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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가족애의 바탕

'남김' 이후를 찾아나선다.

by 큰바위얼굴. 2022. 6. 10.

죽음을 두려워 하게 되었다. (어느 새 그런 나이에 도달했나보다. 죽음에 직면하거나 죽음에 가까워진 가족과 지인들을 보메 생각에 잠길 때가 늘어났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마음에서 사라짐이란 말로 죽음이란 단어를 돌려 말하면서 그 안타까움과 서글픔을 남기고 싶었나 보다.)

 

어지러움이 몰려와 세상이 온통 흔들거리고 눈 앞이 깜깜해졌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나 산책길에 나서고 뛰려고 노력한다. 싫다 싫어. 그 두려움, 그 불안감. 세상이 멀어지는 느낌, 동떨어진다. 느낌이 멀어진다. 몸서리친다. 두려움에 살갛이 일지도 않는다. 둔중하고 먼 감각은 다시 몰아쳐와 이대로, 정말 이대로 좋아? 괜찮아? 라고 묻는다. 찰라, 스쳐지나가는 추억과 기억들. 아직은 아니됩니다 라며 간절히 기도한다. 바라고바란다. 아직은 아니되는 이유를 찾는다. 서서히 멀어졌던 감각을 되돌리려고 무척이나 애쓴다. 이율배반적이게도 멀어진 감각과 함께 포기하게 되는 마음이 동반되니 간절함 못지않게 반발심 또한 들쑥날쑥, 어지러움에 모두 스러진다. 그리고 샤워 떨어지는 물을 느끼려고 집중한다. 고개를 확 확 휘젖는다. 그리고 그 경험이 지난, 지난, 거의 매일처럼 그 감각과 그 몸서리를 잊으려고 다시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의미'를 찾는다.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다. 왜 살아야 하는가? 태어났으니까. 살아볼만하다 라는 이유를 찾는다. 어쩌면 내게 이런 경험이 온 것 또한 어떤 인과관계에 얽혔든지 그런 이유든 아니든 살아가는 것이 낫다 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어색함과 받아들임이 반복된다. 배고품에 잊다가도 모임에 귀 기울이다보니 잊히다가도 넘어졌다는 소식에 다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불안감과 함께 떠오른다.)

 

두려웠다. 넘어질 것만 같아 서둘러 샤워실로 향한다. 물이 필요해 라고 소리죽여 외치면서 서둘러 발을 옮겼다.

물이 온 몸을 적셔 내리는 대도 여전하다. 느끼지 못한다. 느낌이 멀다. 뭐지? 해석한다. 끊임없이 찾는다.

눈이 뻘개지고 눈물인지 물인지 섞여든다. “, 여보? 뭐해?”

(두려움에 직면했을 때 난 곧장 멀어진 감각을 되돌리려고 샤워실로 향한다.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옮긴다. 어지럽다. 티가 낫던 것일까? 아아, 다른 걸 더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다. 얼릉 되돌려야 해 하면서 샤워 물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때에 맞춰 찰싹 내리친다. 느껴지지 않는다.)

 

깨어난다. 서둘러, 응급실로 향한다. (응급실은 일상, 현세의 세상으로 다가온다. 노력의 일환이랄까? 치료라는 행위가 고친다는 말이기 때문일까? 개선하고 나아가는 것이 삶의 모습이기 때문일까? 집과 샤워실에 느꼈던 그 두려움은 응급실에 도착한 순간부터 나아감에 대해 직면하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다. 정말 이상하다. 요상타. 단지 장소만 바뀌었을 뿐인데 느낌이 되돌아 오는 듯하다.)

 

그리고, 일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마주하니 죽음을 사라짐으로 보아 어찌할지 방향을 정한다.

사라짐에 강한 애착을 느낀다면서 남김이란 닉네임을 붙였다. (기록으로 남긴다. 내 심정을, 내 마음을, 내 생각을, 그리고 내가 바라본 세상의 면면과 그 안에 벌어진 일들과 감정들을 담아내려고 한다. 지금이 아니면 남길 수 없어 하면서 산책하고 녹음하며 기록한다. 다시 듣고 받아적으면서 조금만 소리를 또렷이 발음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지금 난 주변의 소음을 차단코자 귀에 이어폰을 두른채 팝송을 듣고 있다. 두려움과 불안감조차 이제 기록으로 남기는 경지에 달했다. 나무에 달린 나뭇잎이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이 하나의 나무에서 시작했듯이 그 모양이 달라진 들, 색이 변한 들 그 본질은 변화가 없듯이, 삶을 바라보메 자꾸 돈으로 보는, 돈을 벌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한다. 이치를 삶을 그 자체로 마주하고자 노력한다. 그렇게 대한다. 그래도 돈을 필요해. 뭐든 하려면 돈은 풍족할 수록 좋아 하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다. 더구나, 해나와 예티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방문하는 날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이제 극복했나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반가움과 인사라는 키워드가 새롭게 다가온다.

