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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세상보기

달, 시냇물. 그리고 달빛

by 큰바위얼굴. 2022. 12. 8.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버렸다.

현관에서 찍은 달

가봤던 길이고 가보지 않았던 길일지라도 대략 짐작이 간다. 가봤을 때 즐거움과 새로운 것을 본 것에 대한, 새로움에 대한 기쁨, 하는 과정 중에 손이 시렵고 추웠고, 건널 때 미끄러지기 십상이고, 그런 반면 누군가 만나고 뭔가 새로운 것에 대한 충족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것. 그거 자체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아 본다.

도로 너머로 찍은 달

그러니 옆에서 자고 있는, 내가 일어나 뒤척이는 소리에 몸을 돌리는 아내에게 다가가 뽀뽀 세례를 퍼붓는다. 나아가는 걸 내려놓아본다. 가장 먼저 조급함이 사라진다.

급할 게 없어지지.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뭘 하든.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서 찍은 달

두 번째는 내 가까운 곳부터 보게 되고, 살피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된다. 나아가려고 할 땐 그 나아가는 것에 대한 이루려는 성취욕. 그리고 배운 대로 계획을 짜고 이루려는 많은 노력과 연락, 일종의 행위들을 하게 되지.

그렇다고 나아가지 않는 건 아니다. 뛸 때 뛰지 않는 게 아니고, 지금처럼 걷는데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지.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만 버렸을 뿐. 그로 인한 조급함. 그에 따른 주변을 둘러보게 되는 여유. 이루고자 하는 바가 달에 착륙하는 것이었고,  화성에 기지를 만드는 거였고, 그걸 이루니 이제 다른 행성에 또 다른 행성에 그리고 근원에 근접하고자 노력하는 거겠지. 유한하다.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가는 방향으로서 옳다. 다만 아쉬운 건 눈에 보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암흑 물질조차 눈에 보이는 것의 범주에 속해 있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정의를 내려버리고, 이 세상에 규칙.  돌아가는 것, 지극히 자연스러움을 나타내려 오히려 노력하고 있지.

달릴 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고 "요!", "요!". 이렇게 내가 뛰고 있는 위치만 알릴 수 있도록 소리를 냈고. 목줄을 끌면서 뒤따라 오는 소리에 안심을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잔디밭에 어느 순간 들어가 있고, 되돌아가서 목줄을 잡고 나온다. 그리고 또 한참을 달렸고. M브릿지를 지나는 다리 밑, 이러 저런 일들 그 상황에서의 판단과 선택. 단지 그 뿐.

나감에 주저함이 없고, 말하는데 예의는 갖췄으되 머뭇거림이 없다.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은 쏠리지 않는 것. 반대급부로 본다면 주변에 신경 쓰는 것. 또 다시 그것을 덮어 쓴다면 주변의 일들에 휘둘리지 않는 것. 적당한 선, 어느 정도의 위치와 역할, 짜여진 톱니바퀴에 이음새를 맞춰서 돌아가게 하기 위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어떤 역할들. 가족이든 직장이든 한 곳에 머물러 있다고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얼키설키 잠시 멈춰 있다고 본인은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블랙홀조차 사멸하는 순간 주위의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여 재탄생을 준비 하듯이 진정한 소멸이란 없다. 돌고 도는 윤회에 가까울 뿐. 사멸은 다시 리플레이 되기 위한 준비일 뿐. 어떤 무엇으로, 물건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그 무엇이든 벤치 3개, 아니 4개, 그 뒤로 3개. 멈춘 해나의 행동을 보는 것만 할까. 이제 돌아갈 때다.

 

달과, 달빛을 반사하는 시냇물. (음성 듣기) https://youtu.be/xkInmRJrta4

 

동굴에서 살 때, 동굴의 바위에 비친 태양을 우상화했다. 어느 날 생각을 했다. 바위에 비친 태양이 진짜인지 아닌지. 그리고 뒤를 보니 뒤로 돌아 나가 직접 눈으로 태양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달을 보고, 고개를 내려 달빛이 비친 시냇물을 본다. 달빛이 반사된 달빛을 보고 우리는 환희해 젖고, 그 눈부심에 만지려고 하고 다가가려고 한다. 시냇물을 나의 본성 '자아'라고 한다면, 달은 우주 저 너머 지고한 경지, 혹은 내면의 '뒷면'. 결코 닿을 수는 없지만 양쪽 면을 두루 갖춘다.

