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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우리가족 이야기

지독한 원망

by 큰바위얼굴. 2022. 8. 24.

바란 만큼 속이 상한다. 이는 거짓이 한 줌도 안 된다.

 

바란 만큼 속이 상한다.

그렇다고 바라지 말아야 할까? 기대란 건 기대한 만큼 성취감이라는 기쁨을 주는데.

 

바라더라도 정도껏 이란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구분지어야 한다. 바란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상대를 위한 것인지.

그리고 그 깨진 바람이 나를 위한 것인지, 상대를 위한 것인지.

 

과연 그 바람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 근원은 뭔지.

아이가 잘 되기를 바란다. 부모는 한결같이 바란다.

 

우리 아이는 건강하게 살게 해 주소서.

우리 아이는 행복하게 살게 해 주소서.

우리 아이는 바르게 살게 해 주소서.

 

거짓 없이

고통 없이

아픔 없이

 

그저 우리 아이는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해 주소서 하고 바란다.

 

여기에서 논점이 등장한다. 과연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이를 위한 것일까, 나를 위한 것일까?

 

아이가 아파서 내 가슴이 아프지 않게 해 주소서.

아이가 불행해져서 내 처지에서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지 않도록 해 주소서.

아이가 사고를 쳐서 그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게 해 주소서.

 

최소한 본인이 살아가는데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여기에서 말하는 남은 나를 말한다)

 

손을 벌리지 말고,

 

자립해서 웃으며 살기를 바란다. 어찌 이를 구분지을 수 있으랴마는, 이 또한 거짓이 한 줌 만큼 정도만 섞여있다.

 

시간을 보내는 아이를 보면 답답해진다.

시간을 쓰는 아이를 보면 기쁘다.

 

그렇게 어느 새 시간을 쓰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의지를 갖추고 선한 목표를 세워 나아가길 바란다.

그러하길 기대한다.

 

아니라면,

그렇지 아니한 상황을 맞닿드리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난 너에게 강요한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너는 왜 그러니?

(말 한마디 한마디 모두가 강요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여지를 말한다.)

 

나라고 내가 바라는 대로 모두 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마치 바라면 바란 대로 하면 되지 라고 쉽게 말한다.

(해야할 걸 그냥 한다는 건 정말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하다. 자신을 비우고 필요한 걸 한다라. 이는 지고한 경지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해서 그냥 두고 볼 일인가?

 

당연히 '아니다.'

 

필요한 말은 하되, 이를 내 속으로 들여오지는 말자.

내 속까지 썩어문드러지면 이는 바란 만큼 속이 상하게 되어 결국 나 조차 이성을 잃게 되고 만다.

아프다. 슬프다 라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나열해보자.

왜 아프지?

왜 슬프지?

 

아이가 말을 듣지 않아서?  (아이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아이가 거짓말을 해서? (아이는 잘도 거짓을 말한다. 자기를 위해)

아이가 필요한 걸 하지 않아서? (아이는 딴 짓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이가 이제 큰 만큼 도리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라면? (그래서 아이는 탈피해야 함에도 아직도 여전히 아이에 머문다)

 

아이는 부모에게 한없이, 끝도 없이, 평생을 아이로 지낸다.

청출어람 이라.

 

넘어설 줄 알았건만 부모의 벽이 크면 크게 느낄수록 아이는 관계를 정립할 뿐, 아이로 남는다.

숙명처럼.

 

그렇다고, 부모와 아이 관계에서 아이로 남는다고 해서 불행하거나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하다 라고 정의내렸으면 해서 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다. 행복하다. 기쁘다. 그렇기 때문에 한 줌의 거짓이 자연스럽고, 그렇기 때문에 한 없이 자애롭다.

그렇기 때문에 따끔한 충고와 질책 또한 자연스럽다. 마음을 주기 때문에, 마음을 통하기 때문에 자연스럽다.

바라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바람 만큼 속은 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다시말해, 속은 상하겠지 이는 숙명처럼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상한 속을 달래려는 의지 또한 부모의 몫이라면 노력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삼아보자.

 

바란 만큼 이루어지듯이,

바란 만큼 속이 상한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래서, 지독한 원망 또한 자연스럽다.

모질고 부족한 나이기에 또 다시 뻔하디 뻔한 말을 한다손 치더라도 어찌 그리 그 말이 반복되어 왔을까 잘도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내가 너무 느슨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 해볼께."

 

그런데, 그녀는 "당신 때문에 너무 힘들어. 난 지금 너무 슬픈데 위로는 없이 지적질이냐구" 말한다. 속마음은 다르겠지만 겉으로는 거침없이 퍼붇는다.

 

그래서, 날림 일망정 한 큐에 쓱싹 하고 써진다. 지금 이 글이. 이 글처럼 아무렇지 않게 여기길 바라면서, 바란 만큼 상한 속을 글로써 다스려본다. 왜 날 책망할까? 왜 날 몰아붙일까? 왜 자신을 책망할까? 왜 아이를 나무랄까? 왜 아이를...

 

하루 24시간,

마주하는 시간 3시간,

말을 주고받는 시간 30분.

 

그 30분을 뭘로 채울지는 다가가는 자의 몫이다. 이 말이 하고 싶다. 난 관심이었을 뿐인데, 바란 걸 하지 않더라. 결국 속이더라 하는 걸 다시 속으로 들여와 감정을 삭히는 걸 보노라면 이 고리를 끊어내는 방법은 위로 라기 보다는 직시라고 보았을 뿐인데 너무 더디다. 오늘 통화에서 살짝 닿을 뻔 했는데 넘어서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원하지 않아, 아하 그렇구나 그럼 끊자 라며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장모님께 추석이라고 어머니께 한우를 보내주심에 감사함을 표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뭐가 나를 가둘 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쉽지 않다. 나를 가둘 건 나를 풀어주는 것 보다 월등히 많고도 널려있다. 심지어 우호적이지도 않다.

이를 바꿔보자.

 

내게 이롭도록, 내게 우호적이도록.

나를 감추고 나를 속이는 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자.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라고 보며, 성호.

 

 

> 통화내역(암호 설정됨)  

서희_1.vol1.egg
19.00MB
서희_1.vol2.egg
8.88MB

 

 

 

그리고 다음날,

서희는 내게 말한다. "내가 예민할 때는 그냥 그렇구나 해줘. 그럼 좀 괜찮아지면 연락줘. 네겐 내가 있잖아. 그럼 돼. 그리고 혹시나 더 할 말이 있다면 그래서 힘들겠구나. 마음이 아팠겠구나 하고 위로를 해줘. (제발, 아는 채 하는 말고. 내가 모를 줄 알아서 그러겠냐구. 응?) 그럴 수 있지?"

 

"그럼. 당연하지."

 

 

 

아래 사진은 8.19. 금요일 저녁 구십이 식당에서 함께 보낸 시간을 상징한다. 그 마음이 어디 갔겠어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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