일상 중에 마주한 사람들, 동식물들, 광경에게 기꺼이 인사하고 싶어진다. 안녕하세요?

열심히 하시네요. 힘내세요. 라고 스스럼없이 인사하고 싶어진다. (헤어짐, 이별, 죽음, 두려움, 불안감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생각에서 벗어나는 거야. 그렇지. 생각지 않아도 좋아. 가끔 떠올려지기 때문에 굳이 찾지 않아도 좋아. 그 대신, 만남, 마주함, 탄생, 즐거움, 충만감에 휩싸여 있어도 좋아. 다만, 음울한 것은 빠지기 쉽고 환희는 찾아야 하는 것인 듯하니 참으로 노력이란 요상하게도 노력해서 얻으라고 하는 듯해. 그래서 힘들고 힘들다보면 쉽게 빠지는 건 기쁨 보다는 슬픔에 가깝지. 숙명처럼 내려놓는 것과 빠져드는 것, 포기하는 것에 친숙한 듯 해. 그러니까 잘 붙잡고 정신 똑띠 차리고 정진해야해. 한 순간에 베어져 튀어오른 머리처럼 순식간에 끝장날 인생으로 끝내지 않으려면, 마음 못지않게 몸 또한 그리고 내 주변까지 건강하게 해야 해. 난 주로 주변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 안에서 생각을 하며 그로부터 치열하게 대하거나 반하거나 이겨내려 하는 듯 하기 때문이지. 어쩔 수 없이 우린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니까 벌어지는 수많은 일련의 일들이 자연스럽게 얽히고 섥히는 거지. 그게 삶이지 뭐겠어? 안 그래?)

 

그저 그런 스침이 아니라 그의 삶을 축약한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하다.

자기 안에 갖히게 만든 이어폰을 빼내어 표정없는 얼굴에 미소를 깃들게 하고 싶다.

 

그저 그런 스쳐가는 인생이 아니라 스스럼없이 인사하고 미소짓는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

반가움에 인사한다면서 안녕이란 닉네임을 붙일까?

 

그저 그런 스쳐가는 면면에 스스럼없이 인사한다.

미소. (그래서 찾았나 보다. 마주한 인연을 쉬이 스쳐지나가게 두기 아쉬웠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문장에 표현을 덧대어 풍성하게 만들고 싶은가 보다. 아쉬움에 안타까움에 전함에 소홀하고 싶지 않아 하는가 보다. 지치고 지쳐 다시 이 글을 보메 그래 수고했어, 참으로 장하다 하는 만족감과 흐뭇함에 둘러보고 덧대고 싶은가 보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죽어가는 사람들과 만났을 때 하는 말에 대한,

비록 시한부라고 판정받았지만,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외로움의 반대말은 뭘까?

 

외로움(loneliness) 사전적 정의는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이란다.

외로움이란 단어는 반댓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도 한다.

 

즐거움.

 

인사.

그저 그런 스쳐가는 면면을 거부한다.

 

기억.

그저 그런 스쳐가는 면면에 스스럼없이 인사한다.

 

인연.

맺음.

스토리.

엮기.

 

