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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이슈/시장상황

축산업의 공익적 가치

by 큰바위얼굴. 2020. 8. 3.

축산업의 공익적 가치

 

 

축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해소하기 위해 축산인들은 축산업의 공익적 가치를 무시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공익적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그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딱히 “이것이다”고 설명하지 못한다. 
자신이 없다고 할까? 아니면 너무 작의적이라고 할까? 스스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을 축산 외의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축산의 공익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더 고민해야 한다. 
축산업의 환경 개선이니 친환경이니 하는 막연한 캠페인으로 ‘일반인들의 축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자’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쉽도록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풀어야 한다. 

 

오히려 거부감 불러


농업의 다원적‧공익적 기능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교육을 통해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시만 빠져나가면 늘 피부에 와 닿기에 그렇다. 
쉽게 말해 농업은 식량을 생산하는 식량공급 기능과 함께 환경보전, 농촌사회 유지, 국토의 균형발전, 전통사회와 문화보전, 생물 다양성 유지, 토양보전 등 비시장적이고 비교역적인 산업이다. 따라서 국가적으로 보호하고 육성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해도 거부감이나 비호감으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 반응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축산업의 공익적 가치를 따지고 들면 ‘동물복지’로 철저하게 무장하고 있는 국민들로부터 이해받기 보다는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의 축산인들조차 축산업을 공익적 가치보다 하나의 사업으로 보고 있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여기에는 축산업이 생명산업이지만 인간의 건강을 위해 가축을 도살해야 하는 불편한 진실이 근본에 깔려 있다. 자신은 고기를 좋아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은 싫다는 즉 축산물은 좋지만 축산업은 나쁘다는 소비자들의 이중성은, 아무리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라도 깨지지 않는다. 
때문에 “가축이 얼마나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지 아느냐”며 장기 이식 등 의학과 약학용 소재로 부각되는 예를 들어도, 단순히 육류 생산 목적에 한정되지 않고 고부가가치 생명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해도, 그것은 축산업만의 발전이지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는 설명이 아니다. 
우리는 최근 들어 실험실에서 인간의 생명 연장과 더 건강한 삶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죽어가는 동물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에 어떤 설명으로도 인간의 ‘역겨움’과 ‘잔인함’을 누그러뜨리지 못한다. 
축산업의 생산액이 20조에 달하고 전체 농업생산액의 40%를 웃돌며, 농촌경제의 핵심으로 떠오르며 성장산업으로 발전해 왔으니 나라 전체의 경제에 이바지한 만큼의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지만 지금 축산업은 지독한 홀대를 경험하고 있다. 
진화인류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인류가 현대인으로 진화할 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육류’다. 300만년 전 선사시대 아프리카 열대림에 살던 작은 체구의 선조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작은 체구 때문에 눈에 잘 보이는 과일과 잎사귀, 유충, 곤충을 주식으로 먹는 초식위주의 전략이 생존 전반에 스며 있었다. 

 

현실은 몰이해 팽배

 

여기서 좀더 발전한 호모 엘렉투스는 석기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다른 육식 동물이 남기고 간 시체의 다리뼈나 두개골을 쪼개 열량이 높고 영양이 풍부한 골수와 두뇌를 얻었다. 이 때문에 체구도 커지고 직립에 가까워지고 설치류나 때로는 작은 사슴까지 사냥했다. 
이들은 근육이나 지방 및 뇌와 내장 기관처럼 연한 조직인 동물성 음식으로 전체 열량의 65%까지 채웠다. 식물보다 단위당 열량이 높아서 한 입당 에너지 발산도 더 높았다. 또 동물성 음식은 소화도 쉬워서 열량을 끌어내는 속도가 빨랐다. 
대체로 고기는 열량이 높은 만큼 에너지도 많이 발산해 사냥, 싸움, 영역보호는 물론 짝짓기 때도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었다. 
특히 고기는 듬직한 식량이어서, 초식에서 육식으로 식단이 바뀌면서 선사 시대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유럽은 겨울이 춥고 1년 내내 먹을 만한 식물이 부족해 초식성 식단 유지가 불가능한 지역이었지만 고기 덕분에 이 문제가 해결됐다. 
하지만 고기가 인류의 진화에 진짜 중요했던 이유는 그 안에 열량의 양이 아니라 새롭게 얻은 질 때문이었다. 동물과 인간은 아미노산 조직 중 16개가 동일해서(반면에 식물은 대체로 8개만 같다고 한다) 동물성은 인간과 쉽게 동화된다. 즉 고기가 고기에게 이상적인 재료인 셈이다. 보디빌더들이 고기를 많이 먹는 이유란다. 
이런 이유로 동물성 음식을 많이 먹는 선조일수록 체격도 커졌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1.2미터였다면, 호모 엘렉투스의 키는 1.8미터로 건장하고 훨씬 강해 육식동물을 피하거나 수렵하는 일에 능했다. 
육류 즉 고기가 인류의 신체적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는 이후의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봐라, 육류산업이 인류 발전에 얼마나 지대한 공을 세웠는지 똑똑히 보라”고 해본들, 고기를 생산하는 축산농가를 이해해줄 사람도 별로 없다. 
이런 주장은 이제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축산경제신문 20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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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인류학자의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호모 엘렉투스의 두뇌는 이전보다 거의 세 배에 달했지만 신체 크기는 두 배에 못 미쳤다. 인간의 신체는 매우 큰 두뇌에 상대적으로 작은 장기로 연료를 공급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로 고기가 정답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고기가 식물보다 단위당 열량이 높을뿐더러 소화도 쉬웠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비싼 두뇌이론’의 공동저자인 고인류학자 레슬리 아이엘로는 선조들이 고기를 더 먹고 식물을 덜 먹었기 때문에, 그 모든 식물 성분을 모조리 소화하기 위한 커다란 내장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고 한다. 

