘 더 바랄까. 뭐가 더 있길래. 허상에 매달린 흔히 얘기하는 꿈, 이상, 야망,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 비춰진, 운전대를 잡고 있는 지금 떠올린 생각, 혹은 바로 앞의 일들, 산책의 여운, 모든 게 즐길거리이면서 수용하고 받아들인 감정으로 바라보고, 앞차의 뒤를 따라가는 혹은 이야기에 빠져서 앞차와 상관없이 간격을 유지한 채 내 길을 가는, 이러쿵 저러쿵 그래서 말이다 길이란 건 "넌 길을 만들고 싶어?" 만들고자 하는 삶을 살고자 했었고, 나이가 들어 50이 되니 새로운 길을 만들래? 새로움! 새로움, 남들은 해봤어. 그중에 그래도 돈벌이가 되고 흥겨운 재미가 있는 돈만 쏟아붓고 마는 건 안 되겠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원하고 희망하고 그런 것들 늦었다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늦은 게 아닌 좀더 앞서 시작한 사람들의 시행착오를 대신에서 녹이면 단지 볼륨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아기자기함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진정 바라는 것이 어떤 이가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고 누리고 그 공간적 제공을 통해 "좋다. 정말 좋네." 라는 감동을 주기에 자연스러운, 그러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말이야. 나 또한 그런 거구나. 그러니 누구나 원하는 어떤 것들을 내 손을 빌어 해도 좋겠다. 테니스를 먼저 시작해서 발을 넓혀간다. 하나씩 해보자. 이미 드러났으니까 미루지 말구. 그래 안에 뭐가 있을지 어떻게 알아. 내가 기억하는 테니스는 벽을 치던, 동아리에서였나 어떤 동아리 모임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주로 다가갔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리송해. 그런데 그게 별반 다르지 않잖아 라는 어떤 느낌에 주로 그만두었던, 제 풀에 꺾이는 거지. 사실은 대쉬를 하지도 않았고 어떤 액션 없이 본인이 그냥 그래도 뭔가를 할 때 내 모습은 아마 열심히 했을 건데 땀이 나도록. 하지만 용기가 없었겠지. 내게 다가오길 기대했고, 어찌됐든 작업장에 도착했어. 자, '한 점 부끄럼 없도록' 이라는 말이 좋다, 좋은 말이야. 그렇게 살아보자고. 오늘도. See U.



오늘까지 늘린 반환점



다음날 새벽 5시, 예티는 문 앞에서 반기고 해나는 영록이 방 침대 위에서 꼬리를 흔들며 문을 열어 찾아주길 바랐다. 그렇게 나서면서 살펴본 증시 하락으로 일비일희한 감정을 풀어내며 걷는 발걸음에 힘을 더한다. 말하는 걸 부끄러워 하지 않으면서 또렷하게 녹음되도록 말한다. https://youtu.be/1cEnsOOJfWU


3. 일비일희

이젠 익숙한 거리.

뭐라고 할까? 보이는 건 다른데, 어제 왔던 조용하고 바람 한 점 없이 가로수 등불들이 비추는 하천변. 내 마음이 조금 더 여유가 있어서일까? 오늘 따라 해나가 잠깐 잠깐 멈추는 때 화가 난다. 가야 하는 걸 마치 숙명처럼, 까짓 산책을 하지 않아도 함께 나온 그 찰라의 느낌만으로도 지금처럼 함께 걷는 시냇물 소리가 졸졸졸 시원하게 들리는, 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내 뒤에 (예티의) 으르렁 소리가 자연스러운 이 거리에서, 감정이라 감정은 참으로 못쓸 것. 못 된 것. 무심코 들여다본 핸드폰 화면에서 꺾인 그래프를 보고 마음 한켠이 씁쓸해지는 감정. 이미 올랐는데도 꺽였으니 저때 팔았어야 되는데 하는 뒤늦은 후회처럼, 마치 내가 전지전능한 사람인 냥 감정이 드는 그것에 휘둘리고 있는 한낮 피조물. 나의 주제는 어쩌면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름의 자신을 알고 깨닫고 살아보는 거, 살아가는 거, 살아가면서 겪는 거, 온갖 감정들이 결국 내게 주어진 숙제라고 여기지는데 이놈의 감정은 휘두른단 말이지. 거기에 휘둘리는 나조차 지극히 당연하게 감정에 휘둘리고 휘감기고 보듬어 안고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 느끼는 이 스치는 바람에 아이들과 함께 가는 이 거리에서 기분 좋음이 살살 채워주고 있는 시원하고 우렁찬 시냇물 소리에 '한 점 부끄러움 없도록' 이라는 어제의 말처럼, 무언가 생각하고 깊이 있게 고뇌하고 사색에 잠기는 이 시간이 참으로 좋다.

