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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세상보기

때론 그냥 달려도 좋다

by 큰바위얼굴. 2022. 11. 28.

동문회 40주년 행사에 다녀와서 다소 심란해지는 마음.

하루, 한 달. 한 달에 500, 1000, 2000, 1억. 이런 부러운 계산을 하는 그 때, 계단을 내려와 시냇물 소리에 모든 것이 파묻히고 상념에서 깨어난다. (음성 듣기) https://youtu.be/64FGQlF4s_Q


그 때 예티가 이제 뛰자며 나비처럼 폴짝폴짝 아는 체를 한다. 때론 그냥 달려도 좋다.

내게 30분, 한 시간 반. 그리고 오후에 한 시간 반을 합하여 총 3시간 반. 3시간 반에 500. 그리고 잡혀 있는 시간. 오매가매 출퇴근 시간. 양압기의 기본 이용 시간이 7시간. 그런 질문을 던지겠지.

돈을 더 줄테니 일 좀 더하쇼. 혹은, 돈은 그만큼 충분하니 자유 시간을 더 갖게 해 주시오. 아마도 선택을 하겠지. 누구나 다 이 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라고 본다.

그때 예티가 멈춰선다. 말하는 중에 두 번은 목줄을 잡아당겼었다.

"해나. 올라와? 그 물은 먹는 거 아냐. 올라와. 오리도 다 어디 갔어?"

다리 밑 벤치 만이 빛에 둘러싸여 있다. 잠시 쉰다.

다리 밑 어두컴컴한 벤치에만 불이 살짝 들어와 있는 그 공간에서 예티에게 쏠린다. 싸는 중. 나를 말똥말똥 쳐다볼 때는 묻 었다는 것. 기다리지 않고 얼릉 살펴보니 덩어리째 매달려 있다. 두 손으로 한 손은 살 쪽을 꽉 누른 채 다른 손으로는 똥봉투에 집어넣은 채 잡아 뜯는다.

지렁이.

지렁이는 해나와 예티가 즐겨찾는 먹거리다. 내게는 피해야할 대상이고. 토막 토막 끊어진 지렁이를 보게 될 때는 피하기 조차 쉽지 않다. 이리저리 잡아끌기에도 벅차다. 어느 날, 목줄을 놓았다. 이제 토막 난 지렁이는 알아서 골라 먹어라 라는 넘김이 있다. 언제까지 목줄을 잡고 있을 것이냐와 언제까지 일일이 간섭할 것이냐에 대한 생각을 한 끝이 '그냥 목줄을 놓는다' 였다.

지렁이.

지렁이는 길을 횡단할 때 무척 길었기 때문에 충분하다고 자신했을 것이다. 이 정도 쯤이야. 건너면서 날은 뜨거워졌고 꽁지를 하나씩 끊어냈다. 그러면서 나아간다. 어느 순간 몸뚱이는 반이나 줄어 있었다. 그래도 나아간다.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하면서 다시 꽁지를 끊어냈다. 결국,...

지렁이.

지렁이는 먹이 이면서 개척자다. 도전을 한다. 비가 내린 다음 날, 유독 그 날을 기일로 잡는다. 너도나도 오랜 만의 축복을 흥겨워 한다. 그리고 다음 날 토막토막 끊어낸 잔해들이 남아있다. 슬픈 일인가? 아니다. 기꺼움이 남아있다. 잔해는 그저 남겨진 산물일 뿐. 진실은 축제에 있었다 라는 걸 외부인 만 모른다.

지렁이.

지렁이는 길을 건넌다. 건너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마치 건너면 더 좋은 파라다이스가 있는 마냥 건너기를 멈추지 않는다. 숙명인 양 그렇게 도전을 하고 도전을 거듭한다. 앞서 간 이가 보이질 않는다. 어느 순간 앞지르거나 뒤처지거나 서로 뜨거운 태양 아래 몸부림치는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처지일 망정 멈추지 않는다. 다음 번에는 건널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몸부림 치면 칠 수록 바짝 말라 비틀려 가는 몸뚱이가 쪼그라든다. 이는 고통인가? 무엇이 고통이며 무엇이 환희인가?

지렁이.

지렁이는 길을 건넌다. 말라 죽기도 한다. 건너기도 한다. 단지 그 뿐이다. 여기에 슬픔이나 기쁨으로 색칠하지 말기로 한다. 난 지렁이가 아니다. 나 또한 길을 건넌다. 나 또한 말라 죽기도 한다. 나 또한 건너기도 한다. 단지 그 뿐이다.

와~ 다시 징검다리가 있네. 이곳에 오리는 있었다.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오리가 있었지.

징검다리 옆 시냇물에 오리가 있다. (아웃포커스로 촬영)
징검다리 옆 시냇물에 오리가 있다. (일반 모드로 촬영)

나머지 오전 시간은 새벽에 녹취한 심상을 다시 편집을 한다. 오후에는 산책과 낮잠, 유튜브와 독서. 그리고 귀가하고 저녁에는 아내와 아이들, 해나와 예티. 산책과 함께 하는 식사.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돈을 버는 게 아닌 돈을 쓰는 주체로 본다면 하루의 대부분은 시뮬레이션이나 홀로그램. 이 우주론에서의 공통점은 '나' 라는 매개체를, 혹은 우리라는 주체를 0 1의 정보와 기록, 비추어진 모습, 여러 면들의 중첩된 혹은 다른 면들의 집합. 팽창하는 우주. 빅뱅. 시작점이 있으니 도리어 진짜 나의 내 모습은 어느 한 곳에 있고, 이면 저면 비춰진 홀로그램에 불과할 뿐. 혹은 매트릭스 안에 있는 매개체. 차원이라는 것, 해석이라는 것, 다중적이라는 것, 매트릭스라는 것, '나' 라는 매개체가 하나의 단독이라고 본다면 여러 면에 있는 나는 수집하는 역할. 정보를 수집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한다. 일하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고뇌하고, 뭔가를 원하고, 바라고, 감정을 갖고, 행복감에 취하고, 술 한잔의 기쁨을 누리고자 기대하고, 걷고, 발자국 소리에, 목줄과 똥봉투의 움직이는 스치는 바람 소리에, 해나의 발걸음과 곁눈질에 다시 돌아온 길.

갈 때의 모습과 올 때 모습이 합쳐진다.

사뭇 다르게 다른, 많고 적은 것. 일하는 시간에 대한 쓰임을 따져보기도 하고, 길을 가는 길, 다시 돌아오는 길을 합쳐보기도 하고 낯선 길, 새로움과 신선함을 느껴 보기도 한다. 사용치 않는 운동기구에 컹 컹 거리고 소리를 울렸던 그 때가 잔상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잔상, 기억, 추억, 떠올림, 기대, 망상, 허상, 추상, 상상. 그 어느 것 하나 의미가 없는, 의미가 없을 수가 없다. 버릴 것이 없다. 모두가 가치가 있다. 더할나위 없다. 소중하다. 켜켜이 쌓이고 쌓여서 합일을 이루는 어느 순간, 다시 보내진 어느 때 길은 그 자리에, 오고가는 나와 해나와 예티 만이 바뀌어 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의 굴곡짐이 오히려 반갑다. See U. 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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