 

육류 기여도는 모르쇠


동물성 음식을 주로 먹지 않았다면 이들 신체와 두뇌가 커질 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신체와 두뇌가 이렇게 크지 않았다면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중동, 아시아 나아가 유럽까지 매우 빠르게 뻗어나간, 도구를 다룰 정도로 총명하고 능숙한 수렵꾼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크로마뇽인이 수렵에서 얻은 열량은 시간당 1만5000칼로리로 그들의 선조보다 훨씬 높았다고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 이론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크로마뇽인도 식물, 곤충, 과일, 꿀 등을 찾아다녔지만 전체 열량의 3분의 2를 동물성 음식으로 채웠을 것이라는 추측에는 대체로 수긍한다. 
고기가 인류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느끼는 것이다. 특히 스포츠에서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유럽인들과 경쟁하면서 아시아인들이 겪었던 열등감이, 고기를 보충하면서 희석된 것처럼 말이다. 
비건이든 베지테리안이든 모든 채식주의자들은 각종 심장질환 등을 일으키며 ‘풍요의 질병’이자 전염병으로 일컬어지는 ‘비만’의 원인으로 육식을 예로 들지만, 사실 그것은 과다한 섭취가 원인이지 고기 자체가 원인은 아니다. 
이들은 윤리적 소비를 내세우며 축산업을 ‘살생’의 산업으로 매도하고 공격한다. 급격한 기후변화의 원인으로 축산업을 꼭 집어낸다. 지금 현대인의 기대수명이 높아지고 그만큼 건강해진 것은 의료기술의 발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인체의 고른 성장을 돕는 양질의 지방과 단백질을 제공하는 고기의 기여도는 아예 거론조차 안한다. 
오히려 축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을 동물을 학대하고, 함부로 살생해 사람들에게 해로운 식품을 공급하는 ‘악인’으로 비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은 윤리적 소비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스위스의 사회학자이자 유엔 인권이사회 자문위원이었던 장 지글러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를 ‘소비사회’라고 했다. 소비사회는 그 사회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위해 풍요라고 하는 것을 창출해냈고, 소비자들은 상품에게 영혼을 파는 셈이라고 했다. 
산 것을 버리고 또 다시 최대한 많은 양의 상품을 사들이도록, 필요하지 않아도 자꾸 새로운 상품을 사도록 부추김을 받는 사회를 말한다. 
채식주의를 선택하는 것은 자신들의 선택이다. 그리고 본인들이 윤리적 소비라고 생각하는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고기를 끊는 것도 마찬가지다. 축산업을 친환경적으로 바꾸라고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매도하는 행위를 윤리적 소비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일방적 매도 없어야


오늘날 기업들이 자본을 축적하고 축적된 자본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혁신적인 제품을 생산한다고 찬양받는 그 제품들조차 ‘윤리적’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기까지에는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최근 유니세프에서는 중남미나 아프리카 등지의 광산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10살 내외의 어린이를 착취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기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왜 어린이가 착취당하는지 그들의 노동으로 우리가 어떤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손에서 결코 떨어뜨리지 않으며, 편리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휴대폰이 바로 저들 10살 내외의 왜소하고 어린 아이들의 노동착취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면 믿을까?
외따로 떨어진 광산 지대에서 민간기업들의 용병들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그들은 휴대폰 제작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콜탄을 채취한다. 오늘날 콜탄은 금과 은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는다. 비행기 동체는 물론 우리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수많은 물건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 광산의 암석은 부서지기 쉬워서 낙석이 빈번하다. 또 갱도가 너무 좁아서 몸이 마른 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있다. 어린 아이들이 산채로 매장되거나 질식사하는 사고가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때문에 광산 소유주들은 수시로 어린 노동력을 찾아 나선다. 인근의 어린 아이들은 그 광산의 무서움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가족들이 굶어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알기에 인력 보급 담당자를 따라나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휴대폰을 사용하는 이들을 ‘살인자’ 내지 ‘살인 동조자’ 또는 ‘방조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이같은 예를 드는 이유는 축산업을 오염산업이라고 말할 때에도 보다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불편한 진실도 마주해야 하는 용기는 필요하다. 하지만 일방적인 매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축산경제신문 202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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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온은 전 지구 평균보다 높아지고 있다. 한반도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현재 연간 10.1일인 폭염일수가 35.5일로 3배 이상 늘어나고, 온열질환으로 인한 노인과 사회 경제적 취약계층의 사망이 증가한다. 
기온 상승 때문에 동물을 매개로 한 질병이 더 자주 발생한다. 홍수 위험과 동시에 가뭄 피해도 심화된다. 온실가스 배출이 지금처럼 지속될 경우, 21세기 중반 한국이 겪게 될 상황이다. 

