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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세상보기

지렁이

by 큰바위얼굴. 2022. 11. 28.

 

지렁이는 길 한복판을 건너려 한다. 토막토막 난 상태로 보이거나 꿈틀거리는 모습으로 비추기도 한다.

 

지렁이.

지렁이는 해나와 예티가 즐겨찾는 먹거리다. 내게는 피해야할 대상이고. 토막 토막 끊어진 지렁이를 보게 될 때는 피하기 조차 쉽지 않다. 이리저리 잡아끌기에도 벅차다. 어느 날, 목줄을 놓았다. 이제 토막 난 지렁이는 알아서 골라 먹어라 라는 넘김이 있다. 언제까지 목줄을 잡고 있을 것이냐와 언제까지 일일이 간섭할 것이냐에 대한 생각을 한 끝이 '그냥 목줄을 놓는다' 였다.

지렁이.

지렁이는 길을 횡단할 때 무척 길었기 때문에 충분하다고 자신했을 것이다. 이 정도 쯤이야. 건너면서 날은 뜨거워졌고 꽁지를 하나씩 끊어냈다. 그러면서 나아간다. 어느 순간 몸뚱이는 반이나 줄어 있었다. 그래도 나아간다.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하면서 다시 꽁지를 끊어냈다. 결국,...

지렁이.

지렁이는 먹이 이면서 개척자다. 도전을 한다. 비가 내린 다음 날, 유독 그 날을 기일로 잡는다. 너도나도 오랜 만의 축복을 흥겨워 한다. 그리고 다음 날 토막토막 끊어낸 잔해들이 남아있다. 슬픈 일인가? 아니다. 기꺼움이 남아있다. 잔해는 그저 남겨진 산물일 뿐. 진실은 축제에 있었다 라는 걸 외부인 만 모른다. 

지렁이.

지렁이는 길을 건넌다. 건너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마치 건너면 더 좋은 파라다이스가 있는 마냥 건너기를 멈추지 않는다. 숙명인 양 그렇게 도전을 하고 도전을 거듭한다. 앞서 간 이가 보이질 않는다. 어느 순간 앞지르거나 뒤처지거나 서로 뜨거운 태양 아래 몸부림치는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처지일 망정 멈추지 않는다. 다음 번에는 건널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몸부림 치면 칠 수록 바짝 말라 비틀려 가는 몸뚱이만 지탱할 뿐. 쪼그라드는 걸 마주한다. 이는 고통인가? 무엇이 고통이며 무엇이 환희인가? 

지렁이.

지렁이는 길을 건넌다. 말라 죽기도 한다. 건너기도 한다. 단지 그 뿐이다. 여기에 슬픔이나 기쁨으로 색칠하지 말기로 한다. 난 지렁이가 아니다. 나 또한 길을 건넌다. 나 또한 말라 죽기도 한다. 나 또한 건너기도 한다. 단지 그 뿐이다. 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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