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금흐름

퇴직을 했다.

by 큰바위얼굴. 2022. 5. 7.

2주 전 퇴사를 했다. 사표를 쓴 날, 아들에게서 꽃다발과 한우세트를 선물받았다. ‘내 걱정은 마시고, 열심히 달려온 만큼 적극적 쉼을 가지시길’이라는 짧은 카드와 함께. 뭐든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가 신조인 아들은 엄마가 재미없게 회사를 다니는 걸 지켜보며 혹여 그게 자식 때문이라면 아예 그런 생각은 접으시라고, 위로인지 격려인지 툭툭 던지곤 했다. 아무튼 난생처음으로 아들에게 받은 꽃다발이 퇴사 기념이라니.

경향신문 2022.5.5.
남경아 저자

흔히 말하는 정년이 보장되는 ‘신의 직장’을 다니고 있던 나의 퇴사에 지인들은 놀랐고, 극과 극 반응을 보였다. “대충 버티지. 후회 안 하겠어?”라며 나보다 더 안타까워했고, “좀 경솔한 거 아니야? 먹고살 만큼 모았나보네”라는 놀란 말투 속 구석에 이런 행간이 읽히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생기 잃은 꽃처럼 시들시들 속앓이를 하는 나를 지켜보던 친구들은 ‘잘했다 남경아!’ 응원의 플래카드와 꽃과 케이크, 영상 편지로 깜짝 퇴사 파티를 열어주었다. 주변의 다양한 반응과 무관하게 나는 진심으로 담담하다. 지난 8년간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에 후회가 없다.


“이제 뭐 할 건데?” 최근 가장 많이 받는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일관되게 “당분간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그저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놔두자”가 전부라고 말한다. 30년 직장생활 중 몇 번의 이직은 있었지만, 오십 이후의 퇴사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숱한 퇴직 교육과 컨설팅을 업으로 해온 나 역시 일반 중장년 퇴직자들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나는 퇴직 후의 명암을 더 분명히 알고 있다. 지금부터가 온전히 ‘나’로서, 내가 살아온 지난 시간을 평가받는 시간이 될 것이다. 무엇이 되었건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무계획이 계획이지만, 지금 간절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정리’다. 모든 물건, 관계, 마음의 정리가 핵심이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잘 모를 때 먼저 물건 정리를 추천한다. 나도 지금 서재, 베란다, 부엌, 거실 순으로 집 안 모든 공간과 수납장들을 하나씩 살피며 날마다 조금씩 버리는 중이다. 숨 쉴 공간을 만드는 것, 헐렁함이 주는 산뜻한 기분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휴대폰 속 주소록도 좀 심플하게 하고 싶다. 사회적 직함이 있어야만 유지되는 관계부터 정리할 생각이다. 그리고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연락하고 살지는 못했지만 나에게 유의미한 존재로 기억되고 앞으로 긴 노년을 함께하고픈 지인들에게 모처럼 마음을 표현하고 베푸는 시간을 많이 가지리라.


가장 중요하지만, 소홀했던 ‘마음’ 정리가 남았다. 초고속으로 달려오느라 내 안의 크고 작은 생채기들을 돌아볼 시간을 놓쳤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 빠짐없이 남김없이 모두가 나’다. 있는 그대로 온전히 나를 사랑하고 어루만지는 시간을 가져야 앞으로도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나답게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걱정과 불안이 하나도 없다면 거짓말이다. 걱정과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면 걷기와 글쓰기로 채우련다.

마지막으로 퇴직 절차를 밟으며 반성한 것 중 하나. 모든 자료들은 쌓아두지 말고 바로 정리할 것. 퇴직 일주일 전부터 문서 파쇄하느라 정말 엄청 고생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