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자유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시 돌아가려 한다. 마치 본능처럼, 회귀하려는 충동이 고개를 든다.
자유, 그 너머. 분명 그곳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 텐데, 막상 다가서려니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지 말자.
쉼은 또 다른 역동적인 '행'을 위한 준비일 수도 있고, 혹은 그 자체로 충분한 '머무름'일 수도 있다. 김성호.
🌿 연작 에세이 《쉼의 자리》 https://meatmarketing.tistory.com/8560
쉼 https://meatmarketing.tistory.com/8562
게임이 멈춘 밤 https://meatmarketing.tistory.com/8558
'쉼'에서 비롯되었다. https://meatmarketing.tistory.com/8559
아직 몸이 아프다. 목은 더욱 칼칼해졌고, 가래를 뱉고 나서야 조금은 후련함을 느꼈다. 똥을 싸고 나면 괜히 속이 시원한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목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말을 줄이고 있지만, 그래도 오늘은 조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최근 문서가 올라왔을 때, 본능적으로 ‘아는 체’를 하게 됐다.
분명 모르는 것 같은데도, 아는 척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스스로 헷갈린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모르는 척하는 게 맞을지, 아니면 굳이 말하지 않는 게 나을지, 마음이 왔다갔다 한다. 어차피 그렇든 저렇든 바뀌는 건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그냥 "잘한다, 잘한다" 하며 응원이나 해주는 게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기준이 나름대로 참 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니잖아" 싶은 순간이 오면 결국 얘기하게 된다. 그런데 그 말이 결국 또 ‘아는 체’로 발전해버린다. 정작 말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도 없는데, 괜히 자랑하는 것처럼 들릴까봐 머뭇거리게 된다.
오늘은 금요일. 주말 부부라 조용한 아침이 유난히 낯설었다. 너무 조용해서 귀마저 날카로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평소와 달리 뉴스를 틀지도 않았다. 그런데 차를 타고 나서 적막 속에 앉아 있으니, 문득 ‘뉴스나 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기대하는 세상은 뉴스 따위 필요 없는, 인공지능이 모든 걸 알아서 처리하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파업도, 갈등도, 고통도 선택적으로 소비하며, 게임하듯 스스로 “내가 할게”라며 새로운 세계로, 여행처럼 가볍게 떠나버리는 삶을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처럼 톱니바퀴 같은 삶을 살진 않을 것이다. 물론 환경은 더 가혹해질 수도 있겠지만.
변수 하나로 모든 게 한순간에 끝나는 일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 지금도 비행기 사고나 선박 사고처럼, 우주 시대가 열리면 우주 정거장 하나가 통째로 아웃되는 상황도 생길 것이다. 그때 얼마나 많은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까. 결국 나아가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무중력 공간, 암흑물질이 넘실대는 그 곳에서 생존을 위한 움직임과 기피 동작이 필수적일 것이다.
어떤 회전축에 자리를 잡고도 운석을 피할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다만, 운석이라고 해봐야 광년 단위로 떨어져 있으니, 그 거대한 거리를 생각하면 방어는 가능할 것이라 기대된다.
왜 이런 상상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생각해봤다. 아마 현실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이라는 건 늘 신기하고, 때로는 여행과 닮아 있다. 우주 시대가 열려도, 텔레포트 같은 이동수단은 아마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익숙해져서. 오히려 사람들은 더 규모 있고, 애정어린 삶을 찾아 떠돌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도 분명 집은 필요하겠지만, 지금처럼 ‘내 집’이라는 개념이 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유랑을 멈추고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어쩌면 과거의 삶을 꿈꾼 나머지 유랑 삶을 시도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이성과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미래에도 ‘인간다움’을 지닌 존재들이 사회 속에서 자기 역할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집단 속에서 기계처럼 맞물려 사는 삶보다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체험하고, 겪고, 경험하며 나아가는 삶을 추구하지 않을까 싶다.
한곳에 얽매여 톱니바퀴처럼 사는 모습이 아니라, 거대한 축 속을 함께 움직이는 존재. 그 존재가 대체 가능한 자원이 될 수도 있지만, 결국 유랑하며 떠돌아다니는 삶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적을 두지 않은 자유로움 속에서 모험을 즐기며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내가 퇴직 후에 기대하는 삶과도 닮았다.
나이가 들수록 도전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 같은 게 점점 더 중요해진다. 무엇을 하든 결국은, 나를 이해하고, 보듬어주고, 함께하는 존재가 있어야 행복이라는 게 성립된다.
소속된 채 톱니바퀴처럼 일하는 삶도, 긍지를 가질 순 있다. 하지만 자존과 자유가 구속된 삶이라면, 결국 유랑하는 여행 같은 삶이 더 낫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삶도 잠시 멈춘 듯 머물고 있는 것일 뿐, 언제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직장에서의 치열함은 결국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살아가며 사회 속에서 한 번쯤은 자리를 가져야 하는 것처럼.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치 "사나이로 태어나 왕 한 번 해봐야지"라는 마음을 품듯, 삶을 의심하고, 또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 더웠다. 반팔을 꺼내 여벌로 챙길 정도였다. 도로를 주행하다가 ‘괴목’이라는 간판을 보았다. 이름이 참 괴상하고도 낯설다. 스스로를 바라보며, 왜 자꾸만 거기에 눈이 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바람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거리를 걷고, 달리고, 발을 내딛을 때,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 있을까? 도로가 활주로처럼 뻗어 있지만, 태생적 한계라는 게 있다. 자동차라는 존재,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 그렇지만 만약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업그레이드가 있다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갖고 싶은 것도 바로 ‘날개’다.
새로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 이유는 환경 때문일까, 삶, 정신, 우주, 인생, 만물 모든 것이 어우러져 지금의 나를 만든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돛단배 같고, 떨어지는 낙엽 같으며, 망망대해를 떠도는 배와도 같다.
결국 인류의 지속을 위해선, 애를 많이 낳아야 한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큰 명제다. 그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혹시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대체해버린 세상이라 해도, 인간은 그저 자기 인생만 살아서는 안 된다. 인류의 시작과 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끝을 내버린다면, 다음 세대가 없다.
다른 사람이 대신하면 되지 않느냐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결국 누군가 한 줄 한 줄 이어가는 삶이 모여 튼튼한 밧줄이 되는 법이다. 모두가 "내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 하겠지"라고 생각하면, 그 밧줄은 금세 외줄로 변해 끊어지고 만다. 인류의 존속을 위해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간, 이 일상이 결국은 그 끈을 잇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김성호.
* 원문(음성)
Not Going Anywhere https://youtu.be/rWoVDgrx8zc?si=MQFC7wJYf59pwd-N
시골집에 사는 30대 여자 https://youtu.be/dT-rgwpca68?si=ylHoWU8x1wTLkkq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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