스쳐감에 스스럼없이 대한다. 엮는다. 만든다. 맺는다. 연결한다. 인사한다. (사라짐에 강한 애착을 느낀다. 남김. 처럼 임펙트 있는 넥스트를 찾고 싶다. 찾으려고 했고 오늘 첫 글에 덧대어 괄호 안에 표현하고 있다. 덧대고 덧대어 그 마음에 간절함을 담는다. 하나로 함축하려는 시도, 어쩌면 마주하면서 흐뭇한 감정에 울림에 자극을 받으면서 좋아하는 감정에 자주 빠지고 싶은가 보다 한다. 사라짐에 강한 애착을 느낀다 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제 보내줄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 사라짐에 강한 애착을 느낀다는 애프터라이프에서 토니의 역할이 컸다. 고즈넉하다. 오늘 산책길에서 와닿은 말이다. 감상에 젖는다. 액션은 약하다. 받아들이는 숙명처럼 여겨져서 틈이 벌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선택할 수 없다. 가능한 행위를 일으키고 그 행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지향하는, 굳이 부정할 필요는 그걸 선택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멀리하자. 외로움을 담되, 그 단어를 쓰지는 말자. 떠오르니까. 간절함을 담자. 골프채를 휘두를 때, 잘 맞지 않아 미소짓는 그 때를 떠올려보자. 실수와 실패가 웃음을 짓게 만든다. 으라차찻. 잔잔한 여운을 주고 싶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아요. 앞 문장에 더 마음이 간다. 완벽, 완성, 성공 이란 단어 보다는 실수, 실패, 뒤처짐, 느림, 완만함 이란 단어로 반전을 꾀하고 싶다. 상대적인 말인 뒤처짐이나 실패란 단어 보다는 실수나 탓이 아닌, 느리지만 완만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하는 그 단어, 혹은 용어. 슬로우, 느림, 미학, 안녕하신가요? 이 말 보다 우선할 인사가 있을까? 안녕하신지요? 안녕? 안녕하세요? 경어 못지않게 평어의 잔잔함이 좋구나. 안녕하세요? 닉네임에 맞춰도 좋겠다. 남김처럼. 사람짐에 강한 애착을 느낀데서 태어난 남김처럼.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굿모닝 베트남처럼, 어제는 별일 없었나요? 잠깐 찾아보자. 그의 멘트가 궁금해졌다. 난 지금 살아있다. 살아남으셨나요? 살아있나요? 사세요? 살아요? 재미와 즐거움 또한 괴로움과 슬픔까지도 살아가는 덕목이지요. 사세요? 오늘 하루 밥 먹기 힘들고 지치고 알아주는 이 없어도 사세요? 그럴 만한 이유를 찾지 말아요. 그저 밥 1끼를 위해 살아요. 더한 걸 바라지 말아도 좋아요. 그냥 살아요. 살아가는 이, 안녕하십니까? 살아남기 위하여. 우린 그렇게나 노력하나 봅니다. 때론 비우고 때론 채우고. 왠지 찾은 듯, 찾지 못한 듯 외면합니다. 메시지를 전합시다. 

 

살아남기 위하여,

살아가기 위하여,

 

반성과 배움, 경험과 공감, 도전과 수용을.

 

지치고 힘든, 종이도 함께 들어요. 종이를 들까요? 가벼움, 종이는 채울 여백이 있으니까, 날아가기 쉬우니까. 종이에 한 손을 한 손가락을 보태는 행위가 모여 그 종이가 수표로 변하고 때론 희망으로 변하는 그 날을 바라봅시다. 종이를 들어요. 우산을 드는 행위에 안전과 방어, 우리라는 공동체를 떠올리듯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라는 걸 형상화 해 봅니다.

 

백지장을 맞듭시다.

종이는 사라질 것. 석유가 사라진 때 전기 자체로 에너지를 얻는 시대를 앞두고, 매체에 직접 전하는, 은행이 아닌 앱이 기능을 하는, 누가하든 그 기능만 있으면 충분한, 그렇기 때문에 종이는 감성을 자극할테고 그만큼 사라짐에 애착을 느낄, 지향이라기 보다는 보호하고 보존하려고 하는 감성에 어울리는, 왜 흰종이일까? 백지장도 에서 백지는 흰 종이. 흰 종이라고 할까? 하얀 종이라고 할까? 받침이 없는 것이 표현에선 나을 텐데 그 의미 전달까지 부족하진 않을까?

 

흰 종이

하얀 종이.

 

노랑 우산

녹색 우산처럼

 

흰 종이

휜 종이라고 할 수도

 

하얀 종이

하양 종이

종이인데 빈, 공, 색이 아닌 없다 비었다 라는 형상에 가까운 표현, 없다면 하얀으로 해야 하겠지만,

 

빈 종이를 함께 들어요.

빈 종이를 함께 채워요.

 

왜 들어야 할까? 왜 채워야 할까?

빈 종이에 무얼 해야 할까?

빈 종이는 인생, 지금, 과거, 흔적이 모두 없어진, 바로 지금, 당장 뭔가 할 수 있는 토대와 그 바탕.