"우이씨, 장난을 좀 많이 치네. 헤이, 이제 뛰어? 준비됐어? 해나, 이제 됐어?"

그렇게 멈추더니, 안아 달라는 건지, 일어나자마자 나와서 좀 쉬어야 된다는 건지, 온갖 잡생각이 난다. 고관절 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어디까지 생각이 이어지는지 참으로 참으로.

"자, 이제 징검다리. 뛰어."

내게 좋은 거, 내게 이로운 거 하자고 했잖아. 새로운 거, 슬픈 거, 찜찜한 거 에이씨 그냥 털어버려. 오늘은 금요일이고 강의하는 날, 더할나위 없이 좋은 공기, 어찌되었든 일어났고, 나왔고, 해나와 예티랑 함께 하고 있다. 이 정도만 해도 어디냐 이거야.

"그렇지? 예티, 그래?"

이름을 불렀을 때 마주 보면 기분이 참 좋지.

"해나, 그래? 어이. 예티, 어때? 너도 그래?"

좋아 좋아 좋아.

"뛸까? 어우, 진짜? 그래, 뛰자."

개울을 넘고 너머 엠브리지를 지나서 테라로사가 있는 쪽에 와 있다. 음악 분수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그런데 문득,

내가 지금 죽는다면,

잘 살았다 할 것이냐 후회할 것이냐 그러니까, 이 타이밍에 예티가 주저앉았다. 엉덩이 힘주고. 왜 날 봐? 하 또 설마 힘줘 힘 줘.

(독백을 멈추고 달렸다)


"이제 됐으니까, 다리 밑이고 하니까 이제 얘기하라고? 땡큐 예티."

자, 이를 달리 말하면, 아내가 보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부지런한 사람일까? 무료하고 따분하고 재미없는데 놀아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길까?

그렇다면 영록이는 아빠를 어떻게 볼까? 근사하다고 말할까? 닮고 싶다고 말할까? 그러면 영탁이는 아빠를 어떠하다고 말할까? 최고라고 엄지 척! 그렇다면 치형이는 아빠를 뭐라 말할까?

부모에게 향한 마음이 이 보다 못하네.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인정할 걸 인정해야 되겠지. 그래도 굳이 그걸 비율로 본다면 마음의 상단에 있겠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각자의 몫을 하고 일면 외로움에 대해 얼마나 다행스러워, 자식은 자식과 함께 나이를 들어간다. 당장에 소일거리들이 있고, 없다면 지금처럼 아마도 지금 나와 서희는 그런 고민에 빠진 거라고 봐야 되겠지.


돌아서 되돌아가는 길에



4.

"어때? 해나, 예티. 좋아?"

