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망한다. 영화를 보듯이.
나를 빼고 이야기의 흐름으로 본다.
지금 하는 일을 본다.
중심을 내게 두고 본다.
행복이란,
60세, 70세, 80세, 90세, 100세 모습을 떠올린다.
이루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정하지 않는다.
'흘러간다'와 '반복된다'에 초점을 맞춘다.
지금 하고 있고 생각하는 것에 중심을 둔다.
결국 남겨진 건,
기록.
어떠한 기록이나 성과라기 보다는,
기록 그 자체.
억지로라도 엮으려 하지 말자.
순리대로.
차면 넘치고 빈하면 들이차기 마련.
이룰 바에 목메지 말자.
차라리 잊는다.
지금,
일어나
새벽 6시45분.
변기에 앉아
정리하면서
토닥토닥 거리는,
지금의 내 모습이야말로 시냇물.
달을 좇아
달빛에 반하더라.
물에 반사된 달빛에 현혹되더라.
결국,
알아야 할 건
현상이 아니라 존재감이라.
파악할 건
우주 너머 근원이라 칭하는 빅뱅이 아니라,
우주로 바다로 신기술이라 칭하는 온갖 색상을 칠하는 기록하는 사람(존재)과 그 면면히 이어지는 것.
내가 할 건,
바통을 받아 들고 어디로 어떻게 뛸까를 찾기 보다는 현재의 위치에 대한 자각.
거기에 있는 그 만한 이유가 있으니,
기록되는 관점에서 부속으로써 채울 것인가!
한 발 물러나 영화를 보는 청중인 양 관조할 것인가!
둘은 다르지 않다.
그걸 알면 된다.
메타버스에 대한 관심은 잠과 꿈으로 이어지더니,
우주로 나아가고 양자역학으로 연결되며,
삶의 본질과 생태계를 마주하게 된다.
기술.
갖고자 하는 바가 기술인가?
기술은 곧 돈이 되는 시대.
스킬.
얻고자 하는 바가 스킬인가?
스킬이 곧 역량이 되는 시대.
본질.
기술이나 스킬은 본질에서 비롯된 가지에 불과하다.
현재 내가 파악한 본질은,
달과 달빛이 아닌 시냇물.
흘러간다.
반복된다.
기록된다.
이 세가지.
물방울 하나하나의 존재, 혹은 그 자체.
우리는 흔히 정보라고 칭하는 것이 본질에 가깝다.
죽음 너머 건네지는 건,
육신이 아닌 영혼 혹은 정보.
다시 태어나는 건,
육신이 아닌 영혼 혹은 정보에 적합한 산물.
면면히 이어간다.
나아간다.
이 또한 우주 전체의 사멸일지라도,
또 다른 우주에 닿을 수 있고,
차원이라 불리는 다른 시공간으로 이어질 수도.
차분히,
내려놓고,
빈한 상태에서
바라본다.
늙어가는 육신을 탓하기 보다는,
조금 더 맑고 깨끗한 정신을 정보로 담고자 한다.
탁하고 어둔 정신 또한 정반합의 관점에서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버린다.
흘러간다.
나아간다.
내게 이로운 건,
역경이나 고통을 비롯한 경험으로부터
받아들인 청명한 상태로의 수용.
결코,
탁하거나 어둔 감정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감정은 경험을 하는 이유이자, 양자와 같다.
존재가 원자라고 불릴만 하다.
흘러간다.
반복된다.
기록된다.
이 세가지를 받아들인다.
세상의 이치란, 우주의 신비란, 삶의 지혜란,
현상이 아니라 시점 그 자체에 있다.
지금이라는. 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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