 

항상 등장하는 산업


지난달 28일 환경부와 기상청이 2014년 이후 6년 만에 발간한 ‘한국 기후변화 평가보고서 2020’의 내용이다. 지금과 같은 온실가스 배출이 계속되면 한국의 연평균 기온은 21세기 말 최대 4.7도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온도가 4.7도가 올라간다는 의미를 우리는 잘 모른다. 막연히 조금 뜨거울 정도라거나 그래서 그게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른다. 
<뉴욕매거진>의 부편집장이자 칼럼니스트이며 미국 싱크탱크 기관인 ‘뉴아메리카’의 연구원인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가  저서 「2050 거주불능 지구」에서 언급한 내용을 인용하면 가히 충격적이다. 
그는 단지 1도 상승이 가져오는 결과조차 세계대전이나 암 재발의 실상만큼이나 지켜보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기온이 2도 상승하면 빙산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4억 명 이상의 사람이 물 부족을 겪으며, 적도 주변의 주요 도시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하고 북위도 지역조차 여름마다 폭염으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극심한 폭염이 32배 더 자주 발생하고, 매 폭염이 지금보다 5배 더 오래 지속돼 93배 더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노출된다. 
3도 증가하면, 남부 유럽은 영구적인 가뭄에 시달리고 중앙아시아는 평균적으로 지금보다 19개월 더 오래 지속되는 건기를, 카리브해 지역은 21개월 더 오래 지속되는 건기를 겪는다. 매년 들불과 산불로 불타는 지역이 지중해 지역에서는 2배, 미국에서는 6배 이상 늘어난다. 
4도 상승하면, 라틴아메리카에서만 뎅기열 발발 사례가 800만 건 이상 증가하고, 식량 위기가 거의 매년 전 세계에 닥친다. 폭염 관련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9% 증가한다. 
하천 범람으로 입는 피해가 방글라데시에서는 30배, 인도에서는 20배, 영국에서는 60배 증가한다. 이에 따라 분쟁과 전쟁 역시 2배 늘어날 수 있다고 한다. 
기상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면 향후 2100년까지 기후공격으로 이렇게 극심한 피해가 발생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다. 그래서 그 뒤에 따라올 100년을 가리켜 ‘지옥 같은 100년century of hel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급격한 기후변화를 왜 언급하는가? 그것은 기후의 급격한 변화를 이야기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축산’이 등장되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다른 요인들을 모두 제외하고서도 동물을 매개로 한 질병 하나만으로도 축산업을 끔찍하게 미워하기에 충분하기에 그렇다. 

 

축산업 폄훼 ‘이념화’


축산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끔찍한 이야기들을 왜 하느냐”고 따지듯 묻겠지만, 지금 축산업을 둘러싼 주변 환경의 변화는 무허가 축사니 퇴비부숙도 검사의무화니 만이 아니기에 그렇다. 
앞서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도 “직접 소를 잡아다가 햄버거를 만들어 먹을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채식주의자로 살 생각도 없다.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윤리적으로 구별하는 게 전혀 복잡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먹이사슬 꼭대기에 위치한 우리가 스스로의 지위를 마음껏 과시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급격한 기후변화에 가축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고기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고기를 생산하는 산업이 인류 생존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히고 있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들은 그것들이 하나로 모여 축산을 폄훼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화’ 되고 있다. 
축산인들은 억울하다고 하지만 가축을 사육해서 생활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축산업이 단지 오염산업일 뿐이다. 그들의 이중적 사고가 잘못된 것 아니냐고 따진들 나아질 리도 없고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좋아질 리가 없다. 
축산업에 대한 극단적인 반대는 이제 외국의 일만이 아니다. 햄버거를 만들기 위해 막대한 산림을 훼손하고 소들이 뿜어대는 메탄가스의 분자가, 이산화탄소 분자보다 25배나 더 많은 태양 열기를 잡아둘 수 있다거나, 전세계 13억여 마리의 소들이 대기 중에 방출되는 전체 메탄의 12%를 차지하고 있다는 주장을 과장된 것이라고 말하지도 못한다. 
우리의 추억 속에 있는 농촌의 소가 더 이상 푸른 들녘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소가 아닌 것처럼, 농촌을 바라보는 특히 가축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전의 푸근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축산이 전업화가 되면서 국민 건강에 지대한 공헌을 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전업화가 되면서 빚어진 부정적 외부효과를 야기한 부작용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축산경제신문 20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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