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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나의 이야기

즐기고 싶고, 느끼고 싶고, 알고 싶고, 함께하고 싶다.

by 아리빛 하나 2026. 3. 27.



보련사 길을 내려와 마당에 서서, 큰 가위로 묵은 나뭇가지를 싹둑싹둑 쳐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봄이 오면 꽃들은 제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앞다투어 피어납니다. 매화가 지기도 전에 목련이 봉오리를 터뜨리고, 그 아래선 이름 모를 풀꽃들이 고개를 내밉니다. 자연은 어느 것 하나만 골라 피는 법이 없는데, 유독 사람만은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 자꾸만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받는 기분이 듭니다.

"즐겁게 살래, 아니면 깊게 느낄래? 그것도 아니면 똑똑하게 알거나 누군가와 뜨겁게 함께할래?"

세상은 마치 이 네 가지가 서로 다른 주머니에 든 구슬인 양, 하나를 집으면 나머지는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재미를 쫓으면 깊이가 없을 것 같고, 무언가를 깊이 알려고 하면 혼자만의 고립에 빠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터벅터벅 산길을 걸으며 무릎에 전해지는 묵직한 통증을 느껴보니,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한 그릇에 담긴 국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릎이 아픈 건 내가 열심히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 통증 덕분에 산길의 경사가 얼마나 가파른지 알게 되며, 아픈 다리를 이끌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마주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는 건 함께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고단한 과정 끝에 맛보는 찬물 한 잔의 달콤함, 그것이 바로 즐거움이겠지요.

신입 직원에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조언하면서도, 정작 나는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뷔페 식당에 가서 첫 접시를 들기도 전에 배가 부를까 봐 메뉴를 고민하는 여행객처럼 말입니다.

그냥 다 맛보고 싶습니다. 즐거움의 달콤함도, 슬픔의 짠맛도, 고독의 쌉쌀함도, 그리고 함께함의 구수한 맛도요. 인생이라는 이 커다란 식탁에 차려진 것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꼭꼭 씹어서 음미해본 다음에 고르면 안 될까요. 아니, 어쩌면 다 맛보고 난 뒤에는 굳이 하나를 고를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모든 맛이 섞여 지금의 '나'라는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냈을 테니까요.

가지를 쳐낸 나무가 새봄에 더 짙은 꽃을 피우듯, 저도 오늘 이 질문 하나를 마음에 품고 내일을 기다려보려 합니다. 억지로 고르지 않아도, 시간이라는 계절이 지나면 내 영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깔의 꽃이 자연스럽게 피어날 것을 믿으면서요.

조급해하지 않으려 합니다. 충분히 맛보고, 충분히 겪어본 뒤에, 그때 가서 웃으며 골라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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