빈 종이에 함께 채워야 할까?

빈 종이를 함께 채워야 할까?

 

빈 종이.

비었다. 꼭 채워야 할까?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지향을 담아내야 하는가의 갈림길에 섰다.

행위를 일으키려면 지향을 담아내야 할텐데, 빈 종이 자체 만으로는 모두 담을 수 없다.

 

빈 종이에 꼭 반드시 함께 채워야 할까?

홀로, 혼자, 극복하는, 온전히 이해해줄 사람은 없는, 외로운, 그래서 슬기롭고 대처가능한, 자기판단에 의한 경험이 흩뿌려진 세상에, 탈출한 지구에서 살아남기에도 적합한, 이기적이어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도구나 기능은 옵션, 갖춘 필수품 혹은 생활용품으로 쓰이는 그 때, 나는 빈 종이로 무얼 할 수 있을까?

 

빈 종이.

하지 않아도 좋은, 해야 하는? 설마. 마음이 편해지는, 비었기 때문에 편안한, 해도 좋은, 하지 않아도 좋은,

 

빈 종이.

써넣어 할까? 반드시.

접을까? 설마. 에이, 그래도. 비었다 라는 의미에는 접는다라는 행위 보다는 채운다 거나 쓴다 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채운다.

채울까?

채울래요?

권유로 할까? 채울지 말지. 빈 종이를 함께 채울래요? 근데, 함께 라는 우리 라는 공동체는 나 라는 독립개체를 보메 끈끈한 연대의 지향을 담아내면 의존과 조직의 폐해도 함께 오기 마련이니 제외하면 어떨까? 온전히 판단은 각자 몫으로. 연대 또한 연합 또한 리더 또한 터전 또한 각자가 정하고 정한 이들과 어울리는 삶을 지향하자.

 

채울래요?

빈 종이를 채울래요?

빈 종이에 채울래요? 는 이상하잖아.

 

권유일 뿐,

강요가 아닌,

선택을 나타내는,

개인 몫에 기대하는,

변화된 세상을 살아가는, 살아남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볼 수 있는 그 본질에 가까운, 뭉침 이전에 홀로서는 그 토대를 이루는 플랫폼 적인 사고방식.

 

빈 종이.

채울까?

채운다.

 

빈 종이, 채울까? 채운다. 함께, 혼자. 지금 어디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지?

그런데 종이여야 할까? 무기도 하니고. 살아남기에 적합한 도구로 종이가 적합한가? 채울 무엇, 빈 공간, 빈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사라지는 도구라서 선택했을 뿐.

 

빈.

 

채움.

 

결국 지향은 채움이네.

그리고 문장은 빈이 들어간다. 

 

비우고 채워가시라. 빈의자.

 

채워야 할까? 빈 상태로 낫다 라고 말하는 건 안되는 걸까? 안된다기 보다 지향으로 삼기에 부족한가?

욕심을 자극한다. 채우라고 종용한다.

비우라고 자극한다. 그리고 채우라고도 한다.

 

비울 건 뭐고, 채울 건 뭘까를 정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비우고 채워가시라. 빈의자, 빈공간, 빈장소, 빈집, 빈차, 빈숟가락, 빈젓가락, 빈종이, 빈말, 빈문장, 빈화장실, 그 형상에 머문다 라는 의미, 잠시 앉는다, 쉰다. 함께 한다. 무대에 선다. 빈무대. 빈터전, 빈터, 무대에 서야 할까? 무대에 서 있는 것일까? 비우고 채워가시라. 빈무대. 빈의자. 빈극장, 빈나라, 빈섬, 내가 머물, 한정된 공간, 장소, 시간, 책, 의자, 도움받는, 도움닫기, 카페에 가는 이유, 의자, 커피향은 이끌림, 소파, 소파는 의자에 포함돼. 빈책상, 앉는다. 쉰다. 한다. 신발, 옷, 상자, 옷장, 걸이, 비우고 채워가시라. 빈의자.

 

의자 만한 게 없네.

비우고 채워가시라. 빈의자.

다기, 차, 주전자, 컵, 내가 아닌 도구, 의자는 내가 앉을, 컵은 내가 사용할 몫.

 

비우고 채워야 할까? 뭘? 꼭, 그래야 하는 듯이 강요나 설득이 들어있다.