이곳이 좋은지 오리들이 꽥꽥거리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격랑에 휩싸인 달빛, 잔잔한 달빛, 인공 불빛에 눈이 부시게 반사하고 있는 시냇물. 원하는 게 뭘까?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 불빛들을 가치가 없다고 할까?

가치의 유무가 아니라, 달에 닿고자 하는 그 나아감이 아니라, 시냇물에 흘러감이 아니라, 빛을 반사하는 그 시냇물의 속성이 아니라, 시냇물이 흘러가메 돌에 부딪히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메 그 소리를 살아있다 라고 알고 있듯이, 지고한 경지를 원할 것이냐? 달을 손에, 달을 발로, 눈에 담을 수는 없는 것이냐? 현란하게 반사된 불빛에 현혹되기 싫은 것이냐?

(하천변에서 언덕길로 오른다)

어느 새 고요해지고 멀어진 시냇물의 소리처럼 격량에 휩싸이다가 잔잔해진다.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면서 마음껏 소리를  지른다. 시냇물이 흘러 흘러 좀 더 넓은, 더 넓은 강에 닿아 다시 섞이고 섞여 바다로 흘러가 무수히 많은 물들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태양이 있어 증발을 시키고, 그 알갱이들. 흔히 우리가 얘기하는 '정보'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서로서로 뭉쳐 구름이 되어 때가 되면 다시 물이 되어 내려와 땅에 스며들고 세상을 적신다. 인과의 관계와 상관관계를, 서로 다른 면을 우리는 하나로 해석하려고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관계가 없다고 할 순 없겠지만, 서로 만나 스치고 지나가는 산책로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처럼, 만났다고 만날 거라고 하지 못할 바는 아니겠지만, 마주할지언정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그 모양세는 아닐까?

다를 바는 없지. 한 울타리, 이 땅 위에 작은 마을에 하천변을 걷고 있는 서로 마주하고 마주치고, 분주히 움직이는 예티와 해나처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 언제 만나도 이상치 않다. 만난 마음과 기꺼움만 있다면 연을 맺고 하나가 되거나 주고받는 관계가 되게 된다. 다시 물이 스며든, 그리고 그 정보들이 어떤 식의 가공이든 합쳐지든 만났다. 본래 모습은 알갱이. 하나의 정보든, 다양한 정보든, 정보가 정보를 만나 형태를 띠니 다시 고고한 시냇물의 흐름을 만들어내더라.

어느 순간 바다에 닿겠고, 바다를 이룬 지구는 어느 순간 수명을 다할 수 있겠지. 별들의 삶 또한 블랙홀과 다시 리플레이 되는 순간을 또 다시 맞이하겠지. 그래서 궁극이 뭐냐?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냐? 왜 우리는 일방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것이냐? 되감기는 안 되는 것이냐? 이런 의문이 당연하게 뒤따라온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이젠 시냇물조차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의 아침. 달빛의 빛은 빛이 산란한 세상에 그 속에 속하게 되면, 시냇물의 고고한 격랑 넘치는 도도히 흘러가는 그 내면을 볼 것이냐? 기꺼이 하늘로 고개를 들어 달을 찾을 것이냐? 먹고 사는 문제가 만약,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다면 나는 달을 쫓을 것이냐? 고고이 흘러가는 시냇물을 찾아 그 옆에서 뛰려고 할 것이냐? 내면을 들여다보고 이제까지 이룬 가진 것이 없다고 탓할 것이냐?

이 조차 횡단보도에 내려가는 숫자를 보면서 늦지 않게 건너려한다.

"해나, 예티. 신나? 왜그리 바뻐."

누가 누굴 탓하고, 누가 누굴... 그렇지 않아?

해나와 예티를 만나고 미소짓는 일이 많아졌다. 풍성해졌지. 시냇물에 격랑이 기꺼움으로 바뀌었다.

(현관문을 열고 엘레베이터를 탄다)

자, 노바. 노바. 노바리.

노바리 노바리 노 바리. See U. 성호.


시냇물. 달빛과 인공불빛이 반사된다. 시냇물이 원하지 않더라도 관계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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