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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나의 이야기

제련하다

by 아리빛 하나 2026. 3. 27.

 



산속 중턱 보련사까지 가는 길. 처음엔 45분 걸리던 길이 익숙해지니 30분이 됐다. 망설임이 없어진 탓일까.

신입 직원과 대화를 나눴다. 퇴사를 앞둔 마음, 조직을 바라보는 시선,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방향성. 주로 방향에 대한 얘기를 했다. 안 해도 된다라는 걸, 모든 경우의 수에 적용하기란 쉽지 않은 길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가만히 있어도 된다. 그런데 이게 어마어마한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 자체가. 한계에 달할 만큼의 정신력이 있지 않고서는 쉽지 않다. 가만히 있는다는 건, 몸과 마음을 두고 본다는 것. 관조한다. 나를 제삼자가 바라보듯, 거울에 비치듯. 그저 가만히 놓아버린다.

어머니의 건강, 동생들의 일, 상의 없이 이루어진 것들. 야속하다. 서운하다. 안쓰럽다. 안타깝다. 모질지 못하다. 기반을 잡으려 무척 노력했는데, 각자의 몫이 어머니에게 향한 건 다행이다.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차분하다. 두렵지 않은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말했다. 여보,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 해. 먼저 나서서 다 주려고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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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살아라는 말. 재미를 쫓으라는 게 아니다. 일상에 감사함. 재밌게 여기는 마음.

바란다는 말보다 그린다는 표현이 더 예쁠 것 같다. 바란다는 왠지 의존적이다. 그린다. 앞으로 그린다.

내가 바라는 건 도도히 흐르는 강의 모습이라기보다, 가만히 있는 듯한 바다의 웅심. 호수의 광활함.

길을 벗어났을 때의 고난, 모험, 새로운 길. 그러나 뻔할 것 같지만 뻔하지 않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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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이 아프다. 터벅터벅 걸었나 보다. 몸의 통증이 나를 찾아온다. 육체적 한계, 죽음에 대한 수용,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거울이 없어도 된다. 충분히 밖을 직접 보고 느끼는 것. 멀리 멀리.

즐기고 싶고, 느끼고 싶고, 알고 싶고, 함께하고 싶다. 이 넷 중 하나를 고르기보다, 충분히 맛본 다음에 고르면 안 될까.

나뭇가지를 쳤다. 장갑 끼고 큰 가위로 싹둑싹둑. 가지치기를 해줬다. 풍성한 새 생동감을 위해. 가지에서 피는 꽃이 가장 자리에서 피는 꽃보다 좋다. 제련한다. 담금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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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주의 끝을 알 필요가 있을까. 이어짐. 경험이 쌓이고 쌓여 이어지길 바란다. 이미 충분히 흐르고 있다.

한 발 한 발. 오늘만 같아라. 무릎에 힘이 빠지고 거동이 불편해지는 그때조차, 맑고 곱고 짙은 눈빛으로. 하얗게 센 머리에 자글자글한 주름. 삶의 고난이 부드럽게 살짝 피어났다.

갈고 닦은 시간에 누적된 힘. 영혼의 크기가 우주와 맞닿는 것. 휘몰아치는 격동성이 잠잠하게 침잠한 깊은 무거움. 육중한 두터움.

2026년 3월 27일, 마을에서 보련사까지 다녀온 길에서. 김성호.


* 원문(음성)  https://youtu.be/HQXQl8Keof8?si=qz9oHAz-4jwBpSX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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