비우고 채우는 운동을 해온 듯 하다. 종교는. 이제까지. 부던히도. 비우고 채우도록 노력해 왔다. 그런거다.

 

노력을 쏟는다면, 어찌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있을까?

사람만큼 쏟아부을 때 상처입을 대상이 없다.

신앙 자체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향을 같이 하는 사람들, 일상 보다도 이용하기 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가까운.

다시 살기, 다시 하기.

 

다시 하기.

다시.

 

다시.

 

지금, 살아볼 만하다. 살아남기 위하여. 살고자 하는 의욕을 동기를 부여하자. 보탬을 힘을 주는 말.

산다. 한다. 한다.

 

다시.

끝 말은 한다.

 

사라짐에 강한 애착을 느낀다. 남김.

사라짐에 강한 애착을 느낀다. 다시.

 

 

 

'다시'의 의미 여러가지 :

 

이전에 한 행동을 되풀이함을 나타내는 말. 이 때 그 행동은 반드시 똑같은 동작의 반복만을 뜻하지는 않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같은 의미이거나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것이거나 미진한 것을 보충하려는 것이거나 무엇을 더 확인하려는 것을 가리킴

하다가 중단된 행동을 이어서 계속하거나 이전과 달라졌던 상태가 예전의 상태대로 됨을 나타내는 말.

  1.  
    • 다시 보아도 틀린 곳을 못 찾겠어.
  2.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
  3.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 작품을 다시 만들다
  4.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하여.
    • 한참을 쉬다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5. 다음에. (≒또)
    • 다시 그런 소릴 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
  6. 이전 상태로 또.
    • 다시 건강이 좋아져야지.

 

이미 죽어보았다. 이미 죽었었다. 이미 했다. 하찮게 때론 변변찮게. 훌륭한 과 못지않은,

죽기 전에 라는 한계 보다는, 죽어서도 하는, 한계 없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선택과 그 경험이 이어지기를, 살아살아, 그렇게 남겨진 남은 자식들, 후손들, 일조한다. 함께 나아간다. 노력한다. 지향을 담기에는 다시 라는 말은 부족하다.

 

다음으로 여지를 둔다.

 

 

또 보자.

 

See you again

See you later

See you soon

 

어떤 의미에 가깝나? 다시 보는 것? 나중에 보는 것? 곧 보는 것?

굿모닝 베트남에 얽힌 건 다시 살아서 보자는 말이니 죽지 말고 다시 보자는 말에 가까우니 다시에 가까운 again을 선택한다.

 

또 보자


See you again. (살아남아서) 

 

 

... 그리고 다음날,

 

지금 현재를 사랑하고 즐깁시다. 다가올 다음 인연을 기대하며

지금 현재를 사랑하고 표현합시다. 다가올 다음 인연을 기대하며

 

항상 죽음이 옆에 있기 때문에 즐거운 순간을 놓치는 법이 없죠.

 

즐거운 상상을 실행합시다. 

 

현재를 사랑하고 상상하고 실행합시다. 

죽음 보다 현재를 (사랑하고 상상하며 실행합시다)

 

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지?

 

지금 이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짐에 강한 애착을 느낀다. 남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보자에 어울리는 문구를 찾고 있는데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환상의 화원'을 완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에 합당한 행동적인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가슴이 뛰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거나 누리고, 상상하고, 실행하는 그 모든 것을 함축하는 말.

설레인다.

 

또 봐요 일까?

또 보자 일까?

 

또 보자로 한다면,

또 볼 때까지 우린, 아니 난 어떤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이 좋을까?

시간을 보낼까? 무료하게? 혹은, 즐겁게. 재밌게. 뜻깊게. 사랑하며, 관심주며.

그 토대가 되는 감정은 무얼까? 사라짐에 강한 애착을 느낀 것처럼, 또 보자에 따른 감정에 어울리는 말은 무엇일까?

 

설레임에 지금 이 순간 함께 하고 싶다.

또 보자.

 

또 보자라는 말을 See you again으로 해석하면, 다가올 다음에 보자. 다시 보자. 또 보자.

 

씨유

See you, again.

 

지금 이 순간

 

여행을 하듯, 책이 펼치는 세상을 그리면서 빠져든다. 듣기도 하며 한 시도 놓고 싶어하지 않는다. 귀로 눈으로 듣고 보는 시간이 즐겁다. 피곤하기도 하지만, 기대감이 더 크다. 왜 이렇게 애착을 놓치 못해 안달일까?