불현듯 죽음에 대해서 생각이 이어지네. 죽음이라. 죽는 순간에 아무 생각 없이 백지처럼 하얗게 다 되었다, 면이 없다 그럴까. 미련이 있을 게 무엇이냐, 좋구나 충분하다 그럴까. 어쩌면 아픔에 허덕이다가 정신을 잃듯이, 어쩌면 이런 말조차 남김없이 갑작스럽게, 어쩌면 이 말이 오늘의 이 말이 다시금 들춰질 때 슬픔 보다는 목소리를 들었다는데서 오는 한없는 반가움이 있기를 바라는 바람이, 이 간절함이 전해졌으면 울음 보다는 웃음을, 불쾌함 보다는 유쾌함을. 주고자 했고 전달하고자 하는 건 과거에 있지 않고 앞으로 있지 않다는 걸, 지금의 이 순간 걷는 이 순간 드는 감정. (현실이 아닌 현재에 답이 있음을 알기를 바란다.)

"어제 딱 요 시점이지? 그지? 그 청소하시는 분만 없네."

운동기구가 컹 컹 소리를 내고 어슬렁 마주 걸어오는 할머니, 저 아래는 조깅하는 젊은 세댁. 그리고 주저앉은 해나.

"헐? 헤이, 왜?"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이 말이다. 일상이라는 건 하나 하나의 터치다. 이어지는 것일 뿐. 주저앉은 해나를 기다리는 것 또한.

"뭘 그렇게 갸웃거려?"

당겨봐야 다시 주저앉을 것이고, 쉬는 건지, 안아 달라는 건지, 낙엽이 묻었거나 목줄이 낀 건 아닌데. 그 순간 지나가는 자전거. (그냥 기다린다.)

어제는 그런데 그런 생각도 났지. 드라마틱하다. 내 삶이 이 자체의 삶이 기록되어지고 있고, 기록된 이야기들이 어느새 사연이 되어 짜여진다면 하나의 인생이 되지 않을까? 누구나 겪었던, 그 나이에 겪었던 어떤 고뇌와 고민의 흔적들. 누구나 하고 누구나 간직하고 놓치기 쉽고, 아쉬워하는 그때 그 시절에 감정들. 내게 가장 자랑스러운 건 소중한 것, 잘하고 있다고 여기는 거, 다른 무엇과도 바꾸기 쉽지 않은거, 그건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라는 거. 이게 어떤 가치가 될지는 아마도 아마도. 나중에 누군가의 삶을 연구하듯이, 그때 그의 감정을 꽤 진솔하게 이렇게 담아놓고 감정을 풀어헤쳐 놓았다 라는 사실만으로도 짜 맞추고 편집한 한 시간 두 시간 짜리 영화와 편집된 다큐멘터리처럼 어쩌면 그렇게 각색이 되고, 편집이 될망정 그 원천인 이 기록들은 그 자체로서의 빚을 발하게 되겠지.

"예티, 그래? 안 그래? 해나, 어때?"

뭐, 뭐라고 헐, 그러네. 어쩌면 쌩쇼지 쌩쇼. 야 그래도 그렇게 얘기하면 되니?

"아이고, 낙엽이 너무 많이 묻었어?"

낙엽이 떨어져 있는 길을 걸어가면서 참으로 해나와 예티는 자꾸 낙엽이 들러붙으면 무시할만하게 못 되겠지만 이렇게 엉덩이에 붙어있는 낙엽은 참 재밌지? 재밌지 않아? 아이고, 그래 그래 알았어. 지금은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기다리면서 벤치에 앉아있다. See U.



현관문 앞에서 일어서서 문을 끍는 걸 찍으려고 했는데 다시 하니 조용하게 왜 그러냐구 묻는 듯하다.
발바닥을 닦는 옆에서 기다리는 예티
발바닥을 다 닦고 나오길 기다리는 해나




다시 다음날 새벽 6시반,
돌아가는 길. 오늘은 토요일. 목욕하는 날.

(놓을까? 말까?) 망설임을 안 순간, 놓았다.


내 나이 90. 아련하게 비추어진 이 길, 난 이 아이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한참 이슬이 맺인 잔디에서 지들끼리 뒹굴며 뛰놀던 아이들이 어느 사이에 묵묵히 계속 걸었던 내 곁으로 와서 그 흔적을 보여주니 미소가 절로 나온다. 성호.




출발 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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