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양/세상보기

by 큰바위얼굴. 2023. 9. 24.

"존재란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다.



옷을 만들고, 옷을 지어 입는다는 것.

세계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그로써 세계와 나를 구별한다는 것. 그것은 비로소 ‘나’를 세계로부터 온전히 동떨어진 ‘하나’로 인식한다는 뜻이었다."

"‘옷’이 그처럼 단순한 개념만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옷의 출현과 동시에 옷을 입는다는 것이 단순히 ‘몸을 보호한다’라는 의미 이상의 행위라는 것을 은연중 깨달았던 것이다."

"모든 ‘존재’는 옷과 함께 발생했다.



물론 이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옷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생명이나 영혼은 존재했다. 애초에 그들이 옷을 만들지 않았다면 옷은 발명될 수조차 없었으니까. 그러나 여기에서 ‘존재’란 ‘생명’이나 ‘영혼’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때밀이 장갑을 끼고 있는 자는 때밀이가 되고, 거지꼴을 하고 있는 자는 거지가 된다. 무슨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영혼은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는것. 그다지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단순하다고 해야 할까."

"‘옷’이라는 것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세계는 변했다.

존재는 하나의 온전한 ‘나’가 되었고, 누군가를 믿거나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와 거의 동시에 존재는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증오하는 법을 배웠으며, 심지어는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게 되었다.

모두 ‘옷’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모두가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는 대신, 존재로서의 ‘나’가 사라지는 세계가 옳은 것일까?

아니면 각자 다른 세계관을 가지는 대신, 존재들이 서로를 죽이며 살아가는 세계가 옳은 것일까?



‘나’의 소실과 ‘다양성’의 소실.

지난한 양자택일의 문제였다."





"그대의 말이 맞다. 고작 한 벌의 옷이 어떻게 존재를 결정할 수 있겠는가?"

- 멸망 이후의 세계 118화 중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