 

벗어나자는, 벗어나려는 몸부림처럼

굳이 그래야만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깊은 생각에 꼬리를 무는 문장찾기에 축 처짐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다.

한 켠에는 걱정이, 한 켠에는 수용이, 그렇게나 걱정과 받아들임 사이에서 방치하고 때아닌 집중을 할 때가 생긴다.

자고 일어나 가글링을 하고 씻고 먹고 나서서 산책을 한다. 

그리고, 사색에 잠기거나 책에 몰입하거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다가 이를 기록으로 남긴다.

다시 유투브를 보거나 책을 보다가 먹고 마신 후, 잠을 청하메 이야기를 청해 듣는다.

듣고 보고 말하고 산책하고 기록하는 일련의 반복을 한다.

 

다 안다는 듯이 큰 욕심은 없다. 다만,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아쉬울 뿐, 다정함이 함께 하지 못함이 무거워질 뿐 견디지 못할 건 없다. 기록하는 일에 대하여 소설을, 혹은 수필을 생각해 보았다. 조금 다른 방식의 글쓰기나 표현, 주고자 하는 바에 대해 생각도 해 보았다. 이미 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그걸 사업화 하는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았다.

 

녹음, 영상, 지난 글, 바람, 소망, 그리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내어 추억으로 남기는 일.

수없이 쌓여만 가는 기록물을 그냥 보내고 보관하고 있으면 언젠가 쓰일테지 하지만, 이는 쌓일수록 무거운 짐이 되기 마련이다. 들추어 내어 다시 볼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 큰 과제를 앞둔 것처럼 지난 일을 정리하고 멋지게 꾸미는 작업은 결코 쉽게 하지 못할 일이다. 우린 집에 인테리어 라는 이름으로 꾸미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정작 자신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추억은 꾸미거나 기록하는 일에 소홀하다. 그저 찍으면 다인 줄 안다. 찍지 않거나 쓰지 않는 건 어렸을 때 다반사다. 어릴 때부터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면서 SNS에 올려 공유하고 그런 일련의 자연스러움이 필요하다. 숙제하는 양 습관을 들일 일이 아니라 정말 소중하다 라는 인식으로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경험을 하는 것 못지 않게 쌓은 경험을 어떻게 기록하고 알리는가가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정말 우리 주변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면 얼마나 산다고? 살아 무엇하게? 그냥 이대로 사는 거지? 라는 살아가는데 바쁘다는 듯이 청소나 집안정리처럼 하질 않는다. 기록은 뒷정리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임을 안다면 이렇게나 소홀할까? 하루를 시작할 때 우린 의례히 눈을 뜨고나서 본능적으로 일어나 아무 생각없이 씻거나 먹거나 마신 후, 정해진 곳으로 간다. 하루를 마치고 마칠 때 잠들기 싫어서 인지 뭔지는 몰라도 힘들어 지쳐 눈을 감기 일쑤이며 하다 지쳐 잠드는 것이 일상이 된지 오래다. 책을 보든 영상을 보든 모임을 했든 우린 그렇게 힘들게 지쳐 잠에 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다가도 쉬이 바뀌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봐도 청소가 힘든 일인가? 늘어놓지 않거나 들이지 않으면 정리정돈이 그렇게나 힘들게 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린 가끔 아니 종종 필요하다고 들여놓은 물건들로 인해 쌓이는 먼지만큼이나 켜켜히 쌓이기만 할 뿐 정리정돈에 대한 엄두를 내지 못해 종국에는 정리정돈 대리업체까지 생겼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아침에 눈을 뜨메,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시작하고 싶다.

밤에 눈을 감으메, 뿌듯함과 기대감으로 잠들고 싶다.

낮에 활동하메, 설레임과 기대감이 펼쳐지는 걸 경험하고 싶다.

 

그 시작은 자기자신의 현주소를 아는 것. 그건 바로 청소와 정리정돈처럼 자기자신에 대한 하루를, 지난 흔적을, 그리고 다가올 앞일에 대해 솔직하게 풀어내고 그걸 하면서 할 거라고 다짐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지치고 피곤하고 힘들어 하는 말에는 잘 살았네, 수고했어, 고생많네 라는 격려와 응원의 말이 듣고 싶은 건 아닐까?

남으로부터 듣는 칭찬은 달콤하다. 달콤한 만큼 중독되기 쉽상이다. 그런데 일방으로 이어지는 칭찬은 독이 되기 마련이며 그런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다. 거짓이 끼어들기 쉽기 때문이다. 혹은,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휘둘릴 가능성이 커진다. 홀로서기 라는 말은 그래서 필요했나 보다. 그러니 자기알기 라는 말처럼 자신을 돌아보고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면서 조심하거나 나아가는 일련의 일상을 소중하게 다뤄보면 어떨까?

 

기록이 그 시작이다. 어떤 방식의 기록이라도 무방하다. 이런 마음을 품고 시작하면 의외로 내 마음을 풀 수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찍거나 녹음하거나 말하고 보고 듣는 순간을 기록할 수 있다는 것에 무척 감사할 것이다. 글쓰기 조차 몇 백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세상, 영상의 무작위 편집앱이 오리지널의 감성과 원천을 모두 담아낼 수 없지만 그나마 짧은 순간이나마 압축된 시간으로 보여줄 수 있음에 자주 활용하듯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서는 편집이란 기능이 일상속에 녹아있다. 얼마나 잘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영역으로 넘어선지 오래다. 단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거나 할 요량을 낼 의지가 없거나 그냥 귀찮아 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했기 때문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 필요성을 알게 하는 건 의지를 갖게 하는 것 보다는 쉽다. 잘 살아가야 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듯이 설명하면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만, 자기가 그렇게 할 것이냐는 다른 문제다. 습관이 들지 않아 일상 속에 그걸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그 필요성에 대한 설명이나 강의를 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에 머물면 파장이 퍼지지 않고 고여있게 됨과 동시에, 그 필요성만 강조하는 꼴이 되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실제 바라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란 그 바람은 멀게만 느껴지어 결국 다시 무심해질 수 있어 주의한다. 그러니, 그 필요성에 대한 설득 보다는 바라는 그걸 그냥 할 수 있는 걸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방향에서 각종 편집도구들이 생겼고 범람하고 있다. 다만, 주로 찍은 걸 편집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각색이나 영화화 하는 기능은 구글 포토에서 선택한 인물에 대한 사진을 쭈욱 돌려보거나 여러 명을 선택하여 가족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단순함에 머물러 있다. 이를 쉽고 빠르게 하려면, 그가 쓴 글, 말, 본 것, 느낀 것, 들은 것, 그런 일련의 것을 쉽고 간결하게 연결하여 하루의 일기처럼 만들고 그 원천을 통해 스토리 인생을 만들어내거나 하는 일련의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 방식의 접근에 있어 현재는 다양한 편집도구를 블로그나 SNS, 유투브에서 가져와서 한 곳에서 하루 한 두시간씩 공을 들여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이를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선다.

 

1. 내가 하는 방식을 그대로 전하기

2. 여러 앱을 써보고 난 후, 가장 적합한 앱을 찾아내거나 연결하기

3. 스케줄이란 이름으로 정리된 시간대별 장소에 더하여 만난 사람과 보낸 시간, 대화내용, 통화내용을 내가 정한 기준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기

4. 내 활동과 무관하게 기록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5. 기록에는 대화, 말, 통화 외에도 SNS, 카톡, 메시지, 송금 등 각종 범주를 포함하되, 초기에는 추억이 될 만한 시간에 초점을 맞추기

6.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임을 알 수 있도록, 기록은 자연스럽게 일상을 기록하기

7. 의미를 갖는 행위, 즉 사진촬영, 영상녹화, 음성녹음, 글쓰기, 유선통화, 영상통화를 한데모아 하루 일기로 정리하되, 각각이 연결된 면면은 계속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각각 단면의 모습을 그 모습대로 담아내기

8. 결국, 잘 살았어, 수고했어, 고생많았어 라는 말이 들리는 듯한 인생기록물, 한 편의 드라마를 일목요연하게 생성하기

9. 뒤늦은 댓글이나 감상이 다시 해당 기록물과 연결되어 그 흐름이 여정처럼 이어지도록 하기

10. 경험이 의미없이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록이 우선되어서는 아니됨을 명심하기

 

11. 기록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런 마음으로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데 있음을 잊지 않기.

 

아침에 눈을 뜨메,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시작하고 싶다.

밤에 눈을 감으메, 뿌듯함과 기대감으로 잠들고 싶다.

낮에 활동하메, 설레임과 기대감이 펼쳐지는 걸 경험하고 싶다. 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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